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칼럼] 인명풀이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

최규성

임성태자(琳聖太子)’는 일본 오우치(大內) 가문의 족보에만 전해져오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일본서기같은 책에는 실려있지 않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

 

먼저 백과사전 등에서 임성태자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내용을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임성태자(琳聖太子, 577~65711(오우치 가문의 주장, 생몰년도 미상)는 일본 오우치씨의 족보에 등장하는 남부여의 귀족으로, 조선왕조때 만들어진 간양록과 지봉유설, 난중잡록 등의 기록이 전부다. 성씨는 부여(扶餘), 이름은 의조(義照). 14세기 일본 유력 호족인 오우치씨 족보에 따르면 611년 한반도에서 건너와 스오 국(周防國) 타타라하마(良浜)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외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 모양으로, 임성태자가 무령왕의 손자로 성왕의 제 3왕자라는 주장과 위덕왕의 셋째 아들라는 등, 오우치 씨의 분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와 마찬가지로 가짜 인물이 아닐까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에는 기록이 없으나 1398(조선 정종 1) 7월 일본 슈고 다이묘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조선의 조정에 '성왕의 3자 임성태자가 자신의 선조임을 확인해달라'는 공문의 기록이 있다. 여의조(餘義照, 余義照)라고도 하고 다치바나 도요히(橘豊日)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제2대 정종 1(1398) 710일 기사에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조선의 조정에 요청한 내용이 나오고, 6대 단종 1(1453) 624일 기사에도 일본국 대내전(大內殿)의 사자 유영(有榮)이 조선의 문헌이나 자료 중에 혹시 임성태자에 관한 기록이 있는지 확인을 좀 해 봐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해당부분을 발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국(日本國) 대내전(大內殿) 사자(使者) 유영(有榮)이 예조(禮曹)에 글을 올리기를,

"다다량씨(多多良氏)가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갔는데, 그 까닭은 일본에서 일찍이 대련(大連) 등이 군사를 일으켜 불법(佛法)을 멸()하고자 하였고, 우리 나라 왕자 성덕 태자(聖德太子)는 불법(佛法)을 높히고 공경하였기 때문에 교전(交戰)하였으므로 이때 백제국왕(百濟國王)이 태자 임성(琳聖)에게 명하여, 대련(大連) 등을 치게 하였으니, 임성(琳聖)은 대내공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덕 태자(聖德太子)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서 주군(州郡)을 하사한 이래로 그 거주(居住)하는 땅은 대내공 조선(大內公朝鮮)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대내 후손(後孫)의 부정(否定)이 있지만 기로(耆老)542) 가운데 박식하고 통달한 군자가 있어서 그 계보(系譜)가 상세합니다. 대련 등이 군사를 일으킨 때가 일본국 경당(鏡當)543) 4년인데 수()나라 개황(開皇)544) 원년(581)에 해당하니, 경당(鏡當) 4년에서 경태(景泰)545) 4546) 까지가 모두 873년입니다. 귀국(貴國)에는 반드시 임성 태자(琳聖太子)가 일본에 들어간 기록(記錄)이 있을 것입니다. 대내공의 식읍(食邑)의 땅은 대대로 병화(兵火)로 인하여 본기(本記)를 잃어버리었고, 지금 기록한 것은 우리 나라의 남은 늙은이들이 구술(口述)로써 서로 전하여 왔을 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단종 1624

 

 

이들 기록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삼국사기삼국유사』 『일본서기등의 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수께끼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차자표기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임성(琳聖)”이라는 그 이름 풀이에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고 본다.

 

차자표기 분석의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1500년 전 삼국시대의 표기자 입장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먼저, 임성(琳聖)은 후대의 표기자에 의해 왜곡된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는 임성(林聖)이라 표기했는데 후대의 표기자들이 좀더 좋은 뜻을 가진 글자 으로 바꿔 쓴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순전히 필자의 억측일 뿐인지라 앞으로 좀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임성태자의 실제 이름이 [스블슬기/subur-surki]였을 거라고 본다. 원시어소 [/sur]+[/bur]을 합치면 [슬벌, 스블] 같은 형태로 발현된다. 이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하면 徐羅伐(서라벌), 徐伐(서벌)” 같은 식이 된다. 음차하지 않고 사음훈차하여 표기하면 ()”이란 하나의 글자로 차자해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어 수풀의 고형이 [스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 은 영어 wise의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에 해당하는 한국고유어는 [슬기]이다. 그러니까 [스블슬기]라는 이름을 으로 차자하여 林聖이라 적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후대의 기록자들이 더 의미가 좋은 글자로 바꿔 적는답시고 林聖琳聖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일본은 원명천황(元明天皇) 화동(和銅) 6(서기 713)에 이자호자령(二字好字令)이 시행됨에 따라 예전에 써오던 국명 지명 인명의 표기를 대부분 뜻이 좋은 글자로 바꾸거나 두 글자로 바꿔 적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이자호자화(二字好字化)의 경향은 기실 713년 무렵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의 단절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 펼쳐야 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이자호자화(二字好字化)를 목표로 설정하고 그러한 정책을 추진한 것은 아닐 터이다. 표기자가 누구냐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표기되어온 종래의 이름들을 통일시키는 작업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이왕 표기를 통일하는 김에 이자화(二字化) 호자화(好字化)를 위주로 하여 추진한 것일 뿐이라 생각된다. 어쨌거나 본래는 [스블슬기/subur-surki]라 부르는 이름을 사음훈차+진의훈차한 표기 林聖이었는데, 이후에 2, 3차표기자들이 뜻이 좀더 좋은 글자를 택해서 쓰느라고 琳聖으로 바꿔 표기하게 되었을 거라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백제 25대 무녕왕의 아버지인 昆支(곤지)”琨伎(곤기)”라 표기한 것 역시 비슷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은 첫째를 의미하는 []을 표기한 것이지만 곤충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해서 뜻이 좀더 좋은 으로 바꿔 적은 것이다.

