[김용필의 인문학 여행] 제1화 - 난지도 자연유산

“蘭꽃 섬 이야기”

김용필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

-구암 한백겸

 

물이촌구암기는 수색 강변에서 상암의 난지도와 한강을 바라보며 자연 풍치를 묘사한 수필로 구암 한백겸이 썼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사나운 서리가 밤에 내리고 숨어 있던 벌레들이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이미 거처를 정하고 나서 이곳에 앉아 눕고 노닐다 보니, 그 산빛과 물빛이 나의 그윽한 흥취를 도와주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앞에는 강 너머로 광주의 청계산, 과천의 관악산, 금천의 금주산, 안산의 소래산과 같은 다른 산들이 강기슭을 따라 봉우리로 이어져 하나로 빙 둘려 있다. 봉황새가 춤을 추고, 용이 날아오르는 모습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난지도 앞에는 강이요. 강 건너 여러 산으로 둘러서서 남태령 관악과 금주와. 소래가 봉우리로 접하여 봉황이 춤을 추고 용이 공중으로 나는 듯 서로 상백을 이루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1천 길 높은 삼각산 세 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위험스러운 모습으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형세를 이루었고, 오른쪽으로는 먼 포구와 덕양산 메 뿌리가 한끝 아득하여 모든 것을 다 포용할 도량을 보이니 잠시간에 돌아보는 중에도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샛강 건너 난지도와 매봉산이 둥둥 한강에 떠 있는 듯 바로 문 앞에 마주 서는 것은 선유봉이라 하는데 한 덩어리 외로운 산이 강 가운데로 날아 떨어진 듯, 여러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와도 같다. 그 주위를 둘러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양천의 소요정으로 백 척이나 되는 두 기둥이 물 한 가운데에 마주 서서 마치 신선이 사는 동부가 문을 열어 놓은 것 같다. 강에는 높은 돛대의 조각돛이 바람을 따라 오가며 여기저기에 보이다 말다 하니 들판 밖 큰 강가에서 언제나 구경할 수 있는 일이다.

 

난지도 늪엔 늙은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6, 7마리씩 무리를 지어 혹은 물을 마시고 혹은 누워 있으니 문밖의 푸른 풀은 언제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연기 저녁노을과 가을의 달, 봄의 꽃으로 그 경치가 때를 따라 무궁무진한데 모든 것을 다 눈앞에서 거두어 간직하여 우리 집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오직 후면만은 보이는 것이 없고 높은 벼랑과 끊어진 산록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북풍이 세차게 불어도 등을 내놓으면 따사롭다. 선유의 음양가는 체사용삼(體四用三)이 이수를 논하였다.

 

천지간에 동··남은 볼 수 있지만 북쪽은 볼 수가 없다. 이곳이 참으로 천지자연의 형세를 이룬 물이촌 구암(수색)이라.’

 

도성으로 가는 한 쉼터도 다 못되고, 궁전의 풍경소리가 때로 들려오니 조정 대신들도 촌사를 짓고 전토를 구하면서 이곳보다 편할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버려두어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신이 깊이 감추어 두고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한강과 샛강 사이엔 섬이 있는데, 주민들이 벼와 서숙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마을에서 사는 백성들은 늘 강을 사이에 두고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이름하여 수이촌(상암)인데 언제나 여름이면 큰 장마가 져서 강물이 크게 불어나 두 강물이 하나로 합쳐져 바다를 이루게 되고, 물빛이 하늘에 잇닿아 마을과 벌판이 온통 물의 일색(수색)으로 변한다.”

 

사라진 난지도를 추억하다.

 

나의 고향은 난지도였다. 난지도에서 태어나서 8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갔다. 상암동 월드컵 공원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할 다큐 작품을 만들려고 난지도를 찾았다. 8살 때 쓰레기장을 뒤지며 넝마를 줍던 소년이 부모를 잃고 홀트 재단에 넘겨져서 프랑스로 입양되어 갔다가 다큐멘터리 작가가 성공하여 20년 만에 난지도를 찾은 것은 생태복원 다큐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서였다.

 

파랑새가 모래언덕에 토굴을 파고 청둥오리 떼가 갹갹대던 갈대 섬이 어느 날 별안간 쓰레기 더미로 변모하고 그 삭막한 쓰레기 더미로 악취 나던 폐허가 친환경 친 인간적인 생태 환경으로 탈바꿈하여 그 위에 월드컵 경기장이 생기고 디지털 미디어 상암동 신도시와 아름다운 생태공원이 조성된 난지도의 역사와 변화를 담으려는 것이었다.

