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은 자신의 발길을 반겨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명상가이자 시인인 틱낫한 스님이 왜 땅과 입맞춤하듯 천천히 걸어가라고 했는지 산길을 걸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굳이 명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걷기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고 자신을 오롯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이 좋은 길이다.
아름답고 걷기 좋은 길 중에는 반드시 ‘산사(山寺)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오랜 세월 동안 민초들이 걸어온 옛길이자 수도자들이 오간 구도(求道)의 길이며, 피안(彼岸)의 세계로 드는 길이다.
석굴암으로 가는 우이령길은 등산하는 길이 아니라 산책하는 길이다. 신도라면 양주 교현리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도증을 제시하고 사찰까지 자동차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길은 걸어야 제맛이다.
길가로 활짝 핀 구절초가 반긴다. 누구라도 꽃을 보면 닫혔던 마음이 꽃잎처럼 절로 열린다. 그러고 보면 사람마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부처님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다.
소의 귀처럼 길게 늘어진 모습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우이령(牛耳嶺)은 서울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 교현리를 잇는 고개다. 옛날에는 서울과 양주를 오가는 보부상이나 장사치들이 보따리를 지고, 소달구지를 끌고 이 길을 오고 갔다. 그러다가 군 작전도로가 되면서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넓고 평평한 신작로가 되었다. 그러다 1968년 1·21 사태 때 무장공비가 이 길을 지나면서 민간인 출입이 전면 금지됐다. 길이 다시 개방된 때는 지난 2009년, 40년간 우이령길의 생태는 보존되었지만 동시에 오봉 아래 석굴암은 적은 수의 신도만이 아는 숨은 암자가 되어버렸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오봉은 도봉산의 능선에 자리한 다섯 개 봉우리로 솟은 산이다. 다섯 개의 봉우리마다 설악산의 울산바위처럼 거대한 바위를 이고 있다. 다섯 봉우리 아래 관음봉으로 불리는 산봉이 하나 더 있는데 석굴암은 이 관음봉 아래 위치한다. 석굴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이령길을 지나야 한다. 양주 교현 방면에서 출발하면 3km, 우이동 방면에서 출발하면 5km 거리다.
우이령길은 북한산 둘레길 21구간으로 북한산국립공원에서 유일한 사전예약구간이다. 덕분에 언제 가도 한가한 길이라 원시림이 우거진 계곡은 늘 새소리, 물소리가 선명하다.
산행 들머리인 북한산국립공원 교현탐방센터에서 예약자임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숲길로 들어선다. 세월에서 묵은 때, 저자에서 얻은 먼지를 털어내고 산경(山景)의 운치를 훔치면서 길을 따른다. 30여 분 걷다 보면 너른 공터인 유격장 연병장이 나온다. 이곳은 기자가 40여 년 전 군 시절 소대원들과 함께 힘든 유격 훈련을 했던 추억이 담긴 곳이다. 여기서 오봉 방향으로 난 산길을 따라 1km 정도 가면 천년고찰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으로 오르는 산길은 가파른 언덕길이다. 연등이 단아하게 내걸린 그윽한 산길을 오르니 솔 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친다. 매화나무가 깊은 산중에 숨는다 할지라도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자신의 향기는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절에서 나는 솔 향기가 절 아래로 흘러넘친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걸음걸이가 더뎌지면서 사람이 자연에 안겨 한 몸이 될 즈음 석굴암의 불이문(不二門)이 나온다. 일주문의 역할을 하는 불이문 너머로 관음봉과 오봉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힘을 내어 마지막 비탈길을 돌면 관음봉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석굴암의 자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노송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량 초입에 있는 윤장대(輪藏臺)에 먼저 들린다.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윤장대를 돌려 속세의 먼지부터 털어낸다. 팔각형의 기둥 안에는 경전이 들어있어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고 속세의 업장을 소멸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
향기에는 주인이 없다. 암자에 들어서니 꽃향기가 비등한다. 관음봉 아래 터를 잡은 산사는 맑고 고즈넉하다. 한낮의 햇살에 푸름이 출렁거리는 숲속, 거기에 안긴 암자는 마치 녹음의 바다에 떠 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다. 살면 살수록 이기심으로 작아지기 십상인 인생, 습관적인 후회와 반성으로 가득한 나날들, 우리네 삶은 겨우 그 언저리에 걸려있는 쪽배일지도 모른다.
암자 뒤로는 도봉산의 오봉과 관음봉, 앞으로는 북한산 상장능선의 진초록 숲이 산사를 둘러싸서 휘호하고 있다. 아담하고 담백한 대웅전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이 황홀하고, 기척 없이 불어온 미풍이 경쇠를 건드려 쨍그랑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든 숲의 미물들을 깨운다. 대웅전에 올라 부처님께 삼배 드리니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고,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
대적광전 법당 왼편에 자리한 범종각을 지나면 석굴인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를 천장으로 삼은 자연동굴임을 알 수 있다. 고려말 나옹화상이 이 굴에서 정진했다는 동굴 법당 안에는 돌로 빚은 나한상들이 하나같이 무척 편안하고 자상한 표정으로 일행을 반겨준다.
새로 지은 대적광전 계단에 앉으면 시선 앞으로 북한산 상장능선의 마루금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산자락은 푸른 보자기처럼 덮여 있다. 아함경(阿含經)에 산 정상을 올라가 보라는 부처님 가르침이 적혀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어 산 아래처럼 좁은 소견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절이다. 석굴암을 뒤로하고 우이령길로 내려와서 우이동으로 가는 숲길로 들어선다. 우이령은 소의 귀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 지세가 유순하다는 것이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숨이 가빠지는 ‘깔딱고개’가 없고 길폭도 제법 넓다. 여럿이 가면 두런두런 얘기도 주고받으며 걷을 수 있다.
숲길에서 만나는 탱크나 장갑차의 진출을 막는 대전차 장애물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걸맞지 않아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그래서 더 애틋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산사 가는 길에 만난 숲은 실로 이상적인 공간이다. 산은 진정 순수한 지혜의 도량이다. 저마다 홀로 섰으면서도 조화로운 숲을 이루는 자연스러움.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잎이 무성한 나무와 성긴 나무의 저 평등한 동거. 여기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으며, 아무런 어리석음이 없다.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난 우이령길을 걸으며 짙어가는 가을 산사의 서정을 듬뿍 느낀 하루였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