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의 상수常數/常修는 사랑이어라

이태상

 

2021817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칼럼 문명의 대격변기에서필자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신이 나오면 코로나를 극복할 것으로 믿었는데, 코로나는 인간 의 백신 개발 속도를 비웃듯이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여 인류를 공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년이 넘게 코로나에 시달리다 보니 사람들의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방역이 여기저기서 뚫리고 있다. 코로나는 이런 틈을 타서 더욱더 뛰어난 확산 능력을 갖추어 인류를 위협하면서 직접적인 위협을 넘어 가공할 공포심을 유발하고 있다. 방역을 위한 이동과 경제활동의 제약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불확실성은 기존의 제도와 정부, 심지어는 이웃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곧 공포가 되어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더욱더 높이고 있다.

 

인류는 지금 코로나와 싸우기도 벅찬데, 지구 온도 상승으로 인하여 온갖 자연재해에 고통받고 있다. 태풍과 홍수 그리고 기록을 깨는 무더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고 있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기후 위기는 사막화와 수몰 그리고 식량과 물로 인한 이웃 국가와 집단 간에 충돌을 만들고 있고, 아프리카는 벌써 오래전부터 대규모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기후 이상, 팬데믹, 경제 불안 그리고 정치 불안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던 풍토병이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전염병으로 발생하였다면 이제는 인류의 활발한 교류가 삽시간에 전 세계적인 전염병을 만들고 있다. 사실 전염병은 인류 역사의 분기점에서 늘 문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새로운 문명의 분기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AI 시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인공지능에 의한 산업 재편으로 수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있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대규모 자연재해는 수많은 지역을 사막화하고 있고, 수많은 섬들이 수몰되고 있고, 이로 인한 식량문제와 삶의 터전 문제로 목숨을 걸고 선진국을 향하는 난민들의 발길마다 천대와 공격으로 희생당 하고 있고, 이 문제를 놓고 국제관계는 더욱더 뒤죽박죽되고 있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바이러스를 비롯한 병원체들의 공격은 순식간에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 한 나라에서만 방역을 잘한다고 해서 막을 수 없고 전 인류가 합심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에 혼이 난 선진국들이 자국민 우선으로 백신 접종을 하면서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의 백신 접종이 되지 않은 관계로 코로나바이러스는 수없이 많은 변종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 숙주와 시간을 확보하여 또다시 세계를 공격하고 있다. 그동안 인류는 같은 인류를 적으로 두고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지출 해왔다면, 이제는 바이러스를 비롯한 병원체들의 공격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전 인류가 합심하여 일상적인 방역과 퇴치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아무리 백신을 만들어도 집단면역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생산과 접종 시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변종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철저한 방역과 백신 접종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나 지난 2년의 경험에서 바이러스와의 지루한 싸움은 쉽지 않다. 특히 다민족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이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소수계인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혐오 공격은 코로나 공포가 가져온 또 하나의 사회적 질병이 되었다. 아시아계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커뮤니티를 결속하는 한편 투표 참여에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난 200520년 이상 허가가 나기를 기다려 2천만 불 이상의 자금을 동원, 뉴욕의 센트럴파크에 2주간 The Gates’이 설치됐었다. 7532개의 문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설치 미술작가 크리스토와 진 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의 대답은 이러했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Every artist in the world likes his or her work to make people think.”

 

- Christo

 

당신이 생각한대로이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세상만사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의미는 각자 자신이 부여하는 것이란 뜻이리라. 마치 페르시아의 동화에서처럼 아브 라카다브라 abracadabra’라고 외우면 문이 열린다는 주문呪文 말이다. 우리말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듯이 현대 서양의학에서도 플라시보 효과 placebo effect’라고 약성분이 전무한데도 환자가 약품이라고 믿으면 그 어떤 약못지 않게 약효가 있다 하지 않나.

 

이것은 곧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앙을 통해 어떤 신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로 신앙을 잃음으로써 좀 더 참다운 하느님/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리라. 이럴 때 신앙이란 마음 문을 닫느냐 여느냐에 따라 독선독단의 아전 인수我田引水식 편파적으로 편애偏愛하는 말하자면 인격人格 보다도 못한 신격神格의 신답지 않은 신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2021415일 출간된 한국적인 것은 없다: 국뽕 시대를 넘어서에서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철학자 탁석산은 우리 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 뿌리 논쟁을 그치고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무기로서의 문화를 적극 수입 발굴해야 한다는 것. 그는 시대를 초월해 고정불변하게 이어져 온 [한국적인 것]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미의식 등은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어 왔거나, 시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오히려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강박이 우리 문화를 정체시키고, 썩게 만든다는 주장으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진정한 한국문화는 뿌리보다 수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없다시리즈가 유행했었다. ‘예수는 없다,’ ‘붓다는 없다를 비롯해서 한국은 없다,’ ‘한국사는 없다가 있었는가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깨달음은 없다라는 책까지 나왔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역설적으로 예수는 없다가 되었다. 이쯤에서 스님이 절이 죽어야 부처가 산다는 책을 쓸 법도 했었다.