 

기억 속의 고향, 8살 때 난지도를 떠난 후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정리하지 못한 혼돈의 질서를 정리하려는 작가의 욕망이었다. 평화로운 모래섬, 갈대와 수초가 무성한 늪의 섬, 땅콩밭과 수수밭 사이로 송아지가 뛰어놀던 곳, 노배를 타고 웅어를 잡던 아름다운 섬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독가스 악취 나는 쓰레기장을 뒤지는 넝마 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장이 생기고 지금은 살아있는 공원으로 난지도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계속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과거와 현실이 전혀 다른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리해 할 것인가, 모래섬 난지도와 쓰레기장 난지도를 헤매던 소년의 슬픔과 월드컵 공원 조성으로 변화된 난지도의 모습에 안갯속 같은 미진을 헤매는 복잡한 심기가 혼란스러웠다8살 때 난지도의 아름다운 고향을 잃고 부모님을 도와 쓰레기 더미를 헤매며 넝마를 줍고 다녔다. 쓰레기 썩는 냄새와 쓰레기 타는 매콤한 들녘을 헤매면서 휴지와 넝마를 뒤지고 다녔다. 날이 갈수록 쓰레기 더미는 높은 산을 만들었고 매콤한 연기와 냄새가 풀풀 나는 쓰레기 벌판엔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고양이 떼들과 들개들이 나돌아다녔다.


부모님은 쓰레기 더미 옆에 움막을 치고 넝마를 주워 날랐다. 그때 우리 집뿐만 아니라 수많은 넝마 꾼들이 난지도 쓰레기장으로 모여 천막을 치고 넝마를 주웠다. 부모님을 도와 넝마를 줍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레기 차가 내리는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난 쓰레기 운전자의 도움으로 파출소에 맡겨졌고 곧장 홀트 아동복지원에서 프랑스로 입양되어 갔던 것이다.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다. 고양이 떼들이 사납게 울부짖던 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난지도 쓰레기장을 뒤덮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불이 나서 메케한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진 어둠 속에서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며 폐품과 넝마를 뒤지고 다녔다. 멀리서 우렁찬 엔진소리를 내며 쓰레기 트럭의 달려와서 우랑탕탕 쓰레기를 쏟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닌 막 버려진 쓰레기를 헤치며 넝마를 줍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른 덤프트럭이 쓰레기를 싣고 와서 부모님이 일하던 것을 모르고 쓰레길 쏟아버렸다. 부모님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 속에 갇혀버렸다. 난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서 통곡하며 소릴 쳤다.

 

사람이 죽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쓰레기 더미에 묻혔어요. 살려줘요.”


그러나 쓰레기 차는 떠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죽었어요. 누구 없어요?”

 

난 쓰레기 더미 속에 묻힌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려고 쓰레기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날이 밝자 넝마들이 잠자는 나를 발견하고 깨웠다. 비로소 부모님이 쓰레기 더미 속에 깔린 것을 알게 되고 구조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두 분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부모님의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지고 난 홀트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하룻밤에 부모를 잃고 슬픔에 잠겨 지냈는데 난 프랑스로 입양되어 떠났다. 프랑스에서 좋은 양부모를 만나 교육을 잘 받아 사진작가가 되었고 마침내 파리의 한국 소년이란 다큐를 만들어 콩쿠르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다큐작가로 이름이 알려졌고 그 작품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항상 머릿속에는 난지도 쓰레기 산으로 채어져 있었다. 서울시청 공무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앙리 페트로 작가님, 한국의 생태복원 작품 하나 만들어 보지 않을래요?”

좋은 소재가 있나요?”

쓰레기장이 생태공원으로 변한 한국의 상암동 월드컵 공원 이야기입니다.”

난지도 상암동이요. 그곳은 내가 태어나 고향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주세요.”

좋습니다. , 만들고 말고요. 내 고향이야긴데요.”

 

부랴부랴 서울을 찾아왔다. 월드컵 공원 관리소장으로부터 상암 월드컵 공원을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하는 다큐를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죽은 땅에 생명을 길러낸 월드컵 공원이란 주제였다. 서울시청은 상암 공원을 세계 자연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야심을 가고 적극 지원하였다. 내가 보기에도 충분한 자연유산의 될 가치가 있었다월드컵 공원 관리소장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전 최민이라고 합니다. 앙리 페트로 씨의 귀향을 축하합니다.”

 

그녀는 도시 구조학을 연구한 환경학 박사였다. 외모가 수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부인이었다.

