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울의 상수도는 1908년 9월 1일 처음으로 통수되었다. 뚝도유원지 제1정수장이 첫 수원지. 조선 26대 임금인 동시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시절이다. 이곳 정수장에서 여과된 수돗물이 배관을 타고 각 가정으로 급수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설은 평지나 완경사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970년대까지도 서울의 비탈 동네에는 물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는 물장수가 있었다. 물을 져다가 팔아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아버지 등짐으로 자식들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이런 직업군의 대명사가 <북청 물장수>다. 북청에서 서울로 온 사람들, 그들은 누구였을까. 이 사람들을 모티브로 한 유행가가 1942년에 탄생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해방광복 된 3년 전이다.
나는야 물장수 북청이라 물장수/ 새벽 별 넘쳐나는 물지게를 지고서/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아가씨 대문 여소 복 물을 받으소// 고향은 북청이요 귀양살이 터에다/ 행색은 꺼벙해도 명문의 손자요/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마나님 대문 여소 그 물을 받으소// 조카는 대학생 아들은 중학생/ 물지게 긴팔에 박사가 수두룩/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삐걱/ 한 바리 대령했소 그 물을 받으소.(가사 전문)
산허리에 다닥다닥 걸쳐 있는 오두막 같은 집터, 사립문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노래 끝 소절, ‘한 바리 대령했소’의 바리는 소나 말의 등에 한 짐 가득 실은 단위이다. 북청 물장수들은 양철통이나 나무통을 막대기 양 끝에 메달은 상태로 어깨에 짊어 지었다. 이것이 한 바리다. 그 시절 물을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면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산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르막길을 오르내리거나, 물지게를 져서 날라야 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유난하게 성실하고 물 배달에 신의를 지킨 사람들이 북청에서 온 사람들이었단다.
북청은 함경남도 북동부지역 북으로 이원, 서로 덕성, 남으로 신포, 동쪽으로는 동해바다와 근접한 지역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9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2년간 유배 갔던 곳이 북청이다. 이곳 북청 사람들 중 1800년경부터 한양(서울)으로 와서 물장수를 한 사람이 많았단다. 이들은 한 사람의 물장수마다 10∼30호씩 단골 구역(수좌구역, 水座區域)을 정하고 서로가 상권역(商圈域)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불문율을 정하고 지켰단다.
물지게의 삐걱거리는 소리에는 자식에게 사각모(四角帽)를 씌우고자 하는 의지와 자부심이 당당거린다. 당시 서울에 특별한 연고가 없던 그들은 고향 출신끼리 군락을 지어 생활하였고, 이로부터 1920년대까지 존속하였던 물방이라는 물장수 합숙소가 나왔다. 여기에서는 잠만 자고, 식사는 물을 사는 사람의 집에서 한 끼씩 물값 대신 먹었단다. 이들 중에서 북청사람들이 가장 많았으므로, 북청 물장수라는 말이 생겼다. 여기에서 ‘북청사람들은 물을 팔아서라도 자식 공부는 시킨다.’는 말이 생겨났단다. 그들은 물 배달 집에서 차려주는 밥상을 말끔히 먹어 치웠는데, 이 행태를 ‘물장사 밥상’이라고도 했단다.
이들은 이른 새벽 물을 배달하였고, 단골들에게는 월 단위로 일시불로 대금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지게로 물 항아리를 져서 날랐으나, 나중에는 석유 양철통 두 개를 봉 막대기 양쪽 끝에 매달고서 어깨에 메고 배달을 했다. 1908년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들어오면서 배관의 우선순위는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 중심으로 설비가 되었다니 울화가 치민다. 을사늑약 이후 왜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생겨난 탓이다. 청계천 남쪽 명동 일대와 신용산 지역이 그들의 초기 집단거주지였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960년대까지도 물지게에 물을 져다 먹은 산동네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의 저자 작곡가 임종수(1941~. 순창 출생)도 부인 한은오와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살 때, 물을 져다가 먹는 산비탈에 살던 시절을 회상했었다. 기똥찬 사나이 작사가 김동찬(1949~. 부여 출생)도 《네박자, 둥지. 그리고 봉선화 연정》에서, 고향 부여에서 서울로 와서 물지게에 의존하여 식수를 해결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서울 물장수 얘기는 불과 60여 년 전의 현대사의 서사임을 기억하시라.
북청에는 거두봉·종산·대덕산·중태령·독슬봉 등 산봉우리가 있고, 남대천이 읍내를 지나 동해바다로 흘러가면서 북청평야가 펼쳐져 있다. 조선 중기 병조·형조참판을 지낸 이시발(1569~1626)은 북청에 대한 이런 시를 남겼다. ‘변방에서 객지살이하다 세월만 흐르고/ 언제쯤 말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나/ 온갖 일이 구슬퍼져서 공연히 눈물 훔치니/ 한평생 품었던 계획은 이미 글러버렸다네/ 세상엔 때를 만나지 못해 어려움이 많아도/ 그때를 향해 홀로 수고로웠다 원망 않으리/ 꿈속에서는 뜻밖에도 들판에서 흥을 내더니/ 호미 들고 달을 타고 동쪽 이랑으로 내려가네.’변방에서 돌아갈 날을 그리며 신세를 한탄한 글인데, 벼슬살이로 온 것도 아니고 유배를 온 사정을 읊은 것이니 회한이 어떠했을까.
북청은 오성·백사 이항복(1556~1618)이 1617년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가 11월에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고 귀양을 갔던 곳이다. 이때 그는 중풍이 재발하여 반신불수가 된다. 당황한 광해군(1575~1641. 조선 15대 임금)은 그의 유배지를 12월 17일 용강, 18일 흥해, 21일 창성, 24일 경원, 28일 삼수로 옮기게 한다. 그러던 중 1618년 1월 31일(음)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어 타계했고, 향년 62세였다. 1714년 숙종 임금은 백사가 머물던 옛터에 산앙정(山仰亭)을 세운다. 훗날 한성부윤을 지낸 박필정(1684~1756)이 정자에 올라 백사를 회상하는 시를 남긴다. ‘한가한 날 산앙정에 올라 바라보니/ 푸른 산 맑은 물에 한껏 정을 머금었네/ 정자는 남아도 사람 떠나니/ 장차 어찌 우러르랴/ 오랜 세월 남은 옛터 오랜 세월의 명성을.’
1617년 겨울,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을 가면서 마지막 넘은 고개가 철령(鐵嶺)이다.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 경계 685m 고개이고, 북쪽을 관북·동쪽을 관동지방이라 한다. 1914년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부설된 경원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관북·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로 원산·용지원·고산·회양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었다. 고산은 북쪽·회양은 남쪽에 발달한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1388년(고려 우왕 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본래 원나라 땅이라며 요동 관할 하에 두겠다고 통보해오자, 고려는 이에 반대하고 철령뿐만 아니라 북쪽 공산령까지 원래 고려 영토라고 하며 요동 정벌을 결의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던 그 공격이었다. 이 철령을 넘어가면서 백사는 자신을 귀양 보낸 광해군을 향한 시를 한 수 남긴다. ‘철령 높은 고개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願淚)를 비 삼아 띠어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이 노래가 궁중으로 흘러 들어가니 궁녀들이 다 함께 읊었고, 광해군이 이 시를 듣고 남몰래 울었단다.
김동환(1901~1958, 함북 경성 태생)의 <북청 물장수> 시는 어떤가.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유행가는 역사다. <북청 물장수>가 그 증거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