 

사람들은 [슬블슬기][솔발슬기(소발슬기)]라고도 불렀고 그 [소발슬기]草拔聖枝(초발성지)’라고도 표기했다. 한국어에서 [/]는 그 음이 쉽게 부전(浮轉)되었다. 백제 제5肖古王(초고왕)素古王(소고왕) 혹은 速古王(속고왕)이라고도 하였고,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을 김흠춘(金欽春)이라고도 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소발슬기/초발슬기]의 부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聖枝[슬기]를 차자한 표기인데 [슬기]를 진의훈차한 표기이고, 는 끝소리가 [/ki]음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덧붙인 일잉자(溢剩字).

 

그러니까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비문에 새겨져 있는 임나왕족(任那王族) “초발성지(草拔聖枝)”가 바로 임성태자(林聖太子)”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진경대사탑비 비문은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관련분야 학자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으나 차자표기에 무지하다 보니 그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새 김씨이다. 그 선조인 임나왕족 [소벌슬기]는 매양 이웃나라의 침공으로 괴로워하다가 아국의 원조인 흥무대왕에게 투항했다.)”

 

진경대사 탑비의 맨 앞부분을 인용한 것인데 이 내용의 해석을 엉터리로 해온 것이다.

 

진경대사는 신라 54대 경명왕 때의 고승인데, 대사가 입적한 뒤 그 비문을 경명왕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비문의 내용은 신빙성이 아주 높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진경대사의 선조는 임나왕족이었는데 신라에 항복했으며 그 먼 조상은 흥무대왕 김유신이라는 식으로 엉터리 해석을 해왔다. 원문을 제대로 파악하고 보면 초발성지(=[소발슬기])가 투항한 대상이 아국(=신라)의 원조인 흥무대왕 김유신이라는 얘기인데, 뭐가 뭔지 잘 모르다 보니 마치 진경대사의 먼 조상이 김유신인 것처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심지어는 초발성지(草拔聖枝)’가 사람이름을 차자표기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성스러운 가지에서 풀을 뽑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서기효덕기 6년 백치 원년(650)조 기록에 보면 혈호국사 초벽련추경(穴戶國司 草壁連醜經)이 흰꿩(白雉)을 바쳤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 나오는 초벽추경(草壁醜經)”도 임성태자와 같은 이름을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초벽추경(草壁醜經)쿠사카베노무라지시코부(くさかべのむらじしこぶ)”라고 읽고있지만 이는 잘못 읽는 것이다. 본래 [스벌슬기]라 일컬었던 이름을 일본인들이 [쇼베수키]라 여겨 草壁醜經이라고 음차하여 적은 것이므로 그대로 음독해서 쇼베슈케이(そうべしゅうけい)”라고 읽어야 올바른데, 그 사실을 모르는 후대의 일본인들이 멋대로 훈독을 하여 쿠사카베시코부라고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草薙劒(초치검)이니 天蠅斫劒(천승작검)이니 하는 칼의 이름이 실려있는데, 이 칼들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草薙劒(초치검)쿠사나기노쓰루기(くさなぎのつるぎ)”, 天蠅斫劒(천승작검)아메노하하노키리(あめのははのきり)”라 하는데 둘 다 엉터리로 읽고있는 것이다.

 

草薙劒()벨 치자이다. 풀 따위를 베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이니, [/]을 사음훈차한 글자이다. , [소벨스루기]草薙劒이라 쓴 것이므로 일본어에서도 소우베쓰루기(そうべつるぎ)”라고 읽어야 올바르다.