 

앙리 페트로입니다. 한국 이름은 금난사라고 합니다.”

 

최민 박사는 호텔을 잡아주고 식사를 하면서 월드컵 공원의 구체적인 로드맵과 구성안을 설명하였다.

 

앙리 페트로 씨, 난지도에서 태어났으니 그때의 풍경을 기억하시겠네요?”

난지도는 8살 때까지 살았던 고향입니다.”

이야기가 쉽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프랑스로 입양되었나요?

부모님이 넝마를 줍다가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부모님은 아름다운 난지도에서 평화롭게 땅콩 농사를 지으면 살았는데 어느 날 난지도가 쓰레기 하차장으로 변하면서 농토를 잃고 갈 곳이 없어서 쓰레기를 뒤지는 넝마주이가 되었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돌아가셨다.

그랬군요. 슬픈 아픔이 있었군요. 아무래도 작품을 만들려면 생태공원의 개념과 현장을 체험해야겠지요.”

빨리 가보고 싶습니다.”

먼저 복원된 상암 월드컵 공원을 체험케 해 봅시다.”

 

그녀는 난지도 자연사 박물관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자연사 박물관엔 사라진 난지도의 역사를 추억하는 사진들로 차 있었다. 난 넝마주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졌다. 넝마를 줍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넝마란 쓰레기 줍는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징용되어 넝마(헝겊이나 폐지)를 주워 자원에 보탰다.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 고철, 구리, 고물 등을 주워 모아서 고물상에 판매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큰 대나무 망태기를 등에 지고 긴 집게로 버러진 옷과 헝겊, , 못 쓰게 된 폐지나 빈 병을 집어넣었다.


넝마주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부랑아나, 집이 없는 노상인과 기차역, 다리 교각 밑에서 생활하는 거지들이었다. 한국 전쟁 후 1960년대까지 넝마주이는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아, 거지들로 밤길 공포의 대상이었다. 1960년 국토건설단의 운영과 1970년대 직업훈련원이 생기면서 이들은 건축, 목공, 기계 등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으로 변하였다.


나는 난지도의 풍물을 보면서 희미한 기억 속의 옛날을 더듬고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엔 난지도의 모래섬과 늪의 갈대와 수란, 지초, 땅콩밭과 수수밭 풍경 사진이 그때를 되뇌게 하였다. 육지에서 샛강을 건너 난지도에 오는 농부들과 행호에서 웅어를 잡던 풍경이 생생한 추억으로 떠올랐다. 자연사 박물관 소장이 마른 갈대로 빗자루를 만들다 말고 우릴 맞았다.


어서 오세요. 최민 박사님.”

소장님, 일전에 말한 프랑스 작가분을 모시고 왔어요.”

앙리 페트로라고 합니다.”

이곳 소장 김사인입니다.”

앙리 페트로씨, 이분은 난지도에서 평생 갈대 빗자루를 만드는 장인입니다.”

갈대를 가공하여 빗자루를 만드는 장인이라고요?”

관장님은 난지도의 역사니까 이야길 들으면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한국 이름은 금남사라고 합니다. 금모래 밭에서 태어난 아이란 뜻이랍니다.”

성이 금씨라고?”관장님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관장님, 앙리씬 유명한 다큐를 작가예요. 월드컵 공원의 역사를 다큐로 만들 겁니다. 많은 자료를 설명해 주십시오.”

한국인 프랑스 작가... 난지도를 안다니 설명이 쉽겠군요.”

 

난지도 자연사 박물관에서 많은 옛 난지도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어린 날 보았던 풍경들이라 그만 울컥하는 추억의 애수에 젖어버렸다. 실외와 실내에 안치한 장식품은 옛 난지도 풍경 그대로였다. 8세 때 난지도에서 본 풍경이었다. 그리고 넝마주이 사진과 넝마를 찍은 고물상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졌다. 아버지가 넝마를 줍다가 돌아가실 때 생각이 났다. 넝마꾼 사진 앞에서 그만 힘이 빠져 흔들리는 나를 의식하였다.


, 그렇게 심취하세요?” 최민이 물었다.

넝마 꾼을 보니까 옛 생각이 나서요.”

 

자연사 박물관에서 난지도의 옛 풍물을 보면서 희미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모래섬과 늪의 갈대와 수란, 지초, 땅콩밭과 수수밭 풍경의 사진들이 실제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샛강을 건너는 농부들과 행호에서 웅어를 잡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우린 김사란 장인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갈대꽃으로 만든 빗자루가 한 벽면에 가득 걸려 있었다.

