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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8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칼럼 [단상] '지구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필자 정은실 수필가는
“인류는 한 몸/ 한 뿌리에서 나온 영혼/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지”(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사디의 ‘아담의 후예’)
이 시구를 인용, "지구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 뿌리를 함께하는 한 영혼으로서 사디의 외침이 오늘따라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고 이렇게 적고 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마치 열병 앓는 환자처럼 세계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환자들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우리 몸에서 새끼손가락이 다쳐도 몸 전체가 편치 않듯, 지구의 한 귀퉁이가 아프면 지구 전체가 아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소식을 듣는다. TV나 신문 등 미디어에서 비쳐준 카불 국제공항의 모습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이요 아수라장이다. 가만있어도 아플 만큼 아픈데 복병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소식으로 사람들은 또 한번 상처를 받는다.
9.11 이후 미국의 공습으로 정권을 상실했던 탈레반이 20년 만에 재집권하게 된 아프간은 나라 전체가 비통에 빠져있고 세계의 눈은 모두 아프간으로 향해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도움이 안 되면 잡았던 손조차 놓아버리는 미국식 우선주위에 세계는 분노하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글로벌 빌리지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는 한 마을이 되었다. 국경을 넘어 백신을 맞으러 오는 외국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백신을 투여해주었고 또한 먼저 가진 나라는 백신이 필요한 나라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공급해주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환경오염으로 인해 결국 인간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듯, 인간이 만든 종교로 인해 자신들을 싸움 속으로 가두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그러하고, 극단주의자인 탈레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때 상기되는 사디의 시 ‘아담의 후예’는 결코 낯설지 않다. 사디는 페르시아 3대 시인의 한 사람이며 ‘아담의 후예’는 이란 국민들의 애송시로 현재 뉴욕 유엔본부 로비에 쓰여 있다. 아담의 후예로서, 지구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 뿌리를 함께하는 한 영혼으로서 사디의 외침이 오늘따라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정은실 / 수필가>
"상상해보라. 모든 사람이 네 머리 속에 산다고,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inside your head," 최근 (2021년 8월 17일) 미국에서 출간된 신간서적 '밤의 신탁神託: 꿈에 관한 과학사The Oracle of Night: The History and Science of Dreams'에 그 저자 시다르타 리베이로 Sidarta Ribeiro는 적고 있다. "(네 꿈 속에 등장하는) 인물/사물들과 (네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플롯 일 줄거리 동물군. (네 머리 속) 동물원 말이다. The fauna of characters and plots. The zoo of the mind."
신경뇌과학자neuroscientist인 저자는 역사적으로 꿈에 관한 신화와 전설 등 종교, 철학, 문학, 과학 및 일반인들의 일상의 통속적인 사례와 해석을 광범위하게 고찰한 후 우리가 밤에 자면서 겪는 우리 두뇌활동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채 제목으로 사용된 이 '신탁 오라클oracle'이란 단어는 신이 사람을 매개로 하여 그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일을 일컫는다.
우리가 밤에 자면서 꾸게 되는 꿈이 우리 두뇌의 단순한 신체적인 기능작용인지 아니면 그 어떤 신적神的 또는 영적靈的 의미가 있는 심령心靈 계통의 정신상태로 그 어디까지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신비神祕스러운 현상인지는 그 누구도 확실이 알 수 없는 일이리라.
자, 이제 2020년 5월 12일자와 9월 13일자 그리고 2021년 7월 21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칼럼 '꿈타령' 3곡 재창再唱으로 다시 한 번 뽑아볼거나.
[이태상의 항간세설] '씨구씨구로다'
2020년 5월 4일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아침을 열며’ 칼럼 ‘다가올 10년 촉각 인터넷 시대를 준비하자’의 필자 전승화 데이타 분석가는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한국이 세계 최초로 5G (5세대 이동통신) 상용화를 이룬 지 1년이 지났다. 대외적으로는 ICT 강국의 명성에 걸맞은 기술 선점에 성공했지만 아직까지는 5G망이 구축되는 과정이어서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품질 향상이나 전용 서비스 개발은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5는 사람의 오감 중에서도 자극에 가장 예민하다는 촉각의 반응 시간인 1ms (1,000분의 1초) 수준의 초저지연 서비스를 가능케 하는 ‘촉각 인터넷’ 시대를 의미한다. 사람과 디지털 기기 간의 반응속도가 촉각 수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디지털 신체를 얻게 된 것처럼 직접 손으로 만지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활동들을 원격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지능형 로봇이나 자율주행차와 같은 디지털 사물들은 인공지능에 이어 인공 신경마저 갖게 될 것처럼 주변 환경에 빠르게 반응하며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번 한국형 디지털 뉴딜만큼은 다가올 10년의 촉각 인터넷 시대를 바라보고 5G 기반의 융합서비스 활성화를 위한 과감한 투자와 규제 혁파를 이뤄내야 할 것이다”
이는 쉬운 말로 해서 ‘아무도 따로 떨어진 섬 아니리’란 뜻이 아닐까.
킴벌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 1953 - )의 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If I Knew Then What I Know Now)'이 있지만 이런 때늦은 넋두리가 무슨 소용 있으랴. 단 한 번밖에 없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순간을 놓쳐버리고 '만일에 어쨌더라면'이란 잠꼬대 같은 소리로 단 한숨이라도 낭비하고 허비하지 말 일이어라.
영어로 표현하자면 'not to waste your breath'가 되리라. 그 한 예로 영어에 이런 비속한 속담이 있다. '아줌마에게 불알이 있었다면 아저씨가 됐을 텐데. If auntie had the balls, she would have been uncle.' 우리말로는 '죽은 자식 자지 만진다'고 하던가.
"당신은 나의 옛 모습이고 또 나의 모습이 되리라." 어느 무덤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이다.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어떤 '선물'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자문해 본다. 선물이란 남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나 자신에게 주는 게 아닐까. 뿌리는 대로 거둔다고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리라. 사랑을 주면 사랑이 돌아오고, 선물은 씨앗처럼 가슴속에 떨어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리라. 내가 죽어 땅에 묻혀 흙이 되거나 불에 타 하늘로 올라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영원한 고향인 우주의 본향 본질 코스모스 자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라도 말이어라.
아, 그래서 영국의 시인 존 단(John Donne 1572-1631)도 사람은 아무도 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라고, 우리 모두 한 덩어리, 한 몸과 한마음이라고, 서로 서로의 분신이자 분심이라고, 네 삶과 네 죽음이 내 삶과 내 죽음이라고 이렇게 읊었으리.
'No Man is an Island'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any manner of thy friends or of thine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Olde English Version
No man is an Iland, intire of itselfe;
every man is a pe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e;
if a Clod be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e, as well as if a Promontorie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e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사람이 삶을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이 삶을 살았다는 게 무슨 뜻이 있는지
무엇을 또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주는 네 밖에 있지 않다 네 안을 보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미 바로 너이니"
ㅡ 루미(1207-1273)
"The universe is not outside of you. Look inside yourself;
everything that you want, you already are."
ㅡ Rumi(1207-1273)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로 올해 112주년을 맞아 타임지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업적을 크게 세운 대표적인 여성 100명을 '타임지 올해의 여성들'로 선정해 특집을 발행, 이들을 기렸다.
몇 년 전 이 '여성의 날'을 전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에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이 한동안 화제에 올랐었다.