 

현재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 온 인류가 백인종이다 흑인종이다 황인종이다 하는 인종 간의 차별은 물론 인류의 인종주의 Human Racism를 어서 졸업하고 우주만물이 다 하나 같이 코스미안임을 크게 각성覺醒할 대오일번大悟一番의 기회가 왔어라.

 

하버드대 펠레그리노 석좌교수이며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20여 권의 과학 명저를 저술해 미국 국가과학메달과 국제생물학상을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 Edward O. Wilson (1929 - )의 저서들은 한마디로 생태계 없이는 인간도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인도의 과학, 기술, 생태계연구재단의 대표로서 개발과 세계화란 명목으로 자연을 약탈하고 있는 서구 문명을 비판해 제3세계의 노벨상인 올바른 삶을 기리는 상 Right Livelihood Award’ 수상자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1952 - )의 저서들은 자연=여성, 과학=남성으로 해석, 이성理性과 합리성合理性 맹신盲信이 생태 재난의 주범이라며 직관과 포용의 여성성 회복을 주장한다. 과학은 어머니인 대지를 죽였으며 과학(남성)이 죽어야 자연(여성)이 산다는 것이다. ‘자연 없이 인류문명도 없다는 결론이다.

 

이른바 사랑의 복음福音을 전파한다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교리를 초월해서 사랑으로 대동단결大同團結하기는커녕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파쟁만 일삼아 왔으니 이교도와 이방인 정벌에 나선 십자군이 또한 분열하여 혼란을 일으킨 나머지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차별주의, 곧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인종 차별주의 racism이며,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다. 잡아먹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노예제도만큼이나 나쁜 짓이다.’

 

이것은 22년 전(1999) 프린스턴대학에서 생물 윤리학 강좌를 맡도록 선임되어 물의를 빚었던 피터 싱어 Peter Singer (1946 - ) 교수가 동물 해방 Animal Liberation (1975)’이란 그의 저서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이제 서력기원 21세기를 맞은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자연환경은 물론 정치 사회 경제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동트기 직전이 가장 깜깜절벽이 아니던가. 결코 비관하고 절망만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으나 근년에 와서 소위 선진문명사회의 동향이 180도로 급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사람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려 우리 동양 고유의 오래된 노장철학과 원효의 화쟁사상 그리고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 등에서 인류의 구원과 진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사회는 월등한 물질문명의 힘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지구생태계를 파괴, 인류의 자멸自滅을 재촉해 왔다. 이제 더 이상 기존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즉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 착취대상으로서의 대인관 對人觀, 아전인수식我田引水式의 선악관善惡觀이나 흑백이론黑白理論의 이분법二分法으로는 그 해답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의학, 문학, 예술 각 분야에서 서양의 선각자와 석학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마치 종전의 주기도문 외우듯 물아일체物我一體, 피아일체彼我一體를 읊조리 는 것을 종종 듣고 보노라면 우리는 절로 회심의 미소 완이일소 莞爾一笑 하게 된다.

 

 

얼마 전 서양의 세계적인 과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생을 두고 과학과 천문학에 전념해온 결과로 얻게 된 결론이 동물, 식물, 광물 가릴 것 없이 생명은 하나unity of life’라는 것과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별의 원소와 인간의 원소가 같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만고의 진리를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여름밤 시골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 들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듯이 우리가 죽으면 별이 되는 것이리라.

 

이미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는 더이상 로봇이나 노예처럼 재미없고 흥미롭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흥미진진興味津津하고 신나게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어떤 삶이 창조적인 삶일까. 말할 것도 없이 각자가 각자의 가슴 뛰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각자의 그리움을 그리고 쓰는 그림과 글, 각자의 혼불을 지피는 노래와 춤을 미치도록 죽도록 부르고 추어보는 일이리라. 이는 다름 아니고 우리 각자는 각자의 선구자先驅者가 되는 것이리.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1883-1931)의 우화시집寓話詩集 <선구자 The Forerunner: His Parables and Poems, 1920> 1선구자The Forerunner’ 같이 말이어라.