 

관장님이 이 빗자루를 만드셨다고요?”

맞아요, 갈대꽃으로 만든 빗자루입니다.”

, 소중한 것을 만들고 계십니다.”

잊어버리기에 아까워서 소일삼아 만드는 거랍니다.”

 

관장님은 습지 식물공예 장인이었다. 노인은 난지도의 갈대를 이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때 난지도 사람들은 갈대 빗자루를 만들어 사용하고 팔았다. 질기고 부드럽고 가벼워서 갈대 빗자루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저의 아버지고 이런 빗자루를 만들어 사용했어요.”

 

이 말에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리고 노인은 하던 작업을 계속하였다. 마른 갈대 꽃대를 한 움큼씩 쥐어 잡고 모시 줄로 꼭꼭 매듭지게 묶었다. 그리고 5개의 묶음을 한데 모아 층층 되게 깔아놓고 오색 줄로 묶어서 갈대 빗자루를 만들었다. 지금은 귀한 빗자루지만 옛날엔 자주 만들어 쓰던 빗자루였다. 갈대 빗자루는 비실이 섬세하여 방바닥에 있는 머리카락까지 쓸어 낼 수가 있었다.


갈대 비 재료는 무엇인가요?”

 

최민 박사가 물었다.

 

재료는 한강 변에 나는 갈대꽃만 뽑아서 이용한답니다.”

 

할아버진 갈대 빗자루 만드는 작업을 이야기하였다. 갈대꽃이 필 때 개천에 나가서 막 피어나는 갈대의 꽃대를 뽑아서 가지런히 고른 다음 소금물에 잠겨 풀을 추긴 후 잎을 바르고 꽃대만 골라 팔팔 끓는 물에 데치고 그늘에서 말리면 곱고 부드러운 마치 붓대 같은 빗살이 된다. 잘 마른 빗살은 촉촉이 물에 적셔서 4, 5뭉치로 만들어 오색실로 마디마디로 묶어 만든 뭉치를 모시 실 끈으로 한데 묶어서 빗자루를 만든다. 그리고 빗자루에 나무 말뚝을 박으며 탄탄한 빗자루가 되고 끝을 고르게 잘라내면 아주 부드러운 빗자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이군요.”

헌데 요즈음은 갈대꽃을 꺾지 말라고 해서 공예에 지장이 많답니다.”

 

그는 빗자루 아틀리에 전시한 갈대공예 작품을 구경시켜 주었다. 갈대로 만든 수많은 바구니와 생활용품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끄는 물건은 대나무와 갈대를 섞어서 잡아맨 넝마 바구니였다. 넝마꾼은 쓰레기를 담는 큰 바구니를 등에 지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집게로 집어 등 뒤로 바구니에 던져 담는 것이다. 넝마 바구닌 보물단지라고 한다. 길 가다가 좋은 물건이나 옷가지를 마구잡아 넣는다. 사람들은 넝마 꾼이 지나가면 뭔가 하나는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만큼 바구니엔 값진 물건이 담기곤 하였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하던 생업 도구였다. 많은 넝마 바구니 중에 아주 헤진 대나무 넝마 바구니를 발견하였다. 40년 전에 아버지가 쓰던 넝마 바구니 같았다. 난 한참 바구닐 들여다보다가 노인의 전시실을 나왔다최민 박사는 상암동 디지털 미디어 시티의 번화한 식당에서 꼬리곰탕으로 점심을 먹고 대충의 로켓 계획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수색전철역이었다.

 

앙리, 작가님. 시작은 이곳부터입니다.”

전 전혀 신도시 상암동을 몰라요.”

이곳 수색은 한강 물이 밀려와서 닿은 나루터입니다.
물이 들어왔다고요? 그럼 이곳이 모래내입니까?”

맞아요. 모래내 일부입니다.”

 

모래 내는 강물이 말라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만든 곳이었다. 조선 땐 이곳을 금성 평사라고 하였다.

 

금성평사의 수이촌 풍경

 

나는 수색에서 이곳을 거쳐 간 역사 인물을 찾아 시놉시스를 만들기로 하였다. 인공 산 난지도가 없을 땐 이곳은 한강 물에 잠겼던 모래밭과 지초 늪이었다. 지금은 난지도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져 버렸지만, 난초와 지초 향 짙은 금성평사는 아름다운 모래사장이었다.

앙리 작가님, 이곳을 금성평사라고 해요. 금빛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맞아요. 이곳에 모래사장이 있었어요?”