'남자'와 '설명하다'를 결합한 것으로 2014년 호주에서 '올해의 단어'로 뽑혔었고 2010년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그해의 단어 목록에도 올랐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실린 정의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 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식으로 풀어보자면 '여자인 네가 알면 얼마나 알아. 오빠가 설명해 주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최근에 중국에선 '지난 아이(直南癌)'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단다. 이 '지난 아이'를 직역하면 '암 덩어리 같은 남성 이성애자'가 된다. 중국의 온라인에 만연한 여성 차별에 대한 반감에서 고리타분한 남성우월주의를 비꼬는 신조어가 생긴 것이다.
'지난 아이'란 시대착오적이고 편협한 남성중심 사고를 보이는 사람들을 통칭하는데, 중국 포털사이트 소후에는 '지난 아이'의 특징으로 가부장적 광신적 애국주의, 항상 가득 차 있는 불만, 동성애 혐오증, 우쭐대는 성질 등이 열거돼 있다.
'지난 아이'는 2015년에 처음 등장해 계속 확산하고 있는데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 저우궈핑(周國平)이 "남성은 천 개의 야망을, 여성은 하나의 야망을 가져야 한다"느니 "여성은 가사노동과 육아를 할 때 아름답다"는 등 성차별 발언을 한 뒤 '지난 아이'란 비판과 조롱을 받아 왔다고 한다.
2015년 여성의 날에는 중국 대표 검색포털 바이두가 기념 로고 디자인으로 여성을 주체적 존재가 아닌 그저 예쁜 장난감 핑크색 옷을 입고 오르골 상자 속에 들어있는 공주 인형으로 표현했다가 '지난 아이'란 비난이 쏟아졌다고 한다.
한편 '지난 아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 여성 네티즌들은 양성평등을 지향하는데 여성 작가 에쒸에마오마오(葉雪猫猫)는 중국 여성들에게 "애인이 '지난 아이'인지 잘 살펴보고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헤어지라. 그래야 그런 남성들은 유전자 풀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보도다.
자, 그렇다면 이제 때는 바야흐로 '지난 아이'의 씨를 어서 완전히 제거해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남성인류(mankind)를 사랑과 평화를 가져오는 여성인류(womankind)로 개조할 때가 왔어라. 그래서 우리 모두 남녀 불문하고 '여성인류' 만세를 불러보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게임을 즐기는 거였어요. 그랬더니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게 됐어요. (All I could do was just to enjoy the game. That’s what has brought me to the U.S. Open win.)”
지난 2015년 7월 13일 미국여자골프(LPGA) 메이저 대회인 US 오픈에서 우승한 전인지(당시 20세)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한국 골퍼, 특히 낭자들이 유독 골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로 젓가락, 바느질, 활쏘기 문화 등에 주목하는 전문가들이 있다고 한다.
8.15해방 전후 내가 어렸을 때 종이를 접어 만든 딱지치기, 옛날 엽전을 종이로 싸서 두 끝을 구멍으로 내보내어 갈래갈래 찢어서 이를 많이 차기를 내기하는 장난감 제기차기, 구슬치기, 아니면 나뭇가지 꺾어 손에 알맞게 다듬은 나무때기로 짤막한 나무때기를 쳐서 그 거리를 재서 승부를 가리는 아이들 놀이 자치기가 애들 장난감의 거의 전부였었다.
여자아이들은 공깃돌을 갖고 놀거나 줄넘기하고. 이런 놀이에 온 정신을 팔다 보면 우리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놀이의 신동 달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그 후로도 살아온 세상살이,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모든 것을 소꿉놀이 하듯 할 때 말이어라.
최근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앤쓰로포신 에폭(Anthropocene epoch),’ 인간(anthro)으로 시작된 신기원이란 뜻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착각에서 일으킨 문명이란 것이 지구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지구와 인류의 종말이 올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가 담긴 말이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 미국의 신화학자 조세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의 말을 새겨보리라.
“세상 사람들 반은 자신들이 따르는 종교적인 전통의 메타포를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반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 결과 메타포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적인 메타포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보건대 소위 무신론자들이란 신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중심 그것도 백인남성 위주의 그런 편파적인 ‘신’을 부정할 뿐이다. 미국의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1924-1987)이 말했듯이 “신이란 개념이 어떤 타당성이나 용도가 있다면 우리를 좀 더 크게,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리라. 그럴 수 없다면 그런 신은 집어치워야 한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인간이 자연에 군림하는 게 아니고 그 일부에 불과함을 주지해오지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자업자득이라고 만인과 만물을 대하는 내 언행이 곡 나 자신에게 하는 짓임을 익히 알아 오지 않았나. 물론 동양도 이미 많이 서구화되었지만 서양의 근시안적인 물질문명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현실은 심히 유감스럽고 통탄할 일이어라.
반면에 서양에서는 내세를 담보로 독선 독단적인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현세에서 성직자들과 '선민'들이 그들의 세속적인 특권을 행사해왔다. 십자군이다, 식민지다, 노예제도다, 산업혁명이다, 경제개발이다, 해가면서 말이다. 어떻든 이 아름다운 지구를 더이상 더럽히고 파손하지 말고, 잘 보존해서 우리의 후손들이 놀이를 즐길 수 있는 낙원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말이나 영어로도 혼동되는 단어가 있다. 다름 아닌 오른쪽 또는 바른쪽이라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오른’과 ‘옳은’이, ‘오른’과 ‘바른’이, ‘틀린’과 ‘그른’의 반의어(反意語)로 혼동된다. 서양인 특히 영국인 및 미국인과 대화를 하다가 대화 상대가 내 동의를 구하느라고 “내 말이 맞지 않아?”란 뜻으로 “Right?” 하면 “그래, 네 말이 맞아”라고 “Right (Yes, you are right about that.)”이라고 맞장구쳐주는 대신 나는 ‘왼쪽(left side)’이란 뜻으로 “Left!”라고 딴청을 부리면서 한마디 더 한다. 나는 ‘옳고’ ‘그름’을, ‘맞고’ ‘틀림’을 믿지 않노라고. 왜냐하면 네 왼쪽은 내가 볼 때는 내 바른쪽이고, 내 바른쪽은 네가 볼 때는 너의 왼쪽이 될 테니까. 그리고 옳고 그름이 없고, 맞고 틀림이 없으며, 다만 겉으로 볼 때 다름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대화가 좀 더 이어지면 나는 또 한 마디 덧붙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거론할 것도 없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우리가 땅을 밟고 사는 지구라는 별이 공처럼 둥글고 회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동-서-남-북이 어디며 좌-우-상-하가 있겠는가.
부화뇌동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소신과 줏대를 갖도록 촉구하는 말인데, 붙다는 부(附), 화합 하다는 화(和), 우레 (천둥) 뇌(雷), 같다는 동(同)의 네 글자를 합성해, 붙어서 화합하는데 천둥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천둥이 ‘우르르릉쾅쾅쾅’하면 천지만물이 움직이듯이 그렇게 움직인다고, 소신 없는 사람들을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내가 본 다음과 같은 기사 하나가 이와 같은 내 소신과 지론을 떠받쳐 줄 법도 하여라.
2015년 3월 10일자 ‘미러(The Mirror)’지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州) 북부의 유명한 포도주 생산 지역 소노마 밸리(Sonoma Valley) 중심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 소노마에 사는 멜린다와 대니는 2010년 결혼한 사이다. 한 사람이 남자이고 다른 한 사람이 여자라고 생각되겠지만 두 사람 모두 여자이다. 그리고 이들은 남편 조나단을 공유하고 있다.
이야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음악 축제에서 만난 멜린다와 대니는 서로 첫눈에 반해 함께 살기로 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가 동성 결혼을 금지함에도 각기 부모를 설득해 양가 상견례까지 하고, 2010년 6월 26일, 친지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서로 사랑해 결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멜린다는 남편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대니에게 자기 생각을 털어놨고, 멜린다의 이야기를 들은 대니는 잠시 망설였으나 멜린다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남편을 갖고 싶다는 멜린다와 대니의 꿈은 두 여인이 결혼식을 올린 지 2년이 되던 해인 2012년 이뤄졌다.