 

 

선구자先驅者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선구자이고, 그대가 지어 쌓아 올린 탑은 그대의 큰 자아自我 대아大我의 초석礁石일 뿐. 그리고 그 주춧돌조차 또 다른 하나의 토대 기초가 되리.

 

나 또한 나 자신의 선구자리오. 해 떠오르는 아침에 내 앞에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는 한낮에는 내 발밑에 밟힐 테니까.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웠다가 또 한낮이 되면 내 발아래로 거두어지리.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의 선구자였고 언제까지라도 그러하리. 우리가 거두었고 앞으로 또 거둘 것들은 다 아직 일구어 갈지 않은 논밭에 씨앗들이리오. 우리가 논밭이고, 농부이며, 농작물을 거두는 수확인收穫人인 동시에 수확물收穫物이리오.

 

그대가 안개 속에서 방랑放浪 유랑流浪하는 욕망欲望 욕심欲心 욕정欲情이었을 때 나 또한 그러했다오. 그러면서 우린 서로를 찾아 헤매다 우리의 열망熱望에서 꿈들이 태어났다오. 그리고 이 꿈들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무한한 것들이리오.

 

그리고 그대가 삶의 떨리는 입술에 떠오른 소리 없는 말이었을 때 나 또한 그 입술에 말 없는 소리였다오. 그러자 삶이 우리를 내 뿜자 우리가 억겁의 세월을 타고 내려와 어제의 기억들과 내일의 그리움으로 우리 가슴 뛰기 시작했다오. 어제는 정복된 죽음이고 내일은 추구追求 고대苦待한 탄생誕生이니까.

 

그리고 이제 우린 하늘 우주의 손에 있다오. 그대는 그의 오른손에 있는 해로, 나는 그의 왼손에 있는 땅으로. 그렇지만 그대가 나에게 햇빛을 비춰준다고 해서 그대의 햇빛을 받아 쬐는 나보다 그대가 낫거나 나 이상은 아니리오.

 

그리고, 해와 땅,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해와 땅의 씨앗일 뿐. 언제 까지나 우리는 시작일 뿐이리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선구자로 내 뜰 문 앞으로 지나치는 낯선 나그네이리. 그리고 비록 나무들 그늘에 앉아 내가 움직이지 않아 보여도 나 또한 나 자신의 선구자리오.

 

THE FORERUNNER

 

You are your own forerunner, and the towers you have builded are but the foundation of your giant-self. And that self too shall be a foundation.

 

And I too am my own forerunner, for the long shadow stretching before me at sunrise shall gather under my feet at the noon hour. Yet another sunrise shall lay another shadow before me, and that also shall be gathered at another noon.

 

Always have we been our own forerunners, and always shall we be. And all that we have gathered and shall gather shall be but seeds for fields yet unploughed. We are the fields and the ploughmen, the gatherers and the gathered.

 

When you were a wandering desire in the mist, I too was there a wandering desire. Then we sought one another, and out of our eagerness dreams were born. And dreams were time limitless, and dreams were space without measure.

 

And when you were a silent word upon life’s quivering lips, I too was there, another silent word. Then life uttered us and we came down the years throbbing with memories of yesterday and with longing for tomorrow, for yesterday was death conquered and tomorrow was birth pursued.

 

And now we are in God’s hands. You are a sun in His right hand and I am earth in His left hand. Yet you are not more, shining, than I, shone upon.

 

And we, sun and earth, are but the beginning of a greater sun and a greater earth. And always shall we be the beginning.

 

You are your own forerunner, you the stranger passing by the gate of my garden.

 

And I too am my own forerunner, though I sit in the shadows of my trees and seem motionless.

 

이렇게. 너도나도 우리 모두 각자 대로 자신의 선구자 코스미안이 되리.

 

202042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옮겨보리라.

 

 

이자성어(二字成語) 감사의 축사

 

감사(感謝)는 사유(思惟)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경지(境地) 이고,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驚異)로움으로 배가(倍加)된 행복(幸福)이다. Thanks are the highest form of thought, and gratitude is happiness doubled by wonder.”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 G. K. 체스터튼(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의 말이다. ‘감사는 사유의 지고지순한 경지란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배가 된 행복이란 말은 내 성에 너무 차지 않는다. 나 같으면 행복감이 경이로움으로 ()’가 아니라 억만배(億萬倍)’ 된다 해도 부족하다고 말하리라.

