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그림 속에 스며든 민초의 삶

문경구

 

세월을 따라 내게 스쳐왔던 세상 모든 손님들이 다시 그 세월을 따라 모두 떠나갔다. 썰물이 남긴 빈 바다에 남겨진 유일한 존재는 바로 떠나가는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그 깨달음이 나를 지켜주는 존재라면 그건 바로 어떤 세월에도 나를 떠나지 않고 지켜준 나의 그림이다. 그림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캔버스에 세상을 불러들이는 붓놀림은 내 자신이며 존재이다. 그저 먹고사는 일이 아니기에 늘 방황의 존재였지만 나의 영혼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다. 그 어느 하늘아래서든 내가 부르는 노래는 제대로 된 안정된 직장을 잡는 일이었다. 당장 저녁 끼니를 걱정하면서 그림이나 그리려 한다면 그런 삶은 세상 어디에 갖다 놓아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똑똑한 화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튼튼한 철가방을 얻는 공무원이 되는 일에 모두를 걸어야 했다.

 

어디를 가나 세상은 마음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그 말조차도 어려웠다. 애간장을 졸이고 손톱으로 바위를 파내는 현실이 없이는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일이 세상이었다. 몽땅연필 만큼이나 짧은 어어 수준에다 한국에서 넥타이 매고 동회 서기처럼 일했던 사람이 미국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리 잡을 때까지 버틸 만큼의 돈뭉치를 들고 왔다든지, 아니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냉동이나 정비기술이라도 배워 왔던지, 그도 저도 아닌 두 손바닥만 가지고 왔다면 마켓에서 푸성귀 정리하는 일이 딱 맞았다. 그것도 해보기 전에는 어디 쉬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한국을 떠난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영화 속 현실로 다가왔다.

 

몇 시간 운전해 모하비사막에 있는 도시의 공무원 시험원서를 내러 떠났던 날이었다. 은행도 우체국도 제대로 된 빌딩도 아닌 가정집에서 일을 보는 것이 의심되지 않을 만큼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몇 사람 안 되는 그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적과 같았다. 가게주인이 꼭 일본 아니면 중국 사람만 같아 보여도 반가울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들어섰다.

 

화장실 이용을 위해 냉장고에서 아이스케키 하나 사 들고 화장실을 찾으니 그곳에서 더 반가운 존재를 만났다. 화장실 바닥에 놓인 한국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는 , 너도 나처럼 이 먼 곳에 있는 가게까지 와 있구나하고 감격했다. 그 먼 벽지까지 가서 본 시험을 합치면 아마 백번도 넘게 보았으리라. 남들보다 필기시험은 높게 맞아도 겨우 턱걸이 한 현지 애들을 위해 들러리를 서주고 나는 뒤로 밀려나는 일도 백번은 넘는다.

 

내가 인터뷰관이라도 유창한 영어 실력의 현지 애들을 뽑지 나처럼 어정쩡한 응시자를 합격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달달 외워 치른 백 점의 내가 칠십 점짜리의 현지 애들과의 경쟁에서 수없이 미역국을 먹고 난 뒤 드디어 합격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그 순간뿐이었다. 기쁨 뒤에 숨겨진 어려움은 또 얼마였던가. 밑바닥 무수리 역이라도 좋으니 일단 궁중 안에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기 위한 집념 하나로 모든 것을 감수해야 했다. 안정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면 내가 꿈꾸던 또 다른 세상을 찾아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다. 그동안 여기저기 임시직에서 굴러먹은 시간을 접고 11개월 만에 잡은 정식 자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현지 애들은 그날그날 놓여진 일을 붕어빵 틀 뒤집듯 쉬운 일들이 내겐 절대 만만치 않은 일들이었다. 미국 현지 생활 경험이 없었던 내겐 어른들 말씀처럼 서말의 구슬도 한 알부터 꿰어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한 걸음씩 걸어 천리를 가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따르려 해도 그 어느 한쪽도 내 편은 아니었다.

 

너무 쉽게 이루려던 성급한 나의 생각은 그때까지였다. 길을 가다가 방향감각을 잃고 천리길 만큼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한 걸음 한걸음 걸어서 꿰어야 천리길을 만들 수 있는데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자꾸 어긋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땀을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구슬을 꿰어 낸 지금 내 앞에 놓인 붓과 물감을 보면서 결코 헛되지 않은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루를 쓰고 난 짧은 자투리 시간으로 즐기는 그림 생활의 뿌듯함이 바로 그 보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그 모든 시간이 내게는 정신수양이란 것을 깨달았다. 시위하는 군중 속 같은 일과 속에서도 분명한 마음에 주제만 있다면 그 자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게는 일상의 생활을 마치고 취미생활로 돌아가 붓을 잡는 시간이 마음을 닦는 경건한 존재의 확인이었다.

 

취미생활이 뭐 별개 있냐고 할 수 있지만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손에 쥐는 붓으로 하루를 그려보는 시간이 전부 나의 자산이다. 남들이 말하는 영화나 드라마 한 편 보는데 두 시간은 족히 드는 그 시간을 나의 취미생활에 고스란히 바친다. 의미 없는 일상에 익숙해질까 두려워 시작한 나의 그림 생활은 잘한 일인 것같다. 나의 그림은 오로지 나를 위한 그림인 것이다.

 

집 한쪽 벽에 걸린 그림 하나가 나의 열정이며 나의 삶이다. 인생을 영화라고 한다면 나는 역사 영화 속 이름 없는 치열하고 근성 있는 삶을 산 어느 민초와 같을 것이다. 정승 부럽지 않은 민초의 삶에는 희로애락이 그대로 녹아나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그림이고 삶과 같기 때문이다.

 

다음 생엔 부귀영화를 누리는 정승으로 살고 싶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사양이다. 민초처럼 자유로운 인생의 길을 또 가겠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 길은 그림도 글도 내 영혼도 거침없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9.21 12:12 수정 2021.09.2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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