이들은 건설회사 오너인 조나단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에게 남편이 되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조나단은 “두 사람이 결혼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어느 날 멜린다와 대니가 내게 보낸 편지를 읽고는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며 좀 주저하다가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 사람이 일주일에 걸쳐 함께 떠났던 여행은 이들이 남은 인생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조나단은 자신의 부모를 설득해 멜린다와 대니 두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멜린다와 대니는 조나단의 아기를 임신해 멜린다는 2014년 9월 아들 올리버를 낳았다. 대니도 한 달 후 딸 엘라린을 출산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살던 집은 이제 다섯 식구가 되었다.
주변에선 멜린다와 대니의 자녀가 혹시라도 놀림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지만, 정작 본인들을 상관하지 않는다. 멜린다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나중에 자녀들이 놀림감이 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묻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충분히 컸을 때, 사실대로 말해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우리 가족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두 엄마와 한 아빠는 아이들이 사랑 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라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고 멜린다는 웃으며 대답한다.
자, 이제 우리 세상만사 매사에 너무 심각하지 않기 위해 욕타령, 아니 복타령 한 곡 뽑아보리라.
옛날부터 중국 고사에 나오는 삼황오제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시발노무색기/씨발놈의 새끼(始發奴無色旗)‘란 한자 풀이 좀 해보리라.
이는 그 복희씨 시대의 이야기다. 복희씨가 중국을 다스리고 있던 어느 날, 태백산의 한 산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전갈을 들었다. 그리하여 복희씨는 그 마을로 향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은 황하의 물이 시작되는 곳이라 하여, 시발(始發) 현(縣)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 마을에 도착한 복희씨는 돌림병을 잠재우기 위해 3일 낮 3일 밤을 기도하였는데, 3일째 되는 밤 기도 도중 홀연히 일진광풍이 불면서 웬 성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태백산의 자연신(自然神)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몇 년째 곡식을 거두고도 자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이를 괘씸히 여겨 벌을 주는 것이다. 집집마다 피를 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하였다.
복희씨는 자연신이 화가 난 것을 위로하기 위해 방책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말하였다. “자연신의 해를 피하기 위해선 집집마다 깃발에 동물의 피를 붉게 묻혀 걸어두어야 하오."
그런데, 그 마을 사람 중에 시발(始發) 현(縣)의 한 관노(官奴)가 말하기를, “귀신은 본디 깨끗함을 싫어하니, 나는 피를 묻히지 않고 걸 것이다.” 하며 붉은 피를 묻히지 않은 깃발을 걸었다.
그날 밤 복희씨는 기도를 하는데, 자연신이 나타나 노여워하며 말하길,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정성을 보여 내 물러가려 하였거늘, 한 놈이 날 놀리려 하니 몹시 불경스럽도다. 내 역병을 물리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다음 날부터 전염병이 더욱 돌아, 마을 사람들이 더욱 고통스럽고 많은 이가 죽었으니, 이는 그 마을(시발현)의 한 노비가 색깔 없는 깃발을 걸었기(始發奴 無色旗)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로 인해, 그 이후 혼자 행동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시발노(始發奴) 무색기(無色旗)’ 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툭하면 뱉고 듣는 ‘X할’이란 ‘욕(辱)’이 실은 ‘복(福)’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X도 못할’이라 해야 저주 중에 가장 몹쓸 저주가 되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 하라는 데 이야말로 축복 중에 축복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나도는 수많은 욕(복)에다 내가 어려서부터 ‘악동 (실은 선동) 기질’로 작곡 작사해 즐겨 탄성을 질러온 추임새 한두 마디 보태 보리라.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비인간적 사람들 가운데
아가씨답지 못하고
심보가 고약하거나
한번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백 년 동안 재수 없도록
방정떠는 여자 보고는
‘벼락이라도 쫓아가서 맞아 죽을 년’
사내답지 못하게 줏대 없이
매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엉거주춤 싸는 둥 마는 둥
끼도 빼도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갈팡질팡 이 눈치 저 눈치나 살피면서
밥도 죽도 쑤지 못하는 남자보고는
‘똥물에 튀겨 죽이려 해도 똥물이 아까워
그럴 똥가루 가치도 없는
똥구더기만도 못한 놈’
사람이면서
사람 이상이라도 된 듯
거룩하고 고상하게
점잔부리고 얌전빼며
사람 같지 않게
육갑 떠는 꼴 보고는
‘내 똥구멍이 웃는다.’
예부터 우리말에 웃고 지내면 안 늙고, 성내고 지내면 빨리 늙는다는 뜻으로 일소일소(一笑一少), 일노일로(一怒一老)라 하지 않았나. 속이 좀 언짢아도 한바탕 웃어 젖히면 구겼던 마음도 펴지지 않던가. 짧다면 눈 깜짝할 사이처럼 짧은 인생, 잠시 마주쳤다 헤어질 사람들끼리 얼굴 찡그리지 말고 웃으면서 살아보세. 너도나도 하하, 허허, 호호, 히히, 웃음꽃을 피워보세. 좋다. 얼씨구, 절씨구, 얼절씨구, 씨구 씨구로다.
[이태상의 항간세설] '푸른 꿈이여, 영원하리'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 가지의 world"
최근(2020년 6월 7일) '디어 클래스 오브 2020(Dear Class of 2020, headlined by Barack and Michelle Obama)'의 대미를 장식한 BTS의 노래 '소우주(Mikrokomos)' 가사 한 토막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작가가 되는 것이다. The worst thing that can happen to a writer is to become a Writer.”
미국 작가 메리 맥카시(Mary McCarthy 1912-1989)의 말이다. 이 말은 글 쓰는 일이 사랑을 하고 삶을 사는, 삶을 사랑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일 게다. 다시 말해 글과 삶이 같아야 한다는 뜻일게다.
이런 뜻에서 나 또한 작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사랑하며 살아온 삶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지 않게 말이어라.
‘심각한 체 하는 건 아직 떫은 때’란 우리말이 있고, 영어로는 ‘Don’t take yourself too seriously.’라고 한다. 그래서 이 글도 우리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하고 심각하지 말자는 비망록(備忘錄)이다.
이제 광복 75주년이 내일 모래인데 아직까지도 억지 이념과 사상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모든 한을 풀고 우리 모두 가슴 뛰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봄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오르는 코스모스무지개 타고 가볍게 하늘로 피어오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빌 뿐이다.
미국 출생의 영국 시인 티 에스 엘리엇(T.S. Eliot1888-1965)의 시 ‘Four Quartets’의 한 구절 우리 함께 음미해보리라.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탐험의 목적은
우리가 출발한 지점에 도착해서
이곳을 우리가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리.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아울러, 다음과 같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말도 우리 한 번 깊이 곱씹어보리라.
“세상에 내가 무언가를 작곡해 그 곡을 들어보는 것 이상의 더 큰 기쁨과 희열은 없다. 예술을 위해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There is nothing greater than the joy of composing something oneself and then listening to it. My imagination can picture no fairer happiness than to continue living for art.”
독일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의 말이다.
“내가 비록 세계 최고의 명작을 썼다 한들
내가 비록 세계 최고의 교향곡 심포니를 작곡했다 한들
내가 비록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한들
내가 비록 세계 최고의 절묘한 조각을 새겨 만들었다 한들
내가 낳은 내 아기를 내 가슴에 안았을 때처럼
고양된 창조감을 느껴보진 못했으리라.
