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는 우리 민족을 35년간 식민통치(植民統治)를 하면서 4번의 통치정책전략을 전환한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武斷統治), 1920년대는 문화통치(文化統治), 1930년대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민족문화 말살통치(民族文化 抹殺統治)·1940년대는 군국주의통치(軍國主義統治)를 한다. 이 곡 <봄노래>는 1930년대 민족문화말살기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태어 난 노래이고, 원래 이름은 <봄노래 부르자>이다.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때 돌아 꽃은 피고
새 우는 이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 다 몰려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오너라 동무야 소리를 높이 봄노래 부르면서
이 강산 잔디밭 향기 우에 민들레꽃을 따며
다 같이 이 봄을 찬미하자 이 봄이 가기 전
오너라 동무야 피리를 맞춰 이 노래 부르면서
엉큼성큼 뛰어라 씩씩하게 봄 잔디 풀밭 우에
다 같이 뛰 잔다 엉큼성큼 이 봄이 가기 전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고 10년 간 무단통치를 하다가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의 독립만세운동에 부딪쳐 문화통치로 전환을 하였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 소학교 선생들까지 차고 다니던 일본도 칼을 풀어놓고, 부분적이나마 언론문화예술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10년.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의 자의적인 도발,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한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은 1931년 9월 18일~1932년 2월 18일까지 일본제국이 류탸오후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침략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이었다. <봄노래>가사의 천진성과 순수한 서정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으로 내몰리기 직전의 격변기에 태어난 노래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맑고 서정적이다.
신사참배(神社參拜)는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에 일본 천황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을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 신사는 일본 민간종교 신도(神道)의 사원이다. 우리나라에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신사는 1910년 전에는 일본인 조선 거류민들을 위해서 민간에서 건립을 주도하였지만, 강제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6월까지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신사 1,062곳을 세웠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 한국인들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일이다. 조선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촉진하기 위해 1939년 11월 제령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제정한다. 이에 따라 우리 고유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하여 1940년 2월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제출할 것을 명령했었다. 조선총독부는 관헌을 동원해서 협박과 강요로 강행,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식들에게는 각급학교 입학을 거부하고 창씨하지 않는 호주는 비국민으로 낙인을 찍어 사찰미행을 철저히 하고 노무 징용의 우선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등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사회적 제재를 가하였다.
당시 채규엽은 25세였다. 그는 1906년 함흥에서 출생하여 1949년 북한으로 간 이후 행적확인이 곤란하다. 그래서 그의 생멸기간을 1906~1949년으로 명시한 자료들이 많다. 원산 중학교 때 모기윤(毛麒允, 1912~1983. 시인·아동극작가·시인 모윤숙 남동생)선생과 독일인 모이기르크 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이후 1926년 오사카 음악학교에 유학을 하고, 요미우리신문사 주최 신인연주회에서 1등으로 입상했으며, 1928년 5월 10일 일본 YMCA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또한 조선인 유학생문화예술모임 토월회와 취성좌의 막간가수로 활약했다.
1928년 귀국해서 근화여학교(덕성여자고등학교, 종로구 안국동. 1920.4.19. 근화여학교 설립) 음악교사를 지냈고, 1929년에는 경성여자미술학교로 이직하였으며, 1932년에 콜럼비아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이 시기에 발표한 노래가 <봄노래 부르자>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6개 레코드사가 진출해 있었다. 콜롬비아·빅터·포리돌·시에론·오케·태평이 그들이다.
채규엽의 데뷔곡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유랑인의 노래>였다. 1930년 <봄노래를 부르자>와 <유랑인의 노래>를 취입한 후 그의 인기는 지속됐다. 1935년 매일신보에서 독자투표로 남자가수 베스트5를 선정했을 때 1위를 차지했고, 또한 해방광복 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이며, 해방이후 1호는 <신라의 달밤> 현인이다.
그 후 그는 동경으로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이름으로 가수활동을 하다가 1933년 가을 3년 만에 귀국하여 10월 20일 서울공회당에서 음악회가 열었다. 이후 1938년 태평레코드사로 이적하여 <북극의 오천키로>를 불렀고, 한때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춘 뒤 갑자기 일본군 장교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일본 귀족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또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친일 행각에 앞장서 비행기 모금운동에도 참여하였고, 군국위문공연에도 적극적이었단다.
유차영 선임기자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