 

2020415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삶과 문화] 칼럼 베토벤, 지구의 회복을 북돋는 인간의 음악필자 조은아 피아니스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렇게 우리를 일깨워준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던 지구에게 다람쥐가 묻습니다. 지구는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몸을 일으킵니다. 바다 거북이와 북극곰도 침상 곁에 모여 지구를 극진히 간호합니다. 병실 밖 하늘은 먼 산이 창문 안으로 성큼 들어올 만큼 맑디맑습니다. 위태로웠던 지구의 건강을 이만큼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구가 맞고 있던 링거, 코로나 덕택이었습니다. 삶의 근거지 빙하의 파괴에 몸부림치던 북극곰, 해변을 빡빡이 점령한 휴양객들로 산란의 공간마저 빼앗겼던 바다 거북이가 누구보다 지구의 회복을 기뻐합니다.

 

코로나 위기에 다시 숨쉬기 시작한 자연, 며칠 전 접했던 한 신문의 만평은 이렇듯 뼈아픈 역설을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어서 죄책감을 느꼈고 인간으로 소외되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돌연 이 장면에 음악을 입히고 싶어집니다. 지구의 회복을 기원하는 음악, 자연의 목소리를 번역해 증폭시켜 주는 음악 말입니다. 다행히 한 얼굴이 금세 떠오릅니다. 자연의 영혼에 혼신을 다해 귀 기울였던 음악가,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이했지만 어쩌면 스스로 성대한 생일잔치를 마다한 채 지구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음악가, 그의 이름은 베토벤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애송시로도 잘 알려진 조선 후기 문인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문집 야설(野雪)’에 수록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와 대비시켜 미국 굴지의 사업체 아마존(Amazon)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 1964 - )아마존 식(The Amazon Way)’으로 불리는 생활신조와 지침을 우리 다 함께 생각해 보리라.

 

조만간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물론 실물보다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절감했다. 소매상과 쇼핑몰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아마존은 크게 번창했다.

 

아마존 식이란 다른 사람이 이미 걸은 길이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독창적으로 개척한다는 것이다. ‘난 별난 사람(I’m peculiar)’이라는 자긍심이요 자부심이다. 이는 실제로 실용적인 필요를 충당할 때 느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이고 마술적인 성취감(We’re solving a really practical need in this way that feels really futuristic and magical)’이란 뜻이다.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할 때 이는 참으로 도전적인 모험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When you’re shooting for the moon, the nature of the work is really challenging. For some people it doesn’t work.)’는 말이다.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아마존 직원들에게 범용(凡庸)하고 열등(劣等)한 용렬(庸劣)함을 기피하라는 근무작업 수칙(守則)을 세웠다. (Founder Jeff Bezos established guidelines as instructions for employees, and to stave off mediocrity.)

 

 

따라서 많은 직원들이 마음을 크게 먹고 아직 그들이 가능성의 표면조차 건드리지 못한 상태임을 절실히 느끼는 일이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우리말로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영어로는 모험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Nothing ventured, nothing gained)’가 되리라. 참으로 인생은 모험이고, 사랑은 모험 중의 모험이어라.

 

그러니 코로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우리 모두가 깊이깊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개개인마다 각자의 시원(始原)부터 생각해 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 그것도 엄마 혼자 산고를 치른 날을 축하하지만, 그 이전 엄마 아빠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즐거워하다가, 다시 말해, 생명의 음악(音樂/淫樂) 을 통해, 엄마 몸속에 잉태된 임신일(Conception Day)’을 축하할 일 아닌가.

 

우리 모두 각자가 하나같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정자 중에서 선택받은 황태자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서 탄생한 새 별들이 아닌가. 그 이후로 우리가 숨 쉬고 살아온 순간순간이 더할 수 없이 기적 같은 축복의 연속이 아니었나.

 

또 그러니 우리 각자가 언제나 감사할 일이, 경이로움을 느낄 일이 어디 한둘인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하늘의 별보다 많지 않은가. 우리가 삶을 살면서 흔히 느끼는 실망 또는 절망이란 것이 우리 기대에 못 미쳤거나 미칠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고 이런 실망감 또는 절망감으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실망감이나 절망감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야말로 묘책 중의 묘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기대치(期待値)를 낮춤으로써, 더 바람직하기는 더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맨 밑바닥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항상 기대보다 웃도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어떻든 매사가 놀랍고 감사할 일뿐 아니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라지만 우리 모두 삶이라는 산을 한 발짝 한 발짝씩 오르는 흥분과 자극, 스릴과 쾌감, 그리고 가슴 뿌듯한 성취감까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빛이 나면 나는 대로, 별빛이 반짝이면 반짝이는 대로, 산천초목과 더불어 춤추고 기뻐할 일 아닌가. 천둥과 번개마저도 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황홀지경이 아니겠는가. 무엇이고 없을 무()보다는 있다는 존재(存在) 자체가 기적 이상이 아닌가 말이어라.