어떤 인간도 내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내가 자주 느끼는 이 엄청난 사랑과 기쁨의 충만감을 수용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으리. 이와 함께 숭배하는 경모심(敬慕心)도 생겼어라.
If I had written the greatest book
composed the greatest symphony
painted the most beautiful painting
or carved the most exquisite figure
I could not have felt the more exalted creator than I did when they placed my child in my arms.
No human creature could receive or contain so vast a flood of love and joy as I often felt after the birth of my child. With this came
the need to worship and adore.”
미국 언론인 작가로 사회개혁가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의 말이다.
이 말의 핵심(核心)은 어린아이가 우리 모두의 신(神)이란 뜻이리라. 그렇다면 5월 5일만이 아니고 일 년 365일 매일이 우리의 주일(主日)인 ‘어린이날’이어라.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해마다 바뀌고 여러 정책이 늘 제시되지만 정작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다. 우리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들이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지식을 살찌우고 지혜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며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올재’를 설립했다.”
‘올재’의 홍정욱(1970 - ) 대표의 말처럼 이 출판사는 저작권 문제가 없는 동양과 서양의 고전을 최대한 읽기 쉬운 한글 번역본과 누구나 갖고 싶은 멋스러운 디자인으로 출판하여, 대기업에게서 후원을 받아 한 권당 2,000원 내지 3,000원 대의 가격으로 대중에게 판매하고, 전체 발간 도서의 20%를 저소득층과 사회 소수계층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일종의 소셜 비즈니스 회사라고 한다.
1970년과 2012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나의 달콤한 오렌지 나무(My Sweet Orange Tree/Meu Pe’ de Laranja Lima by Jose’ Mauro de Vasconcelos 1920-1984)란 소설이 있다. 1968년 출간되어 브라질 초등학교 강독 교재로 사용됐고, 미국, 유럽 등에서도 널리 번역 소개되었으며, 전 세계 수십 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1978년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로 첫선을 보인 후 50여 곳 이상의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되어 40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2003년 ‘MBC 느낌표’에 선정되었고, 지금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성장 소설의 고전이다.
저자 바스콘셀로스는 1920년 리우데자네이로의 방구시에서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인디언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권투선수, 바나나 농장 인부, 야간 업소 웨이터 등 고된 직업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 모든 고생이 그가 작가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모든 나라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모든 어린이들에게 바치는 ‘헌사(獻詞/獻辭)’라고 할 만한 이 저자의 자전적 소설에서 독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극심한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도 순수한 영혼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여덟 살짜리 소년 제제(Zeze)가 티 없이 짜릿 풋풋한 눈물과 웃음을 선사한다. 장난꾸러기 제제가 동물과 식물 등 세상의 모든 사물과 소통하면서 천사와 하나님이 따로 없음을 실감케 해준다.
바스콘세로스는 이 작품을 단 12일 만에 썼지만 20여 년 동안 구상하면서 철저하게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한 권의 소설을 단 한 줄로 쓰는 것이 시라면, 마찬가지로 한 권의 자서전을 한 편의 단문으로 쓰는 게 에세이나 수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화가나 작가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색안경을 쓰고 쓰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판이해지듯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사람도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보고 읽느냐에 따라 보고 읽는 내용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리라.
그러니 동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꽃 천지요 별세계다. 돌도 나무도, 벌레도 새도, 다 내 친구요 만물이 다 나이며,
모든 것이 하나이고, 어디나 다 놀이터 낙원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요술쟁이 어린이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1590년에 나와 ‘불태워지는 대신 불처럼 번져나갔고, 불타오르듯 읽혔다’는, 중국 당나라 때 진보적 사상가였든 이탁오(李卓吾 1527-1602, 서양에는 Li Zhi로 알려진)는 그의 대표적 저술로 시와 산문 등을 모아 놓은 문집 ‘분서(焚書)’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근본이며 동심은 마음의 근본이다. 동심은 순수한 진실이며 최초의 한 가지 본심이다. 만약 동심을 잃는다면 진심을 잃게 되며, 진심을 잃으면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을 잃는 것이다.”
‘시야 놀자’의 서문에서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심은 시의 마음입니다. 동심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기 때문에 동심을 잃어버리지 않은 어른들이 시를 씁니다. 동심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윤동주의 동시 세 편을 같이 읊어보리라.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반딧불
가자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달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깨어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통신 이론상 신호를 멀리 보내기 위해서는 낮은 주파수만이 아니라 낮은 속도의 전송신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와이파이 같은 통신기기는 사용자와의 거리가 수십 미터 정도이니까 1초에 5억 비트 정도까지 전송할 수 있지만, 5,000만 km가 넘는 화성의 탐사선까지 보내려면 1초에 수백 비트 정도 낮은 속도로 보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낮은 소리의 말은 귀보다는 가슴에 들리고 마음에 전달되는 것 같다. 내가 딸 다섯을 키우면서 애들이 아주 어렸을때부터 항상 애들한테 고작 한 말이 낮은 목소리로 ‘네가 더 잘 알아(You know better)’라고 하면 애들이 정말 더 잘 알아서 하고 했으니까.
내 피는 안 섞였지만, 사랑으로 키운 막내딸의 결혼식 전날 저녁 양가 가족들과 친구들만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조언을 하자 젊은 친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고 환호성을 들었다.
Good Evening.
This is a very good and special evening to us all, as we are here to celebrate the cosmic union, if not reunion, of Ben and Jackie (for Jacqueline), their families and friends.
May it be the start of a wonderful journey together full of fun for the completion of their, or rather, our preordained unity.
My wife, Kay (for Kilja), who is esteemed the perfect matriarch, and I, Tae-Sang, her loyal ㅔattendant, we are extremely happy to have Ben (for Benjamin) as our son-in-love, I repeat, son-in-love, not son-in-law, because we believe in love, not in law. For the whole tribe of Kay’s, life means love, nothing else.
I think there is a close affinity between Jewish and Korean. (Ben is Jewish.)
Now, let me have Ben’s attention for a moment, please.
I want you to look at Jackie’s Mom tonight. Even if you like her today, take a look at her tomorrow. If you still admire and adore her as I do, then, close your eyes. Yes, go ahead and marry her daughter as planned.
Ladies are said to be fickle like the weather. They say men can never understand women. I have a tip for you, Ben. Just stand under. I mean under the umbrella of love. You may get wet and suntanned a little from time to time, but never soaked or sun-burnt. There will be no bad weather, only different kinds of good weather for you Ben as long as you stay under the magic umbrella. You know what! You might even soar high above the clouds occasionally.
Here are the luckiest young man and the most beautiful and lovely girl.
I’d like to propose a toast to the blessed couple.
Cheers!
2015년 12월 4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칼럼 ‘문명의 이기는 어디로부터 오는가’에서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이렇게 진단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파리 테러는 모두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구 문명에 대한 공격적 의미가 크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토대로 수 세기에 걸쳐 유럽은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의 진보한 사회를 건설했다. 넘치는 자유, 다양성의 존중, 민주주의, 높은 수준의 복지, 그런 사회 내부에서 성장한 이민자 자녀들이 사회에 대한 증오를 토대로 극단주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이들의 공격은 서구 문명이 건설해 온 소중한 가치들이 모래성처럼 취약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 해법도 제시한다.