 

한강 물은 난지도와 매봉산을 돌아 이곳까지 뻗쳐있었다. 한강 건너 양천에서 바라본 금성평사 난지도는 참 아름다운 강변이었다. 한강 소호에 조각배를 띄우고 고기 잡는 어부의 모습이 평화롭다. 눈앞에 꽃섬 난지도의 진 푸른 녹색 숲이 그려졌고 휴암리와 수생리 사이로 흐르는 샛강에선 아이들이 멱을 감고 놀았다. 난지도에서 본 금성산 아래 금성평사의 금모래가 유난히 반짝였다. 난꽃과 지초꽃이 영 그러진 모래 산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던 그곳에 지금은 인공산 난지도 쓰레기 처리장이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으로 높이 솟아 있고 산 위엔 풍력발전용 바람개비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만 하여도 수란 꽃과 지초꽃은 아름다웠다.

 

앙리 작가님, 난지도의 뜻이 뭔지 알아요?”

난초와 지초가 많이 피던 섬이란 뜻이죠.”

아는군요. 난지도의 난초와 지초는 유명했답니다. 특히 지초는 만병통치약이지요.”

알아요. 배가 아플 때 어머닌 빨강 지초 뿌리를 달여서 먹였어요. 지초를 먹고 나면 아픈 배가 언제 그렸느냐는 듯이 나왔어요.”

그걸 다 기억하는군요.”

 

지초의 잎은 나물로 무쳐 먹고 뿌리는 약초로 썼다. 자줏빛의 지초 뿌리는 옷감을 염색할 때 염료로 쓰였다. 어릴 때 자줏빛 염색을 한 삼베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난지도에서 나는 지초는 모래지초라고 하였다. 난 수색역에서 상암동 디지털 미디어 시티를 걸으면서 지난 추억에 젖어 있었다.

 

최민 박사님, 저기 보이는 산 말이에요. 옛날엔 부엉이 산이라고 했어요.”

. 매봉산 말이군요.”

저 산은 원래 섬이었어요.”

 

그때 부엉이산 쪽 휴암리와 소생리 사이로 샛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고기를 잡았던 곳이었다.


난지도에 웅어란 고기가 많이 났답니다.”

웅어요?” 


최민 박사가 물었다한강 앞바다를 행호라고 한다. 덕양산(행주산) 앞 강에 선비들과 어부들이 배를 띄우고 웅어잡이를 즐겼다. 바닷물이 올라오는 봄날 강물에 그물을 쳐 놓고 기다린다. 서해에서 웅어 떼들이 물길을 따라 몰려오면 그물을 건진다. 행호의 웅어는 임금님 수라상에 오를 만큼 맛이 좋다. 봄철엔 웅어가 진미다. 해마다 바다에서 한강으로 올라오는 웅어를 잡으려고 어부들이 배를 띄운다. 덩달아 한량들은 술병을 배에 싣고 나와 웅어 물회를 즐겼다.


가을 전어 맛보다 봄 웅어가 최고더라.’ 전어는 평민이 즐겨 먹고 웅어는 임금님이 드시는 생선인 만큼 봄철 한강 행호의 웅어는 제철 맛을 톡톡히 발휘하였다. 우린 차를 타고 행주산성 아래 강변으로 나섰다. 어부들이 한강에 그물을 던져놓고 여한을 즐길 수 있었다. 눈앞에 금성평사 난지도를 바라본다. 40년 전 만 하여도 한강 물은 수색의 모래내와 홍제동 연신내까지 뻗어 오른다. 금성산 아래 성산동은 아름다운 금성평사 강변이었고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이룬 떠도는 섬 난지도는 금모래로 유명했다. 상암동과 수색의 물이촌 사이로 샛강이 흐르고 있었다.


떠도는 모래섬 난지도는 수란과 연꽃과 수초가 무성하여 바다에서 오르는 물고기들이 은신처였고 철새들은 이들 고길 잡아먹으면 새의 낙원을 이루었다. 불광천과 모래내 홍제천이 만나 아름다운 토사를 한강으로 품어대고 강 건어 소금 창고 염창동에서 흐르는 안양천은 안양과 소하에서 모래를 싣고 와서 행주산 앞으로 흐르다가 북한산 물을 모은 창릉천 샛강 물에 막혀 강변에 무거운 모래를 쌓아 난지도 모래섬을 만들었다. 곧 아름다운 금성평사의 난지도를 만든 것이다.