 

天蠅斫劒()[/sor]을 진의훈차한 글자다. 고대한국어로 하늘이나 하늘처럼 높은 것을 가리켜 [/sor]이라 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이나 우주를 가리키는 일본어 소라(, そら)’도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말이다. 그리고 ()파리 승자이고, ()벨 작자이다. 풀이나 나무를 베는 것을 이라 한다. 그러니까 [], [파리], [], [쓰루기(つるぎ)]를 차자한 것이다. 당시 임나지역 사람들이 [솔팔스루기, 솔벨스루기]라 일컬었던 이름을 天蠅斫劒이라고 차자하여 적었다는 말이다. 초치검(草薙劒)이나 천승작검(天蠅斫劒)은 동일한 이름 [sorbur-surki]를 차자방식만 달리하여 표기한 것으로 사실상 임성(林聖)”이나 초발성지(草拔聖枝)”와 동일한 이름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무훈(武勳)이나 무용담(武勇談)을 좀더 돋보이도록 신물화(神物化)하여 신령스런 칼처럼 묘사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스블슬기]라는 이름을 林聖이라 표기하다가 앞글자 하나만 살짝 바꿔 琳聖이라 표기한 것이 일본 오우치(大內)가문의 족보에 남아있는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이고, 이는 일본서기효덕천황기에 나오는 혈호국사 초벽추경(草壁醜經; 소베슈키)”과도 같은 이름이며,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비문에 새겨져 있는 임나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와도 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신검(神劍)처럼 묘사되어 있는 초치검(草薙劒)”이나 천승작검(天蠅斫劒)”[소벨스루기] 혹은 [솔파리스루기/솔벨스루기]를 차자한 표기로 임성태자의 활약상을 신격화한 표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임성태자(琳聖太子)---출전; 오우치(大內)가문 족보

[스블슬기/subur-surki]林聖이라 차자함.

후대인들이 林聖琳聖이라고 표기함.

 

초발성지(草拔聖枝)---출전;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탑비

[소발슬기/sobar-surki]草拔聖枝라 차자함.

[소발/소벌] 음의 부전, [초발/소발] 음의 부전.

안토군(安菟郡)은 아나토(あなと, 현 나가토)를 가리킴

 

초벽추경(草壁醜經)---출전; 일본서기효덕기

[소베수키/sobe-suki]草壁醜經이라 차자함.

혈호국(穴戶國)은 아나토(あなと, 현 나가토)를 가리킴

 

초치검(草薙劒)---출전; 일본서기신대기

[소벨스루기/sober-suruki]草薙劒이라 차자함.

[/()]로 차자.

 

[]로 차자. (한국어)

[쓰루기(つるぎ)]으로 차자.(일본어)

 

천승작검(天蠅斫劒)---출전; 일본서기신대기

[솔파리스루기, 솔벨스루기]天蠅斫劒이라 차자함.

[]으로 차자.(한국어)

 

[파리]으로 차자.(한국어)

[]으로 차자.(한국어)

[스루기]으로 차자.(일본어)

 

이들 표기는 저마다 다르게 되어 있지만 모두 동일한 인물의 이름을 차자방식과 한자만 다르게 하여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와 혈호국사 초벽추경(草壁醜經)”, 그리고 진경대사 탑비에 대사의 선조로 기록되어 있는 임나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는 모두 동일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얘기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보검처럼 묘사되어 있는 초치검(草薙劒)”천승작검(天蠅斫劒)”역시 같은 [sobur-surki]를 차자만 달리한 표기로 사실상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이고 동일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임성태자(琳聖太子)를 백제 성왕이나 위덕왕의 셋째아들로 추정하였으나 필자는 큐슈 구마모토 남쪽 구마나리(球磨川) 하류 야츠시로(八代)시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큐슈백제(=백제담로)의 통치자 경행천황(景行天皇)의 아들이거나 손자일 것으로 추측한다. 야츠시로(八代)시에는 지금도 센단마치(栴檀町)라는 지명이 쓰이고 있는 바, “센단(栴檀)”이라는 지명은 서기 562년 임오년 신라 이사부와 15세의 어린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격파했다는 전단성(栴檀城)”과 똑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어로 [오우치(おうち)]라 하는 말을 한자로 大內(대내)’라고도 쓰지만 栴檀(전단)’이라고도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본 오우치(大內) 가문의 조상은 본래 큐슈 남쪽 구마강 하류에 있는 야츠시로(八代)시 일대의 전단성(栴檀城)을 통치하던 경행천황(景行天皇=오타라)이었는데, 서기 562년 임오년 신라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의 공격으로 전단성이 함락되자 그 후손들은 야마구치(山口)의 다다라하마(多多良浜, 防府市) 지역으로 건너갔고, 그 곳에 정착한 후 [소벌슬기]라는 인물이 세력을 키워 한동안 아나토(穴戶)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으나, 660년 한반도의 본국백제 멸망과 안담비라부의 백강전투 패전에 이어 668년 고구려까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소벌슬기]는 어느 쪽에 항복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신라 김유신에게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가 바로 일본서기효덕기에 보이는 혈호국사 초벽추경(草壁醜經)”이고, 동시에 진경대사 탑비에 새겨져 있는 임나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라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추정은 단지 고대인명의 차자표기 분석을 바탕으로 한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종합적이고 본격적인 연구 검토가 진행되면 보다 분명하게 밝혀지리라 믿는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


작성 2022.04.03 10:29 수정 2022.04.0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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