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제법 누그러졌다. 가끔은 새치름하게 변덕도 부리지만 미세먼지의 소란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이다. 황사, 매연, 중금속, 미세먼지까지 귀가하면 반드시 손 씻기나 샤워를 해야 하고 마스크도 성능표시를 보고 사야 하며 자주 갈아야 한다. 게다가 더 무서운 코로나바이러스도 덮쳤으니 갑자기 세상에 난리가 났다. 하기야 인간이 당하기에 갑작스러운 것이지 틈이 난 둑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닌가.
코로나19에 조금 가려진 듯해도 따지고 보면 환경문제는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다. 뉴스에선 연일 환경오염을 떠들고 각종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세플라스틱의 오염, 오존층의 파괴, 빙하의 급격한 유실, 최상위권 생명체의 중독, 인류의 질병 등에 이르기까지 경고를 하지만 그 심각성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로 인한 대홍수, 슈퍼허리케인, 해수면 상승, 에볼라, 사스, 메르스, 코로나 등의 창궐이 자연을 무차별하게 남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에 반하는 에코산업과 그린식품, 기후협약준수, 친환경으로의 복귀 등이 작은 탈출구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자기 나라의 이해타산에만 매달려서 그 효과는 미미하다.
친환경 지구촌실현이 절실히 요구되는 세상이다. 바쁜 일정을 쪼개서 독일의 서부에 있는 도르트문트 엠셔 강가의 예쁜 호텔에 닿았다. 오후에 그림 같은 강물을 따라 설레는 마음으로 산책에 나섰다. 본류인 루르강이 만나는 아우라지에 이르면 경치는 극에 달한다. 독일 재생사업이 여기서부터 일어났고 ‘그린 메트로폴리스 즉 생태도시’로 거듭난 결과물이다. 엠스운하와 아우라지, 숲과 자연의 공원도시를 감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겉보기는 자연을 훼손한 대가로 쓰레기더미 위에 복구한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다.
꿈같은 시간이 흐르고 프런트에 돌아오니 다소 친해진 늘씬한 샌디칼라의 지배인이 찾는다. 그녀는 한낱 이방인에게 독일의 상징인 노랑 바탕에 검정줄 무늬가 있는 도르트문트팀의 유니폼과 주말 리그전 티켓을 선물로 준다. 동서양 어딜 가나 단골을 반기는 정서에는 꾸밈이 없이 자연스럽다. 이런 진면목이 진정한 자연을 닮은 모습이다.
자연에 역행하지 사상은 일찍이 동양철학의 근간이었다.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 또는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태도 더 나아가 속세의 삶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의미하는 철학으로 노자의 도덕경에 이 무위자연설이 처음 나온다. 후세의 장자도 이를 이어받았으니 소위 유가사상에 대응하는 중국 양대 철학의 하나로 노장사상이라 일컫는다. 건드리지 않으면 버릴 것도 오염도 훼손도 없으니 재생할 것도 없다.
그러나 버리더라도 재생만 완벽히 한다면 환경오염문제는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암시하는 기호가 뫼비우스의 띠이다.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는 십팔 세기에 이차원의 띠를 꼬아서 서로 다른 단면을 맞붙인 무한궤도를 제시하였다. 이 띠는 안팎의 구분이 없어서 한쪽 면을 출발하면 면의 앞뒤 구분이 없이 연속해서 반복되므로 무한히 이어진다. 맞붙이기 전의 양면은 특성이 다르지만 붙인 후에는 재생처럼 같은 성질을 지니게 된다.
조세희가 쓴 단편 연작소설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첫 단편이 뫼비우스의 띠이다. 문학 측면에서 바라본 현상이어서 과학적인 접근과는 의미가 다소 불일치하지 않는 면도 없진 않다. 그러나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인 선과 악의 대립처럼 인간의 양면성이 공존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고발한 글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삶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주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그린 기본 도안을 흔히 볼 수 있다. 항상 마주치는 수많은 상품의 포장재나 분리수거함 등에 표시해놓은 반 바퀴 꼬여있는 삼각형 화살기호가 바로 그것이다. 잘 알고 있듯이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식별기호로 무한재생과 활용을 뜻한다. 물론 잘 지켜질 때의 환경보호 차원의 일면이기는 하지만.
낚시를 가는 날은 반드시 접이식 삽과 종량제봉투 몇 종류는 꼭 챙겨 넣는다. “무얼 그리 많이 자시기에” 하면서 누가 물어봐도 그냥 웃고 만다. 소위 포인트가 되는 주변은 이미 오염 정도가 심해서 남은 떡밥이나 음식물과 쓰레기 등 일대를 대청소를 하다보면 무얼 하러 왔는지 아리송해진다. 그래도 이곳은 나의 자존심이 걸린 명소이므로 깨끗이 치우고 나서야 석양에 비친 강물이나 바닷가가 반가워하는 것 같다. 그러고 나서야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낚시 놓을 채비를 차린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한결 맑아진 마음으로 손맛을 본 물고기는 간단한 인사와 인증샷을 남기고는 살아오던 곳에 조용히 놓아준다.
자연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 자연 그대로의 삶을 위해 누군가는 남몰래 흘리는 지구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 어느 책에서 보듯이 “부인은 왜 매일 표도 안 나는데 주변을 청소하시나요?”, “이만큼은 지구가 덜 지저분해지니까요.” 부인의 대답이 말이 될까만은 무위자연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특히 이러한 환경오염의 결과로 야기되는 크고 작은 경고들이 지구 대참사의 전조를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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