 

난지도는 물의 세기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40년 전 만 하여도 난지도와 수색의 물이촌과 부엉이산 상암동 사이로 흐르는 샛강엔 물고기가 많기로 유명하다. 샛강을 건너 물이촌 농부들은 모래섬으로 건너와서 농사를 지어 실어 날랐다. 한강 서호는 강에서 십 리 밖까지 수몰 늪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성평사는 성산의 금성산 아래에서 평사를 이루고 남가좌동 모래내 수색 덕은리, 현천동까지 물이 차 있었다. 물치에서 수초 늪을 건너면 물이 많으면 섬이 되는 상암동의 매봉산이 있고 그 앞에 모래섬 난지도는 아름다운 갈대 섬이었다.

 

조선 중기 역학자이며 한학자인 한백겸은 수색의 물이촌에 정자를 짓고 상암과 샛강을 건너 난지도를 드나들며 농사를 짓고 물고길 잡으며 여생을 소일하였다. 조선의 대문장가이면서 반항아인 금성거사 권필은 난지도에서 평생 시를 지으며 임금과 못난 선비들을 질타하다가 광해군에게 맞고 죽었다. 우린 옛날 한백겸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난지도 인공산 공원을 둘러보면 옛 정치를 되살려 찍고 있었다한백겸은 샛강 나루 수색의 물이촌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난지도를 드나들며 고길 잡으며 풍류를 즐겼다. 최민 박사는 옛 선비 한백겸의 차림으로 나타났다.


난지도는 서호의 낙원이었다. 수초가 무성하였고 물고기 서식의 적합소이며 모래땅이지만 물이 풍부하고 기름져서 야채, 땅콩밭, 수수밭이 무성했다. 1977년까지 난지도에서 쌀농사를 지어 쌀 5가마 정도를 수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이 차면 나룻배가 드나들었고 물이 마르면 소달구지를 타고 드나들면 농사를 지었다. 강 건너 양천에서 바라보는 금성평사는 아름다운 모래사장과 상암나루 수색은 수변 경치가 장관이었다. 한강 서호는 삼남의 곡창에서 들어오는 세관선과 고기잡이 배들이 번창했던 수변이었다.

 

한백겸은 물이촌 구암기에서 난지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였고 겸재 정선은 금성평사를 묘사하면서 행호관어도로 그려 난지도 앞 행호에서 웅어잡이 풍류를 노래하였다. 서거정은 한백겸과 서호의 망호정에서 독서당을 만들어 후학을 가르쳤다. 성산에서 수생리 후암리를 거처 난지도 끝 물길은 고양으로 들어서는 대로 석교가 놓여있는데 창릉천의 물이 넘쳐 늘 잠겨 물이 빠진 날을 이용하여 석교를 건너 고양으로 갔었다.

 

수양버들과 갈대의 난꽃과 지초꽃이 무성했던 모래섬이 그립다. 난초와 지초의 섬 난지도는 상암동 물치에서 농부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 농사를 지었다. 갈대와 지초가 무성한 난지도의 82만 평 땅은 기름진 땅이어서 땅콩, 수수 기장 조. 귀리 개구리참외가 잘 되었다.

 

앙리 씨, 난지도가 땅콩밭인 것 알아요?”

, 1900년 땅콩은 전국의 30%를 생산할 정도였답니다.”

보물섬이 사라졌군요.”


이곳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싸움터였다. 권율 장군은 난지도 갈대숲에 병사를 주둔시켜놓고 기다리다가 왜군이 진입하자 일제 공격을 가하여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를 이끈 곳이 난지도 갈대밭이었다. 물치의 샛강 갈대숲엔 수적(해적)들이 많았다. 수적들은 갈대 숯에 숨었다가 고양으로 오가는 손님들의 봇짐을 털거나 고기잡이 상선을 습격하여 물건을 털어가는 사례가 많았다.

 

수생의 부엉이 산은 조선 중기 김자점이 풀무골(야동)이란 대장간에서 병기를 만들어 인조반정을 기도했다. 반란을 목적한 대장간이기 때문에 무이동 소식 고개(성산동)에서부터 보초를 세우고 병기를 만들었다. 이 병기를 이괄과 이귀에게 제공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따라서 한백겸도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매봉의 풀무골에선 위조 엽전을 만들어 국정을 혼란케 하였고 김자점은 인조의 명령을 받아 자객을 보내 소현세자를 죽였다. 나는 최민 박사가 연구한 자료를 근거로 다큐를 찍고 있었다. 난지도는 모래섬이지만 강변은 습지에서 갈대가 많이 자라서 갈대 빗자루 장수들이 갈대꽃을 따려고 모여들었다.