“장벽을 허물고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어 온 것은 서구 문명의 경제적 토대인 자본주의다. 자본은 쉴 틈 없이 경계를 해체하며 새로운 시장과 싼 노동력, 풍부한 자원을 확보하려 한다. 저커버그가 드론을 띄워 아프리카 오지까지 인터넷을 제공하듯 말이다. 장벽을 쌓고 먼 곳에 있는 테러리스트를 겨냥해 보내는 폭격기들의 부수적 피해, 즉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분노는 제거한 테러리스트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생적 테러리스트를 새로 공급한다. 결국 서구 문명이 건설한 가치 자체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것을 장벽 내에서 자기들만 누린 것이 문제였을까. 어느 쪽을 문제로 보느냐에 따라 해답도 달라질 것이다.”
“맥스(Max), 태어난 걸 축하해. 정말 멋진 엄마와 아빠를 뒀구나. 두 분의 결정을 듣고 흥분했어.”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1984 - ) 페이스북 CEO와 아내 프리실라 챈(Priscilla Chan, 1985 - ) 부부가 딸 맥스를 낳은 뒤 페이스북 지분의 99%(당시 시가 약 52조원)를 자선사업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2015년 12월 1일에 멀린다 게이츠(Melinda Gates, 1964 - )가 저커버그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그리고 멀린다는 저커버그 부부에게 이런 말도 했다.
“씨가 뿌려졌고, 이제 자랄 겁니다. 수십 년 동안 열매를 맺겠지요.”
멀린다는 남편인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Bill Gates, 1955 - )와 재단을 만들어 자선활동을 펴고 있다. 2008년까지 360억 달러(당시 약 42조원)를 기부했고 매년 추가로 기부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미네소타주(州) 로즈마운트의 연말 구세군 자선냄비에 한 노부부가 50만 달러의 수표를 내놓았다. 미국 구세군 자선냄비에 이만큼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 노부부는 익명을 요구하며 젊었을 때 식료품점 앞에 버려진 음식으로 연명했었다며 이제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하다고 했다.
저커버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얼마나 앞날이 불안했을까. 게다가 그는 녹색과 빨간색을 구분못하고 파란색이 가장 잘 보인다는 적록색맹이라니 또 얼마나 불편했을까. 하지만 그는 ‘푸른 꿈’을 꾸면서 그 ‘파란색’ 꿈을 이뤄 인류에게 또한 그 ‘푸른’ 꿈을 심어주고 있다.
옛날 가수 송민도(宋旻道, 1925 ~ )가 열창한 노래 ‘푸른 꿈이여 지금 어디’를 우리 같이 불러보리라.
"푸른 꿈이여 지금 어데 사라져 갔느냐 멀리멀리
나의 사랑아 지금 어데 행복한 그 시절
돌아 오렴아 아무도 모르게
푸른 잔디를 가만가만 밟고 오렴아
푸른 꿈이여 지금 어데 사랑아 지금 어데
푸른 꿈이여 지금 어데 무심히 갔느냐 멀리멀리
나의 사랑아 지금 어데 그리운 그 시절
돌아 오렴아 꽃수레 타고서
파랑새들의 즐거운 노래를 들으며
푸른 꿈이여 지금 어데 사랑아 지금 어데"
아, 우리 모두 우주나그네 코스미안의 푸른 꿈이여, 영원하리!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의 꿈서리
최근 (2021년 7월 13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전문가 에세이] '신비 속의 잠과 꿈'에서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는 이렇게 칼럼을 시작한다.
“간밤에 꿈은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오락가락하네요. 여자도 같고, 고양이 같기도 한 것을 물속에서 건져주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감이 안 잡혀요. 내 꿈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불안증세를 가진 한 젊은 환자가 들려주는 꿈 내용이다.
성(Sex)과 더불어 잠과 꿈만큼 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별로 없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과학자, 의학자, 철학자들이 숱한 이론을 내놓았지만 극히 제한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아직도 잠과 꿈은 신비 속에 싸여있다.
그러면서 그는 꿈을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꿈은 왜 꾸는 걸까? 꿈을 과학적으로 처음 분석하기 시작한 사람은 20세기 초 프로이드 선생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망과 갈등이 꿈을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이라 주장했다. 칼 융은 억압된 욕망, 감정뿐 아니라 깨어있을 때 하고 싶었던 일상의 모든 게 꿈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일종의 보상심리 과정이다.
반면 신경뇌과학자들은 꿈이란 단지 뇌간(Brain stem), 해마, 대뇌피질로 이어지는 의식회로와 기억회로 사이에서 생기는 뇌 활동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예전에 형성된 기억들이 의식상태에선 서로 연관이 안 되어 탐색이 어려웠으나 뇌조직의 전기 화학적 영향으로 발생한 꿈을 통해 처리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은 무작위로 일어나고 이해하기 힘든 뇌 활동이지만 낮 동안 경험한 여러 사건이나 상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꿈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있다. 신체적, 정신적 휴식을 위한 것, 몸의 노폐물과 뇌 속에 쓸데없이 남아있는 찌꺼기 기억을 걸러내는 과정,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무한한 창의성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불행한 사태를 미리 암시해주는 점쟁이 역할 등이다.
또렷하고 앞뒤 연결이 잘 되어 줄거리가 있는 내용의 꿈은 무의식이 일을 많이 한 징표다. 윤리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 공격성으로 고통에 처해있는 무의식은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들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의식의 저항이 너무 심해 의식의 입맛에 맞게 재단할 수밖에 없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전환, 승화 같은 방어기제의 형성이다.
앞의 젊은 환자의 꿈은 어설프고, 이상하며 별 의미도 없고 앞뒤가 잘 연결이 안 되어있다. 시쳇말로 개꿈이다. 개꿈은 오히려 환자에게 편안한 꿈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의 문제들이 심하지 않아 잠자는 동안 무의식이 크게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꿈인데요. 불안증세가 좋아지고 있다는 꿈입니다.” 환자에게 웃음을 보이며 꿈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때때로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계시나 예고처럼 우리가 밤에 자다 꿈꾼 대로 같은 일이 생시에 일어날 때 말이다.
가족 형제나 친구 중 그 누가 꿈에 나타나면 그 사람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된 일이 있었고, 딸 셋이 영국 만체스타에 있는 음악기숙학교에 다닐 때 나는 미국 뉴욕에 있었는데 꿈에 애들을 본 다음 날 애들 편지를 받곤 했었다.
또 하나 비근한 예를 들자면 1984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자동차 타이어를 눈이 와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all-season' 타이어로 바꿔 끼운지 며칠 안 돼 그해 처음으로 눈이 많이 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나지 않아 눈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계속 차를 몰았다. 한동안 가다가 차가 몹시 덜컹거리기 시작하길래 나는 길옆에 차를 세우고 보니 오른쪽 뒷바퀴가 공기압이 모자란 채로 굴러온 탓에 타이어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스페어타이어로 바꿔 끼우고 타이어를 산 씨어즈 백화점 자동차 부품 파는 데로 가서 새것으로 교환했다. 그 전날 밤 꿈에 내가 며칠 전 새로 사 신은 구두 오른쪽만 갑자기 다 닳아 해어져서 신발을 산 구둣방에 갖고 가 새것으로 오른쪽만 바꿨었다.
이와 같은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체험해왔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도 신비롭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을 꾼 적도 있다.
1986년 말 나는 굉장히 높은 산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산꼭대기 정상까지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밑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그리고 이 등산 등정登山 登頂 코스 내내 아주 작고 예쁜 허밍버드Humminbird 벌새 한 마리가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미소 짓듯 노래하며 마치 꿀을 먹고 꽃가루를 매개하는 꿀벌처럼 윙윙 내 눈앞에서 제자리걸음 아닌 제자리 비행으로 나를 인도해 주는 꿈이었다.
이 꿈은 지금도 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하다. 공교롭게도 이 꿈은 내가 내 큰 딸 해아海兒가 만 18세가 되는 1986년 11월 27일 쓰기 시작해서 내가 만 50세 되는 1986년 12월 30일 장문의 편지를 끝맺은 날 밤에 꾼 것이었다.
