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기건강 검진을 위한 마지막 특별 코스인 MRA 촬영을 받기 위해 누워서 하얀 공간 속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영상을 보았다. 어떻게 병 하나 모르시고 사시다 가셨는지 신비한 생각이 아버지의 영정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둡기만 하던 세상을 사시면서 당신의 건강을 위해 병원 방문 한번 모르시고 사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죄스러운 마음에 얼른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지금 나는 내 몸 구석구석을 보기 위해 조영제라는 주사로 몸속을 훤히 비추어 가며 병을 찾아내려는 내가 과연 아버지를 생각할 자격이 있는지 염치없는 생각만이 나의 목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구십육 년이라는 긴 인생 페이지의 생활기록부를 덮으시고 마지막으로 떠나셨다. 하늘빛도 태평양 바다 빛을 닮아 눈이 부시도록 밝게 빛나던 날이었다. 당신 몸을 태운 한 줌의 재를 바다에 뿌려드리면서 기구했던 한 남자의 일생도 말끔하게 끝난 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나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겨주지 않으신 대신 나도 아버지께 자식의 도리를 다해 드리지 못했기에 우리는 서로 비긴 게임을 한 것이라고 아주 편하게 말씀을 드렸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앞으로 생겨났다 뒤로 사라지는 바닷길 물결은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런 기억들이 아버지가 생전에 남기고 가신 홀가분한 마음이셨으니 아버지도 내게 섭섭함이 있으셨다면 모두 바다에 뿌리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지금은 생전의 아버지 기억들이 아버지가 남겨 놓고 가신 유품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무릎까지 덮는 눈 속을 당신의 아버지이신 나의 친할아버지를 모시는 장지를 아버지는 집안 어른들 등에 업혀 가셨던 역사적 기록을 내게 남겨주고 떠나셨다. 부모님들을 어린 나이에 보내드리고 일본의 지배 아래서 성장과 해방을 맞으신 역사의 증인 이야기도 해 주셨고 결혼하기 위해 처자를 맞이하시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그 한 많은 세월과 갑자기 터진 육이오전쟁의 고통을 담담하게 내게 전해주셨다.
오늘 그 모두가 아버지의 무형 유산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그 뒤 나의 어머니조차 병고로 일찍이 잃으신 슬픈 기록을 이야기하며 아버지는 남자가 먼저 가야 세상이 빛이 난다는 말을 하셨다. 어머니보다 곱절을 사셨던 고통의 기록을 찾는 일은 하늘을 나는 새들도 들으면 슬퍼할 일이니 꼭 나 혼자 간직하라는 이야기로 들려졌다.
특별히 편찮으신 데도 없으시다가 사흘 감기 기운으로도 며칠 건장하신 걸음을 보이시더니 겨울이 찾아오기 무섭게 주무시는 듯이 떠나신 일이 유독 가슴에 남는다. 그 모두가 아버지의 유산처럼 내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드시는 식사량도 스님들이 받는 밥상보다 더 간편하고 조금 드시면서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몸을 움직이셨다.
어느 누구의 부축도 받아보신 일이 없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 당신이 겪으신 식민지 통치와 육이오전쟁을 겪으시면서 “앞으로 너에게 찾아오는 인생의 변화는 아무도 막지 못하는
일이니 이제 내가 지키며 살았던 나의 역사를 울타리 가지에다 걸어놓고 갈 테니 꺼내 보고
살거라”하시고 떠나셨다. 자식인 나의 건강을 염려하시면서 남겨 놓으신 너무도 소중한 유산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단 한 푼도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엄청나고 귀한 유산을 받은 것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크게 복리로 다가온 것이다. 오늘처럼 건강검진을 받는 일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내가 지금 물려받고 있다는 말씀 같았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홀아비로 사신 기록 뒤에 아주 간략하게 사인이 폐렴이라고 표시되어 있으신 것도 나에게는 건강하게 사셨다는 의미를 전해주신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거동 못한 채로 오래 살아 시간에 질질 끌려다니다가 떠나는 일, 그 또한 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사시다 그 바톤을 내게 물려 주시면서 당신처럼 살라고 하신 말씀 같았다. 혼자 외롭고 긴 세월을 사시다 가신 것도 하늘의 뜻이니 지금 나의 고독함도 바로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운명처럼 명심하라는 말씀 같았다.
그 뜻은 나의 인생 여정에서 늦게나마 얻은 지혜로운 깨달음의 유산을 받은 일이다. 그 시대 식량을 봉급 대신 지급해 주던 공무원 형편으로 키운 자식들이 순서대로 상아탑에서 돌아오는 모습에 기뻐하시고 다시 순서대로 당신의 둥지에서 떠나보내는 일이 부모의 의무로 여기던 세월이 아닌가. 지금은 효도로 부모를 편히 모시면서 그 은공을 갚아드려야 한다는 말은 아무 데도 없다.
부모에게 보증수표 같은 자식이 해외로 떠나는 일은 부모와 자식 모두가 크게 출세하는 일이라고 믿던 그 세월이었기에 전혀 의심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식도 원하지 않는 미국 길을 오신 일까지만 확실한 보상을 받으신 일이셨다,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 지으신 맛만 보신 아버지의 복이셨다. 자식은 품 안에 있을 때가 자식이라는 걸 누가 뭘 근거로 퍼뜨린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품을 한번 떠나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언질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남의 식구가 끼어들면 더 이상의 자식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현실까지 봐야 했던 아버지의 가슴을 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품속의 새 한 마리가 날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체념을 못 하시던 아버지의 슬픈 세월조차 나는 유산으로 여기고 싶다. 아버지의 깊었던 수심을 그렇게나마 위로해 드렸으면 좋겠다.
호강시켜 준다는 자식의 말에 아버지는 감쪽같이 속으시고 공들인 장남의 밑구멍으로 금은보화가 쏟아질 줄 알았냐며 조롱하는 웃음소리도 들으셔야 했다. 더 이상 아버지 가슴에 남겨질 것이 없다고 비우신 그 공허한 가슴으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남아있지 않다. 그 어느 하늘의 법도 아버지를 도와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아셨던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작은아들인 내가 바라보는 아버지라는 이름은 참 서글프기만 하다. 그까짓 효자 소리 들어 뭐하냐는 작은아들의 철학도 내게 주신 유산 속에 들어있다. 모두가 거짓인 것을 무슨 기록으로 남긴다는 말인가. 손에 쥐여주신 땅문서만이 유산이 아니었다. 당신께서 사신 건강한 철학대로 살아가라는 일상이 커다란 유산인 것을 오늘 나는 건강검진에서 함께 받은 것이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