 

한백겸과 권필의 우언풍자시(寓言諷刺詩)

 

난지도 강변에서 주고받는 구암과 석주의 우언풍자시는 강호 풍류를 대표하는 최고의 시가이다.

 

앙리 페트로 작가님, 금난사란 이름이 참 멋있어요.”

금모래 밭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래요.”

금모래 섬에서 태어났다고요?”

. 어머니께서 땅콩을 캐다가 낳았답니다.”

금난사란 난지도 황금 모래란 뜻이군요.”


한강의 샛강 난지도는 물이촌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모래섬이었다. 모래섬에 물고기가 지천이라 청둥오리 철새가 날아들고 모래밭엔 땅콩, 수수, 채소밭이 늘비하고 난초와 지초 꽃이 피어있고 억새와 갈대가 우거진 강가엔 방목한 소들이 그림 같이 풀을 뜯었다. 하중도, 중초도, 꽃섬, 압도, 문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었다.


물이촌 나루터에 고깃배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구암 한백겸의 이웃 동네에 사는 권필(석주)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념과 추구하는 경향이 달라 잘 만나지 않았으나 구암은 우언풍자시(寓言諷刺詩)의 가인인 권필을 초대하였다.


석주, 나하고 행로(행주)에서 낚시질이나 하세그려.”

구암과 낚시질을 하다니 영광입니다.”

지금 한강에 웅어가 물 반 고기 반이라네.”


구암은 나룻배 초동에게 잘 익은 탁주를 싣게 하였다. 초동은 샛강에 배를 대고 구암과 권필을 태웠다.


이보게 석주, 오늘은 웅어를 잡아 안주로 실컷 취해보세 그려.”

지금이 웅어 철이지요. 그런데 웅어를 어떻게 잡아요.”

웅어는 제가 잡지요.” 


나룻배 사공인 금원이란 초동이 말했다.


석주, 금원이가 웅어잡이 그물을 쳐 놨다네.”


금원은 구암과 권필을 태우고 덕양산 행호로 나아갔다. 행호는 난지도 샛강을 지나 흐르는 아름다운 한강이었다. 행호관어(幸湖貫魚)는 동국세시기에 서호에서 잡은 웅어를 꼬챙이에 꿰어 매달아 말린 생선을 말한다. 행호관어는 사옹원에서 행호에 분소를 두고 웅어를 잡아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다. 그런데 1741년 겸재 정선은 양천에서 강 건너 바라보이는 서호의 금성평사를 그림으로 나타냈다. 겸재는 아름다운 행주산성 부근 행호의 풍치와 웅어잡이 배의 풍경을 그려서행호관어라 하였다.


구암이야말로 강호 풍류를 즐기는 신선이에요.”

풍류라면 나보다 석주지,”


늦봄엔 황 복어국, 초여름엔 웅어회

복사꽃 넘실둥실, 떠내려오니

행호에 그물 던져 웅어를 잡노라.

 

행호의 웅어잡이는 음역 3.4월에 가장 번창하였다. 구암은 행호에서 황복어와 응어잡이 경관을 노래하며 즐겼다. 아무튼 봄이면 행주산성 행호에서 웅어(위어葦魚)를 잡아 수라상에 올렸는데 공급이 쉽지 않아 사옹원의 위어 소에선 강화의 서해안 일대에서 밴댕이를 대신 잡아 인조에게 올렸다. 5월경에 위어가 산란을 위해 행호 양천 부근으로 올라오면 위어소 어민들이 잡아서 관목어나 횟감과 젓갈용으로 사용하였다.

 

권필과 한백겸은 광해군에게 이쁨받고 버림받은 선비였다. 구암 한백겸은 광해군의 신복이었으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광해군을 박해했던 선비였고 권필은 광해군의 개혁을 지지한 선비인데 왕 처족의 비리를 거세게 고발하다가 버림을 받았다. 한백겸은 호조 참 의였던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여했다가 정여립이 자살하자 친구인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이 도와달라기에 그의 죽음을 거두어 준 사건에 연좌되어 장형을 맞고 귀양 갔다가 임진왜란 때 석방되었다.