나는 첫 아이로 쌍둥이 딸을 보았었다. 쌍둥이여서인지 체중 미달로 낳자마자 조산아 보육기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태어난 지 하루 만에 한 아이는 숨지고 한 아이만 살아남았다. 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두 딸 애들 이름부터 지어놓았었다. 한 아이는 태양처럼 언제나 빛나고 만물을 육성하며 희망을 주는 아이가 되라고 태양 ‘해’ 자字, 아이 ‘아兒’ 자字 ‘해아,’ 또 한 아이는 바다처럼 무궁무진한 삶의 낭만이 넘치는 아이가 되라고 바다 ‘해海’ 자, 아이 ‘아兒’ 자字 ‘해아海兒’로.
아마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숨진 ‘해아’가 내 꿈에 벌새로 나타났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이 벌새 꿈을 꾼 다음, 내 첫 저서 ‘해아야, 코스모스바다로 가자’를 비롯해 전혀 생각하지도 꿈도 꾸지 않았던 책을 20여 권 내게 되었으리라.
자연 만물 중에 벌새야말로 시詩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 시詩같은 ‘벌새’가 존재하리라.
아, 그래서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도 “삶의 어느 한 분자分子도 그 속에 시詩를 품지 않은 것은 없다. There is not a particle of life which does not bear poetry within it.”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네가 믿는 걸 발견하는 예술이다. The art of writing is the art of discovering what you believe.”
독일의 시성詩聖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82)는 말했다.
“날마다 늘 새롭게 선택하는 자만이 삶과 자유를 누릴 자격 있다. Of freedom and of life he only is deserving who every day must conquer them anew.”
현대 과학에서 최면에 대한 연구조사 끝에 발견한 사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두뇌 컴퓨터에 입력되어 우리가 다 기억할 수 있으나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편집한다는 것이다.
공포심, 반감, 투쟁심, 또는 사태의 압박감, 불안, 초조함 때문에 많은 기억들을 우리 의식에서 지워버린다는 거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과정을 거친 것은 죄다 일종의 픽션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문학이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예부터 덧없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가리켜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했다. 젊어서는 앞날에 대한 무지갯빛 꿈으로 부풀고 나이 들면 주마간산走馬看山이듯 홱홱 지나쳐버린 일들이 정말 꿈결만 같다.
그렇다면 젊어서는 꿈 많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는 추억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가 아닐까. 또 그렇다면 종자씨 까먹기나 참외 서리보다 봄에 씨 많이 뿌려 무르익은 오곡백과 가을걷이가 훨씬 더 푸짐 느긋하게 신나고 보람이 있으리라.
우리가 밤에 자면서 꿈꾸는 동안은 꿈인 줄 미처 모르다가 잠에서 깨어날 때에라야 꿈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삶이 또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꿈꾸는 동안에도 더러 어렴풋이나마 모든 것이 한갓 꿈속의 일인 줄 알게되는 수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 삶이 어떻든 간에 또한 꿈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살아 숨 쉬며 잠 깨어 꿈꾸는 꿈이야말로 우리가 꿈속에서 꿈꾸는 꿈이리라. 또 누구든 자기가 꾸고 싶은 꿈만 꾸고, 꾸기 싫은 꿈은 안 꿀 수 없을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꿈을 꿀 것이며, 꾸는 꿈을 우리가 어떻게 풀이하는가 하는 일일 것이다.
흔히 우리가 꿈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꿈 전문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개미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죽어라 하고, 어떤 괴인이나 괴물로부터 도망치려 해도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몸이 조금도 앞으로 나가주지 않는 꿈은 직장이나 결혼이나 친우 관계 등에 얽매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함정 또는 궁지에 빠져있는 느낌 때문이라고.
높은 절벽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은 자신의 체면 손상이나 사회적인 지위 상실을 걱정하는 까닭이고, 공중을 나는 꿈은 비약적인 성공이나 생활 향상을 희망하거나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 다 떨쳐버리고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초탈해보고 싶은 염원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이따금 벌거벗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면이 드러나 우리의 적나라한 진상이 세상에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시험 문제를 앞에 놓고 그 가운데 가장 쉬운 문제 해답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낑낑거리는 꿈은 일상생활에서 하찮은 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자신 결핍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버스나 기차 혹은 배나 비행기를 놓치는 꿈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거나 갈 길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데서 발생한단다.
이러한 꿈 전문가들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익히 들어오지 않았나.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 어머니나 다른 분들이 태몽을 꾸셨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태몽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시지 않았는가.
좀 더 생각해보면 이 태몽이란 것도 태몽에서 시작해서 태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태생 전 태교胎敎 태 교육으로부터 출발해서 태생 후 탯줄 아닌 탯줄로 이어지는 작명 철학으로 정신적 세뇌작업 또는 심리적 승화작용을 통해 꿈꾸듯 하는 삶의 꿈이 연면히 계속되는 것이리라. 그런즉 우리 모두 서리서리 꿈서리 하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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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영국의 왕 조지 5세. 그에게 왕의 자리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조지 5세는 막중한 책임감과 긴장감에서 오는 불안으로 날마다 힘들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작은 도시에 있는 한 도자기 전시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도자기 작품을 관람/감상하면서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하던 조지 5세는 두 개의 꽃병만 특별하게 전시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개의 꽃병은 같은 재료를 사용하였고, 무늬까지 똑같은 꽃병이었지만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넘치는데 다른 하나는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조지 5세는 관리인에게 물었다.
“어째서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진열해 놓은 것인가?”
그러자 관리인이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다른 하나는 구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고난과 시련은 우리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함께 전시해놓은 것입니다.”
내 세 딸이 어렸을 때 밤이면 애들 잠들 때까지 내가 읽어주던 동화 중에 ‘쪼끄만 까만 수탉’ 이야기가 있다. ‘꼭끼독 꼬끼오’ 하고 쪼끄만 수탉 한 마리가 아침이면 닭장 위에 올라서서 울었다. 때로는 ‘꼬꺄독 꼭꾜’ 하기도 했지. 제 목청이 얼마나 좋은가 뽐내면서. 그렇지만 이 쪼끄만 수탉은 제가 살고 있는 닭장이 구질구질하고 지겨워졌다.
그는 제 몸이 새까만 대신 번쩍번쩍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이었으면 했고 좁은 닭장을 떠나 넓은 세상 구경하고 싶었다. ‘꼭고댁 꼭꼭’ 하고 울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큰맘 먹고 닭장을 떠나 세상 구경하러 나섰다. 얼마만큼 가다 보니 상점들이 많은 어느 마을이 나왔다. 한 상점을 들여다보니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물건들이 상점 안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뒤편에 있는 커다란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주인아저씨를 보자 그는 말했다.
“아저씨, 저는 쪼끄만 수탉 신세가 싫어요. 저도 아주 근사하게 황금빛이 되어 세상을 두루 보고 싶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아저씨.”
“네가 정 그렇다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지. 암, 있고말고. 너 이 마룻바닥에 금가루 보이지. 자, 그럼, 이 바닥에 네 몸을 뒹굴리거라. 그러면 네 몸이 햇빛처럼 황금빛이 될 테니.”
주인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그는 신이 나서 금가루 속에 막 뒹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정말 황금빛이 될 때까지.
이때 마침 이 마을 성당 신부님이 성당의 성탑 꼭대기에 세울 바람개비를 주문하러 상점에 들리셨다.
“신부님이 원하시는 물건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가게 주인아저씨는 이 쪼끄만 수탉을 가리켰다.
