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阜孔氏大同譜序
國之有史 家之有譜 其義一也 循蜚記之有別無世 不曰 無史之致也 魯僖公之逆祀 亦不曰 國之
史不明之故耶 國之史不修尙有如此 況家之譜不修乎 昔者 蘇老泉曰 一人之身 分而至於塗人 吾
譜之所以作也 又曰 觀吾之譜者 孝悌之心可以油然而生矣 由此 觀之親親之心 在於爲譜 親親之
義 天地之常也 故易曰 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而後家道正矣 其義大哉 豈不愼乎 譜也者 譜
其族也 鳴呼 國祖而不爲同譜者 系統之相違者或有之 昆季之相換者亦有之 豈以同祖之孫而 至
於如此哉 寔始於譜不修之故也 盖人之有族 如水之有泒 族之同譜如川之 朝宗其流也順 其歸也
正 爲其同祖者 爲其同譜以明親之義可也 吾東孔氏大聖 孔夫子之五十四世孫 諱紹元朝 以翰林
學士 高麗恭愍王時 以魯國公主陪行來東國仕至平章事勳封檜山君 仍居東國吾東孔氏 自此始矣
是爲譜首之祖 闕後子孫繁昌而蔓延於東國而文武忠勳 爲吾東名族矣 子孫之多 不讓於殷之孫子
其麗不億矣 無譜不可考 不可考則是爲塗人 凡以孔爲姓者無一遺漏 盡入於今此大同譜 雖百世之
遠按之 若有綱之 綱昏衢之耶 無至後日之悔亦可也 今夏避暑次自往馬山 訪孔聖範 聖範君卽鄙
之甥姪也 以孔氏大同譜事 屬其序文於余 余非其人 以薄聞淺識 何敢當 如此重大之役 固辭不聽
屬之 益切不獲 已雖極知 僭翰然昌廉 以茂拙之文略述如右 而序之焉
檀記 四千二百九十八年 乙巳 七月 望 全州 李殷春
곡부공씨 대동보 서문
나라에 사기가 있는 것과 가정에 족보가 있는 것은 그 뜻하는 바가 같다. 떠도는 기록에 의하여 이름은 있는데 세상에 없다고 하여 사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노희공의 제사가 바뀐 것도 나라의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까?
나라의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가정의 족보를 바로세우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옛 사람 소로천이 말하기를 한 사람의 몸에서 나누어져도 길 가는 낯선 사람처럼 될 수 있으므로 이것이 우리가 족보를 만드는 이유라고 했고, 또다시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사람은 효도하고 공경할 마음이 실로 유연하게 우러날 것이라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친척을 가깝게 하는 마음이 족보를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친척을 친하게 하는 것은 천지간에 떳떳한 일이다. 그러므로 주역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고 아들은 아들의 도리를 다하고 형은 형의 도리를, 아우는 아우의 도리를, 남편은 남편의 도리를, 아내는 아내의 도리를 다한 후에 가정의 도리가 바로 선다.”고 하였으니 그 뜻하는 바가 크도다. 이 어찌 신중히 하지 아니하리오.
나라의 조상이 되었다고 족보를 같이하지 아니하여 계통이 서로 어긋나는 사람도 간혹 있고 형과 아우가 바뀐 사람도 있으니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족보를 바로 세우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의 일가가 있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일가가 족보를 함께하는 것도 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그 흐름이 바르면 가는 길도 바르듯이 할아버지를 같이 하는 사람이 족보를 같이 하면 친족이 밝아지니 그 뜻이 옳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씨는 대성인인 공부자의 오십 사세 손인 소(紹)가 원조인데, 고려 공민왕 때 한림학사로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고 공적이 있어 회산군에 봉해졌고 우리나라에 살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공씨는 이 분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 분이 족보 머리의 시조가 된다. 그 후 자손이 번성하여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고 문무충훈이 많이 나서 이 땅의 이름 있는 가문이 되었다.
자손이 많이 나도 중국의 후손이라고 꺼리지 않았으니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이다. 족보가 없으면 살펴볼 수 없고 살펴볼 수 없으면 길가는 남모르는 사람이 된다. 무릇 공씨 성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대동보에 기입하여 비록 백세가 되어서도 이를 어루만지게 하리라. 만약 강산에 기강이 있다면 거리가 어두워지겠는가? 훗날에도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옳을 것이다.
금년 여름에 내가 피서차 마산으로 가서 공성범을 찾아 가니, 공성범 군은 나의 생질이라 공씨의 대동보 일로 나에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에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들은 것도 적고 아는 것이 없어 어찌 이와 같은 역사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굳게 사양했다. 그러나 듣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부탁하기에 비록 크게 잘못된 일인 줄 알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거칠고 옹졸한 글로써 대략 위와 같이 글을 지어 서문으로 한다.
단기 4298년 을사 7월 보름 전주 이은춘 씀
[이은춘]
해산 이은춘은 1881년 12월 19일 경남 창원군 구산면 마전리에서 아버지 이영하, 어머니 정귀선의 제6남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 창원군 진북면 정삼리에 있었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청년시절에는 한강 정구의 후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교동향교에서 가운 허정덕, 화산 임재식 등과 함께 지역유림으로 활동하였다.
경남 일대의 수많은 재실과 정자, 사당에 상량문이나 현판 또는 기문으로 그의 족적이 남아 있다. 1966년 음력 11월 7일에 생을 마감한 해산 이은춘은 근대 경남 지역의 대표적 유생이다.
그는 세상을 마감하는 날 아침에 속을 깨끗이 비우러 화장실을 다녀와서 장손 이용효에게 "나 오늘 오후에 간다"고 말한 후, 그날 오후에 손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사이 좋게 잘 살아라"는 유언을 남기고 86세를 일기로 선승처럼 세상을 떠났다. 발인 날짜와 시간, 장지 묘소의 좌향까지 증손 이봉수에게 미리 알려주고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