 

파주 목사였던 구암은 1611년 벼슬에서 물러나서 동생의 권고로 고양의 수이촌(수색)에 집을 짓고 이름을 물이촌이라 부르고 서재를 짓고 물이촌구암(勿移村久庵)이란 사액을 달고 역학과 사학에 몰두하여 주역 전의를 교정하였고 1614년에 역사 지리서인 동국지리지를 집필하였다. 한강 난지도 주민들은 벼와 서숙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강 건너 물이촌 마을에서 사는 백성들은 강을 건너와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름과 가을이 서로 바뀌는 철에는 큰 장마가 져서 강물이 크게 불어나 샛강이 사라지고 난지도가 물에 잠겨 바다를 이루게 되고, 물빛이 하늘에 잇닿아 마을과 벌판이 온통 물 일색으로 변한다.

 

물치는 마포구 상암동성산동과 은평구 수색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장마 때면 한강 물이 이곳 앞까지 올라왔다. 행호로 나가서 초동 금원은 잠가 논 그물을 걷어 올렸다. 팔뚝만한 웅어가 함찬 홰를 치며 퍼덕대고 있었다. 금원은 잡은 웅어를 잘 손질하여 식초로 웅어살을 말았다. 근사한 웅어 물회가 되었다. 구암은 가지고 온 탁주병을 기울였다. 노란 약주가 보기에도 맛깔스러웠다.

 

석주, 이 잔은 단숨에 비우세


구암이 감탄 어린 소리로 말했다. 권필이 단숨에 잔을 비워내고 웅어를 씹으며 말했다.

 

이 맛이 풍류거늘 장안의 잡새들은 권력과 돈에 눈이 어두우니 한심하도다.”

남가일몽, 권력도 사사로운 풍상인 것을, 어떻게 이 맛을 알겠는가.”


권필과 구암은 잔을 주고받았다. 취기가 오르자 시창을 나누었다. 대문장가 권필과 역사가인 한백겸의 술잔은 행호을 마시고 있었다.


구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소.”

생각해서 뭘 해. 다 늙은 몸인데......”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잘 나고 말깨나 하는 자는 매 맞아 죽어가니 무슨 개혁을 하겠소.”

우리도 그들과 다름이 없다네. 우린 이렇게 술이나 마시며 살자고.”


그런데 다음날 권필은 광해군을 모략한 시를 지어 전달하는 바람에 끌려가서 매를 맞고 죽었다. 화가 난 한백겸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1615년 구암은 사재에서 물이촌 구암기(勿移村久菴記)를 남기고 향년 6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정계에 은퇴하고 인조의 장인인 아우 준겸의 권유로 수생리에 초가집 한 채를 지어 구암(久菴)이란 편액(현판)을 달았다. 서재를 수이촌이라 한 것은 수려한 난지도와 한강의 자연경관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자리라는 뜻이었다.

 

나는 최민 박사와 같이 한백겸이 물이촌이라 편액을 단 자리에서 서서 난지도와 한강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전혀 물이촌 구암기완 다른 풍경이었다. 수생리 휴암리에 높은 빌딩들이 상암동 신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상전벽해란 말을 실감하네요.” 내가 말했다.

모래 꽃섬 난지도는 상암 월드컵 공원으로 거듭났고 수생리는 신도시로 새로 났지요. 난 그래서 상암월드컵 공원을 사랑합니다.” 최민 박사가 말했다.

언제부터 최 박사님은 난지도를 사랑했나요?”

어릴 때부터죠, 난지도 때문에 가장 피해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느덧 제가 가장 혜택을 많이 받고 있더라고요.”

왜죠?”

땅값이 많이 올랐거든요. 그래서 받은 만큼의 대가를 되돌려 주려고 그보단 죽음의 땅을 되살리는 일에 매력을 느끼고 시작했어요.”

생태학자가 된 이유군요.”

맞아요.”

그런데 전 얻은 것은 없고 피해와 손해만 보았어요. 난지도를 떠나 프랑스에 살게 된 이유가 되었어요.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앙갚음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나는 수색과 상암동, 매봉과 월드컵 경기장과 모래에 내와 홍제천, 그리고 성산대교의 풍치를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앙리 페트로 작가님, 내일은 우리 웅어회 먹으러 가요?”

웅어회 식당이 있나요?”

, 행주산성 장군식당에 가면 먹을 수 있어요.”

한강에서 잡은 웅어겠죠.”

우리 한백겸 선생의 구암기를 생각하면서 술 한잔해요.”

고맙습니다.”


나는 상암동 호텔로 돌아와서 종일 찍은 다큐를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내일은 슬픈 어린 날의 추억과 한이 서린 난지도 촬영할 것이다. 잠들기 전에 다시 구암의 물이촌 구암기를 읽어 보았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

김용필 danmoon@hanmail.net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8.11 11:18 수정 2021.08.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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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