 

어디 그뿐이랴.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공사상(空思想)은 불교를 일관하는 교의 또는 사상을 말하는데, ‘()’은 산스크리트어 순야타(Sunyata)’ 비어있음을 번역한 것으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 서로 의존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 곧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고,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며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중생의 미견(迷見)으로 보면 미망(迷忘)의 주체인 번뇌와 각오(覺悟)의 주체인 보데가 딴판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두 가지가 하나이고 차별이 없으며 열반에도 열반의 모양이 없어서 온전히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환경과 삶칼럼 내 마음의 명왕성이란 글에서 수필가 환경 엔지니어 김희봉 씨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

 

태양계의 끝, 햇빛은 스러지고 별들만 숨 쉬는 곳, 불 꺼진 변방의 간이역처럼 홀로 떠있는 우주의 섬, 그 외로운 명왕성에서 기척이 왔다. 지난주 미국의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가 근 10년을 날아 근접한 명왕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2006 년 태양을 등지고 날아간 무인선이 보내온 첫 영상엔 놀랍게도 커다란 하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달 표면의 계수나무처럼 명왕성엔 하트가 선명했다. 명왕성이 보낸 연서(戀書)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우주의 별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원자의 수가 증감해도 총량 에너지양은 변하지 않는다. 또 있다. 빛의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常數), 전자의 전하 등도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은 작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변하나 큰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섭리도 그럴 것이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 탐험선의 운행에 운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섭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옳거니,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으랴! 우주처럼 시작도 끝도 한도 모를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숨 쉬다 사랑으로 돌아갈 삶에서 이 사랑이란 경이로움의 극치에 우리는 무궁무진 감사할 일뿐이어라.

 

이 사랑의 불꽃을 고두현 시인은 만리포 가다가발견한다.

 

 

만리포 사랑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이 사랑의 불꽃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라고 한다.

 

사는 게 진절머리난다면 천리포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에 멈춰 서서 홍시 속살 같은 타는 노을을 보라! 저 노을이 만물에게 바알갛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라. 자연은 젖을 물려 만물을 길러낸다.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엔 서쪽으로 지는데, 이 해의 은총 속에서 식물들은 꽃을 피우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아기들을 낳고 산다. 괴테는 태양 속에 존재하는 신()의 빛과 생산 능력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있고, 도라지밭에서는 도라지꽃이 피고 감자밭에서는 감자알들이 커간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2015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 두 권이 오늘의 우리 시대상을 잘 관찰하고 진단한다. 그 하나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 놀라운 기계들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을 아는 우등생 인간들(Humans Are Underrated: What High Achievers Know That Brilliant Machines Never Will)’로 저자 조프리 콜빈(Geoffrey Colvin, 1953 - )은 현재 컴퓨터가 인간이 해오던 일들을 인간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훨씬 더 능률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인간을 도태시키고 있지만 절망할 일이 아니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성 아닌 감성으로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란다. 기술적인 면은 기계에 맡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치중하면 된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자신과 영혼: 이상옹호론(Self and Soul: A Defense of Ideals)’인데 저자 마크 애드믄슨(Mark Edmundson, 1952) 은 이렇게 관찰하고 진단한다.

 

서구 문화는 점진적으로 더욱 실용적이고 물질적이며 회의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같은) 성인 성자들은 의미 있는 자비심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재화를 획득하고 부()를 축적하노라면 인간의 참된 도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스러운 삶이란 욕망 이상의 인류를 위한 희망이다. 이것이 일찍부터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이다. (Culture in the West has become progressively more practical, materially oriented, and skeptical,(like Buddha or Jesus) The saint seeks a life full of meaningful compassion. The acquisition of goods, the piling up of wealth, only serves to draw force from his proper pursuit. The saint lives or tries to live beyond desire. Even early on, as they enter the first phase of their lives as thinkers, they’ll have one of the greatest satisfactions a human being can have.)”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내가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사랑이란 말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어의 사자성어(四字成語) ‘love’는 우리말의 이자성어(二字成語) ‘사람사랑이라는 동음동의어(同音同意語)가 돼야 하리라.

 

그러니 코스미안의 상수常數/常修는 사랑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8.18 10:57 수정 2021.08.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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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