‘꼭끼어 댁 꼬끼오’ 하고 그는 좋아서 목청껏 울었다. 곧 이 수탉은 성당의 성탑 꼭대기에 왕자처럼 올라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좀 있으니까 그는 혼자서 외로워졌다. 이것이 황금빛으로 근사하게 높이 올라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가였다.
여기서 우리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우화집 선구자先驅者 The Forerunner (1920)’에 나오는 ‘바람개비The Weathercock’를 음미해 보자.
바람개비
바람개비가 바람 보고 말했다.
“넌 왜 늘 한 방향으로만
내 얼굴을 향해 불어오지.
단조롭고 지겹게도 말이야.
너 좀 제발 다른 방향으로
반대쪽으로 불어 볼 수 없겠니?
난 너 때문에 내가 타고 난
천성 천품 내 평정심平靜心을 잃고 있어.”
바람은 아무 대답하지 않고
허공 보고 웃을 뿐이었다.
The Weathercock
Said the weathercock to the wind.
“How tedious and monotonous you are!
Can you not blow any other way but in my face?
You disturb my God-given stability.”
And the wind did not answer.
It only laughed in space.
아, 그래서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도 이런 말을 했으리라.
“시련이 없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 없다는 거다. Never to suffer would never to have been blessed.”
“우리가 보거나 보이는 모든 건 꿈속의 꿈일 뿐이다. All that we see or seem is but a dream within a dream.”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노라.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아, 그래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도 또 이렇게 말했으리라.
“세상에 삶 이상의 부富와 재산이 없다. (누군가를 사모하고 또는 무언가에 경탄하며 찬미하는)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 말이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including all its power of love, of joy, and admiration.”
그렇다면 사랑 이상의 삶이 없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녕코 그렇다면 사랑 이상의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진실도 없지 않으랴.
어려서부터 내가 불러온 사랑의 주문呪文 ’사슴의 노래' 읊어 보리라.
사랑의 주문呪文: 사슴의 노래
별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수 없어도
너와 내가
마주쳤다
떨어짐도
저 별들의
반짝임처럼
우리의
눈 한 번
깜빡임이리.
봄 여름
가을 겨울
눈비 바람
오가는 것이
그 어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도
너와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가는
것도
저 풀잎에
맺히는
밤 이슬과 서리
아침 햇볕에
녹아 스러지듯
우리의
숨 한 번
맺혔다 지는
것이리.
하늘처럼
사람도
바람만
마시고
구름 똥
쌀 수 없어
우리 서로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지만
우리 비록
꿈속에서나마
여우나 늑대
되기보다는
저 아득히
멀고 먼 옛날
옛적으로부터
솟구쳐
샘솟는
뜨거운
우리
그리움의
눈물이
그 어느
땅 끝까지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저 깊은
산골짜기
시냇가에서
뛰노는
사슴이
되어 보리.
꿈이어라
꿈이어라
우리 삶은
꿈이어라
꿈속에서
꿈꾸는
우리 삶은
꿈이어라.
우리 삶이
꿈이라면
우리 서로
사랑하는
가슴에
수놓는
사슴의
꿈이어라.
우리 삶은
꿈이기에
꿈인 대로
좋으리라.
우리 삶이
꿈 아니라면
그 어찌
사나운
짐승한테
갈가리
찢기는
사슴의
슬픔과
아픔을
참아
견딜 수
있으리.
숨이어라
숨이어라
우리 삶은
숨이어라
숨 속에서
숨쉬는
우리 삶은
숨이어라.
우리 삶이
숨이라면
우리 모두
하늘
우러러
숨 쉬는
사슴의
숨이어라.
우리 삶은
숨이기에
숨인 대로
좋으리라.
우리 삶이
숨 아니라면
그 어찌
천둥 번개
무릅쓰고
뛰노는
사슴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냥
맛볼 수
있으리.
우리 서로
사랑하는
가슴이
준 말
사슴이
되어라.
인생이 소일거리가 아니라면 사랑 또한 탕진할 욕정이 아니고 성취할 자아완성이리.
사랑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사랑의 이슬방울 방울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비춰 주고, 그 속에 삶의 모든 열정과 힘이 들어 있으리.
소녀, 소년, 여자, 남자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다 누구나 하나같이 사랑과 삶을 나누는 사랑과 삶의 물방울들로 흘러흘러 코스모스바다로 가고 있으리.
봄에는 아지랑이로, 여름에는 소나기로, 가을에는 서리로, 겨울에는 눈꽃과 고드름으로 우리 모양새가 바뀌지만…
영어 격언 가운데 ‘고향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You can’t go home again.’란 말이 있듯이, 나는 나의 고향, 엄마의子宮 속으로도 반 세기 전 떠나온 그 옛날의 모국母國 한국의 수도 서울로도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노스탈지아Nostalgia 鄕愁의 구름바다 물결을 타고 날아온 나의 시간여행은 열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 공항에 내린다는 기내 방송으로 중단되었다.
갑자기 스페인 가수 훌리오 호세 이글레시아스Julio Jose Iglesias의 노래 ‘갈리시아에 바치는 노래/ Un canto a Galicia/ A song to Galicia와 패티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 가사가 귓속에 아니 가슴 속에 메아리쳤다.
이제 우리 열다섯 형제자매 중 나 혼자 남아 내 부모의 나라 고향 땅을,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코스모스 피는 가을철에 밟게 된다는 벅찬 감격에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사랑의 이슬방울’ ‘삶의 물방울’ 인생 아니 우주 나그넷길 길손 ‘코스미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나는 집 떠나 가출 소년이 되었고, 한국에 살면서도 ‘타향살이’ 하듯 했으며, 일찍부터 가을바람이 났었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나는 언제나 가을살이를 해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思春期 때 지은 다음과 같은 사추기思추期 ‘가을 노래’ 부르며…
어느덧 내 나이 85세로 인생 80 고개 중반이니 인생 4계 절로 치자면 내 몸은 겨울철 끝자락에 매달려 있음이 분명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가을철에 머물러 있나 보다.
낙엽이 진다
타향살이
나그네 가슴 속에
낙엽이 진다.
그리움에 사무쳐
시퍼렇게 멍든
내 가슴 속에
노랗게 빨갛게
단풍 든 생각들이
하염없이 우수수
흩날려 떨어지고 있다.
임금도 거지도
공주도 갈보도
내 부모 형제
그리운 벗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둘 모두
삶의 나무에서
숨지어 떨어져
낙엽이 되고 있다.
머지않아 나도
이 세상천지에서
내 마지막 숨을
쉬고 거두겠지.
그러기 전에
내 마음의 고향
내 영원한 고향
내 님 코스모스
품에 안기리라.
엄마 품에 안겨
고이 잠드는
아기같이.
잠자던 꿈에서
깨어날 때
잠에서 깨어나듯
꿈꾸던 삶에서
깨어날 때
삶의 꿈에서도
또한 깨어나
삶이 정말
또 하나의
꿈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살아 숨 쉬며
꿈꾸는 동안
새처럼
노래 불러
산천초목의
춤바람이라도
일으켜 볼까?
정녕 그렇다면
자나 깨나
꿈꾸는 동안
개구리처럼 울어
세상에 보기 싫고
더러운 것들 다
하늘의 눈물로
깨끗이 씻어 볼까?
정녕코 그렇다면
숨 쉬듯 꿈꾸며
도道 닦는 동안
달팽이처럼
한 치 두 치
하늘의 높이와
땅의 크기를
헤아려 재볼까?
아니면
소라처럼
삶이 출렁이는
바닷소리에
귀 기울여 볼까?
아니야
그도 저도 말고
차라리 벌처럼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 찾아다니며
‘사랑의 꿀’을
모으리라.
