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칼럼] 복주머니

고석근

 

나 홀로 뭇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만물을 먹이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 노자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난 시절을 반추해보면 항상 좋은 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내가 말했다. “자기는 주머니가 비지 않는대, 돈을 꺼내 쓰면 다시 채워진대.”

 

내 사주팔자가 좋아서 그렇단다. 내가 소박하게 살아서 그런지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아왔다. 돈을 꺼내 쓰고 나면 다시 채워지는 복주머니. 마음껏 돈을 써보지 않아 많은 돈을 써도 반드시 다시 채워지는지는 모르겠다.

 

독일의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에는 돈을 아무리 쓰도 다시 채워지는 복주머니가 나온다. 주인공 슐레밀은 회색 옷을 입은 신사에게 신기한 복주머니를 받고 자신의 그림자를 판다.

 

자신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마음껏 돈을 쓰며 행복하게 잘 살아갈까?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를 자아의 또 다른 측면으로 본다. 자신 안의 어두운 또 다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 꽁꽁 숨겨놓는다. 슐레밀은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아예 없애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빛이 있는 세상에서 그림자 없이 사는 게 가능한가?

 

이 세상에는 가끔 악마들이 출현한다. 꽁꽁 숨겨놓은 그림자가 의식의 방어막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이다.

 

그림자가 없는 슐레밀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다. 회색 신사에게서 복주머니를 얻은 슐레밀은 대저택으로 이사를 가고 많은 하인을 부리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백작으로 불리게 된다.

 

그는 자신을 무거운 파문을 당한 제후, 추방당한 높은 군주로 생각하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그림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그녀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폭풍우처럼 눈물을 쏟는다. 그녀의 아버지가 격분해서 소리친다. “당신은 전례가 없이 뻔뻔스럽게도 내 딸, 내 아내, 그리고 나를 마음껏 속였군요.”

 

그의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곁을 떠나가기 시작한다. 충직한 하인 벤델만이 그의 곁에 남아 그를 끝까지 지킨다. 슐레밀이 그림자를 판 지 1년이 되던 날, 회색 옷의 신사가 슐레밀을 찾아와 서류 한 장을 내민다.

 

양피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서명의 효력으로 영혼이 육체를 떠난 후에 내 영혼을 이 서류의 소유자에게 양도한다.’ 회색 신사는 말한다. “서명하시면 그림자를 다시 되찾게 됩니다. 연인의 손을 잡을 수 있고, 당신의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는 거절한다. ‘영혼을 그자에게 양도하면 앞으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니까.’ 슐레밀은 삶의 진실을 깨닫는다. ‘경솔하게 정도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르는 사이에 다른 길로 접어들어 계속 아래로 빠져드는 법이다... 나는 필연을 지혜로운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

 

슐레밀은 복주머니를 절벽 아래로 내던지고는 악마에게 소리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지금 당장 꺼져라!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그는 그림자도 돈도 없었지만 편안해졌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자신이 사회에서는 쫓겨났지만, 항상 사랑하던 자연에 의탁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그림자는 그의 허영심이었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망상. 그의 그림자를 팔았다는 건, 그가 그의 그림자를 무시하고 살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어두운 한 부분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그에게는 밝은 한 부분도 사라진다. 둘 다 그 자신이니까.

 

그는 자연 속에서 자신을 회복해간다. 그는 지구에 관한 지식, 그 형태, 높이, 기온, 대기의 변화, 지구상의 생물, 식물계의 생명 현상을 깊이 알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야 알았던 것이다. 자연 자체가 생명수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복주머니라는 것을.

 

노자가 말하는 만물을 먹이는 어미는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먹을 것을 준다.

 

아마 걸어오셨나보군요

그렇게 숨이 차신걸 보니

그래서 3월님, 잘 지내셨나요?

다른 분들은요?

자연은 잘 두고 오셨나요?

, 3월님, 바로 저랑 이층으로 가요

말씀드릴게 얼마나 많은지요

 

- 에밀리 디킨슨, <3> 부분

 

시인은 반갑게 삼월을 맞이한다. 봄은 만물을 가꿀 것이다. 새싹이 돋고 가지가 뻗고 꽃을 활짝 피우고 열매를 가득 맺히게 할 것이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6회 민들레 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

 

 

작성 2022.03.31 11:33 수정 2022.03.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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