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면 산 밑 작은 집에 사는 백구가 꼬리를 치며 반긴다. 차 소리만 듣고도 반기고 눈을 마주치면 더욱 꼬리를 세게 흔든다. 봄을 기다리는 감나무며 겨울 논이 또 반겨준다. 현관이 없는 문의 작은 열쇠 구멍에 키를 넣어 돌리면 ‘딸각’하고 간단히 열린다. 산 밑에 있는 작고 조용한 나의 거처(居處)다.
거실이 넓다. 집이 커서 넓은 것이 아니라 번잡한 장식물들이 없으니 넓게 보이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깨어있으라’는 족자의 가르침, 작은 라디오, 책 몇 권 놓여있는 작은 서랍장이 전부다. 의례히 있는 텔레비전도 없고, 소파도 없다. 형광등마저 소박한 불빛을 낸다.
부엌살림 거리도 단출하고 앞서 살던 사람이 두고 간 냉장고엔 김치와 된장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가스렌지도 온 오프(on off) 기능이 전부다. 그래도 먹거리 조리에 모자람이 없다. 그릇 몇 개, 수저 몇 벌, 깨끗이 말라있는 행주,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생수병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웃 농장의 수탉 소리에 깨어나 누룽지를 끓이거나 미역국에 밥덩이로 아침식사를 한다. 서걱거리는 김치 씹히는 소리가 사라지면 수저와 서너 개의 그릇을 설거지하면 충분하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오전에는 농사일을 한다. 상큼하게 시린 공기지만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난다. 쓰레기들이 사라지고 흙이 부드러워진다.
오후엔 책을 읽는다. 학창시절의 의무적인 공부와 달리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록 공부의 깊이는 얕을지언정 하나씩 알고 깨우쳐가는 과정이 스스로를 격려하기는 그야말로 딱이다. 글도 가볍고 단순한 소재를 찾아 쓰니 더욱 편안하다. 가끔은 집 뒤 작은 산을 오르기도 하는데 나만의 작은 길을 만들며 나무와 풀을 만나는 것도 큰 축복이다.
때때로 기지개를 켜며 조용한 해넘이를 본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서 석양이 더욱 선명하고 밤중에는 별이 훨씬 더 밝게 빛난다. 후두둑 밤새가 날아가고 그 새를 보고 개가 짖는다. 그 소리에 놀란 별똥별이 떨어진다. 소원을 말할 시간도 없이, 하긴 이렇게 사는데 무슨 별스런 소원이 필요하겠는가.
친구들도 드문드문 다녀가고 저만큼의 도로엔 차들도 드문드문 다닌다. 또 드문드문 불어오는 바람에 가축 퇴비 냄새도 드문드문 실려서 온다. 구수한 거름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농부의 특권이다. 작년에 잡초 때문에 묻혔던 검은 비닐을 벗겨낸다. 보풀거리며 발등을 덮는 흙먼지와 함께 그것은 봄을 맞이하는 또 다른 새로움의 시작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친구와 식사를 하고는 초저녁 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 시간도 꽤 괜찮은 그림이다. 도심과 달리 불야성이 없어서 더욱 좋다. 며칠 전엔 친구가 삼겹살을 사들고 왔길래 마당가에서 구워 먹는데 고양이도 찾아와 눈을 맞춘다. 식은 고기를 던져주면 얼른 물고 사라졌다가 혓바닥으로 입을 닦으며 다시 다가온다. 그래 같이 먹자.
직장인일 때는 휴대전화를 잠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잤는데 요즘은 일할 때는 아예 방에 두고 나간다. 오롯이 자연과 함께 하고픈 작은 욕심 때문이다. 이것도 욕심인가 하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음을 짓는다. ‘휴대폰 없는 곳으로 휴가를 가고 싶어 했던’ 그 즐거움을 지금은 자연스럽게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습관적 검색(檢索)에서 벗어나 사색(思索)하는 기쁨은 크다.
며칠 전 퇴비를 뿌린 뒷날 새벽에 비가 조금 뿌렸는데 그 덕분인지 가지치기된 감나무들이 땅속의 기운을 힘껏 빨아올리고 있는 모양새다. 50년 만의 가뭄이라고 난리를 떨어도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조용히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다. 곧 노란 개나리도 우리에게 올 것이다. 파란 잎은 숨겨두고 노오란 미소를 앞세우고 오는 개나리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간소함으로 살고 싶다. 작업복 한 벌로도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드물게 오는 친구로도 세상을 얼마든지 즐겁게 살 수 있다. 집 뒤의 늙은 나무를 닮아가는 나이에 내 집 사립문에 풀이 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