그러면서
꿀같이 단꿈을
꾸어 보리라.
(I composed this poem in my adolescence.)
Autumn leaves are falling
I’ve been traveling
Far away from home.
Autumn leaves tinted
In yellow and red
Are falling in my pining heart
Bruised black and blue.
Prince and pauper,
Princess and harlot,
Father and mother,
Brothers and sisters,
Friends and neighbors,
All are falling, one by one,
From the tree branches of life.
Soon it’ll be my turn to fall.
Before then I’ve got to go home
To fall fast asleep like a baby
Deep in peace in the bosom of the Cosmos
As I realize that
It was only a dream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I’ll be realizing that
Life too was but a dream,
When I wake up from this life-dream,
Dreaming.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sing like a bird to raise a wind
To dance with trees and grasses of
The mountains and streams of the valleys?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croak like a frog for rain
To cleanse the earth of
All the dirty and ugly things
With the teardrops of the heaven?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stretch out stalks like a snail
To measure up, inch by inch,
The height of the sky
And the size of the earth?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listen to the song
Of the waves
Like a conch shell?
Nah, like a bee,
I’d rather call
On beautiful flowers
And dream sweet dreams,
Collecting the honey of love.
저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1726)’를 쓴 아일랜드의 풍자 작가 조너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가 그의 ‘여러 가지에 대한 생각들Thoughts on Various Subjects’이란 에세이에서 통탄했듯이,
“우리는 서로 미워할 만큼의 종교만 갖고 있을 뿐, 서로 사랑할 만큼의 종교를 갖고 있지 못하다. We have just enough religion to make us hate, but not enough to make us love one another.”
여기서 궤변 같은 나의 ‘장타령’ 아니 아플 ‘아(ㅅ)’ 자字, 아릴 ‘리(ㅅ)’ 자, 사랑 ‘랑’ 자 ‘아리랑’ 타령, 아니 미칠 ‘미(ㅅ)’ 자, 아 서라 ‘아(ㅅ)’ 자, 차라리 ‘리(ㅅ)’ 자, ‘미아리’ 타령 한 곡 뽑아 보리라.
삶의 다른 한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으련만…
정녕 삶의 본질이
사랑이 아니더냐?
삶의 숨결이 사랑이요.
삶의 날개가 사랑이요.
꿈꾸는 삶이 사랑이요.
삶의 완성이 사랑이요.
삶의 시작도 끝도
사랑이 아니더냐!
사랑을 모른 채로
사는 억만년보다
사랑하는 한순간
얼마나 한없이 더
보람되고 복되랴!
취할 바에는
삶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리라.
미칠 바에는
삶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리라.
정말
취하도록
미치도록
죽도록
Wasn’t love
The essence
Of life, indeed?!
Breaths of life were love.
Wings of life were love.
Dreams of life were love.
Completion of life was love.
Wasn’t the beginning
And the ending of
Life
Love?!
I’d rather live
For a moment
In love
Than
For million years
Out of love.
Yes, this would be
Infinitely more blissful!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ife.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ove.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iving.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oving.
Really,
Drunkenly,
Madly,
To death!
정녕코 사랑 이상의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진실도 없다면, 사랑 없는 삶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없는 사막, 꿈 없는 잠, 숨 끊긴 목, 곧 꺼진 불이라고 해야 하리라.
If a dewdrop is evanescent,
So is life.
Must it be as evanescent
As the bloom of flowers and
The fragrance they exhale!
Must it be a dream,
Must it be a dream,
Life must be a dream,
Must it be dreaming in a dream.
If life is a dream,
Let it be a dream of
Engraving our loving hearts.
Let life be a dream.
If it’s not a dream,
How could one bear
The pain and sorrow of
Deer being torn by beasts?
Must it be a breath,
Must it be a breath,
Life must be a breath,
Must it be breathing in a breath.
If life is a breath,
Let it be a breath of
A deer breathing in the sky.
Let life be a breath.
If it’s not a breath,
How could one have
All the fun and pleasure of
A deer frolicking,
Braving lightning and thunder?
Let us be deer/dear
The symbol of
Our loving hearts.
옳거니, 그 말이 맞구나!
고통을 당할 바에는
사랑 때문에
넘치는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 이상
또 무엇이 있으랴.
사랑이 가능만 하다면
사랑이 절로
샘솟기만 한다면
어떤 슬픔이나 아픔도
감미롭기 때문이지.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많이 줄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사랑밖에 또 있으랴.
아무리 쏟고 또 쏟아도
탕진되지 않고
고갈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사랑 말고
또 있으랴.
아무리 주고 또 줘도
그 더욱 주고 싶고
아무리 받고 또 받아도
그 더욱 받고 싶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아니 태평양 바닷물과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산이
마르고 다 닳도록
결코 주는데 지치지 않고
받는데 싫증 나지 않는 것
세상에 오로지 사랑뿐이리.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의 말처럼
사랑은 흐르는 샘물같이
비록 목마른 이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때에라도
흘러흘러 바다로 흐르다가
날씨가 가물기라도 하면은
홀연히 온 데 간 데 흔적 없이
없어져 자취를 감춰버리지.
그래도 증발해버린 샘물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고
저 푸른 하늘 위로 떠도는
한 조각 구름이 되었다가
빗물로 쏟아져 내려와서
넘치도록 샘을 채워주지.
Talk not of wasted affection,
Affection never was wasted;
If it enrich not the heart of another,
Its waters, returning
Back to their springs,
Like the rain,
Shall fill them
Full of refreshment;
That which the fountain sends forth
Returns again to the fountain.
Henry Wadsworth Longfellow
Although I can’t return to my Mom’s womb nor to S(e)oul I left half a century ago, the capital city of my Motherland, as the English proverb goes, “You can’t go home again” my nostalgic time travel was interrupted by the announcement that the airplane will be landing at the Incheon Airport of Seoul after 15-hour flight.
Suddenly, the ‘Hymn of S(e)oul’ sung by Patti Kim and Julio Iglesias’ ‘A song to Galicia’ (1972 when I left Seoul) filled my heart.
Now that all my siblings are gone, I’m the only one left out of 15, still treading this father/motherland of ours, and I could hardly breathe at this intensely nostalgic moment.
Now it’s my favorite season autumn here in Korea. Wherever you go, you are greeted by cosmos flowers all along the country roads.
I came here on earth uninvited and lived as my heart beat, always drunk on love. Every breath I breathed was a miracle, believing that one human moment is much more worthwhile than the divine eternity meaningless to mortals. Life is not so serious, and yet full of mystery and wonder. I was so happy with a whiff of wind, a ray of sunshine, a child’s laughter, and everything of the world as anything was better than nothing.
I came to meet the ladies, the Avatars of Cosmos, but I don’t know where they are. If you ask me if they exist, I cannot say they do. If you ask me if they don’t exist, I cannot say they don’t. They are here and they are not here. They are the whole as one. You know that silence is the sound of time passing. Don’t you? They may be passing in silence, in and out of time. So please don’t ask me about the ladies. They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For all of you, living here and now, are the very Cosmians, the very Avatars of Cosmos.
Thus as such a Cosmian myself, my cosmic journey is open-ended.
사랑으로 숨쉬듯 사는 삶은 순간 순간 완성되는 것이리.
살지 않고 쓰는 글은 헛소리일 뿐이리.
빌건대 이 글이 그런 글이 아니기를.
Life is fulfilled every moment when it is lived in love.
Life is totally wasted when it’s written about without living it.
This is not my case, I pray.
우리 모든 코스미안은 우주꿈 여행 중이다. We all Cosmians are on our cosmic dream journey.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