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유스 / 이한령 기자] 지중해 시추권 및 에게해 홍보 문제를 두고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유럽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24일(현지 시각) 로잔 평화 조약 99주년 기념 대국민 담화에서 튀르키예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로잔 평화 조약과 함께 우리의 국경이 그어졌고 조건부 항복이 폐지되었으며 그리스에 남아있는 튀르키예 소수민족의 권리가 보호되었고 우리 해안에 인접한 그리스 섬들의 비무장 상태가 확립되었”으나, “최근, 조약에 명시된 조건들이 그리스에 의해 무시되거나 의도적으로 침해되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한일관계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적대적인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앙숙 관계는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양국은 반세기 가량 두 국가 사이의 바다 에게해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1970년부터 이어지던 분쟁은 2018년 튀르키예가 지중해의 그리스 영해에 천연가스 시추를 위한 시추선을 보낸 것을 발단으로 재점화 되면서 현재까지 비난과 독설이 가감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관계
1453년 천 년의 제국 동로마가 멸망하고 새로운 이슬람 패권국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반도(현 터키 영토)를 점령한다. 넓은 영토와 다양한 민족 및 종교인들을 거느렸던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millet) 제도를 통해 통치했다. 밀레트 제도는 하위 단위의 지역들은 각 지역의 종교적 지도자가 다스리면서 세금을 걷으며, 이를 총독들이 총괄하는 자율적 통치 방식이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에서는 종교와 민족의 자유와 공존이 보장됐고, 로마의 후예 그리스인들 또한 기독교 정교회 공동체에서 보존한 그리스의 정신, 문화, 언어와 정체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독립을 꿈꿀 수 있었다.
17세기 계속되는 패전으로 군사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오스만 제국이 영토 보전을 위해 비(非)무슬림에 대한 세금을 올리고 종교 박해를 가하자 이민과 반란이 잦아졌다. 이 기회를 틈타 그리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고 그리스 왕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후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멸망의 길에 들어선다. 1차 대전에서 승전한 영국, 프랑스, 아르메니아 등 협상국은 점령 및 영토 분할을 위해 오스만 제국에 진입한다. 그러나 한 명의 튀르키예인의 등장이 판세를 뒤집게 된다.
협상국의 진입에 대한 국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던 오스만 제국의 장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혁명을 선언하고 협상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여 판세를 뒤집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후퇴했으나 그리스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전투를 벌였고, 1923년 이스탄불 및 현 튀르키예의 유럽 영토인 서부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의 섬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한 로잔 조약을 체결하고 터키 공화국이 건립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냉전이 시작된 후 두 국가는 NATO 가입국이자 자유진영의 동료로서 독립전쟁이 쌓아올린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화해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5년 그리스 극단주의 단체가 튀르키예인과 그리스인이 함께 살던 사이프러스가 그리스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국 관공서를 테러하고 그리스가 UN에 사이프러스의 자결권을 요구하면서 튀르키예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뒤이어 의문의 주 그리스 튀르키예 영사관 폭탄 테러가 발생해 국부 아타튀르크의 생가가 손상을 입는다. 분노한 튀르키예인들은 보복으로 이스탄불에서 그리스 소수민족을 약탈, 폭행하는 ‘이스탄불 포그롬’ 사태를 벌였고, 이후 한국과 일본과 마찬가지로 애증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지중해 문제
'이스탄불 포그롬' 사태 이후 위태롭던 튀르키예-그리스 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사건이 있다. 바로 1974년 '사이프러스 전쟁'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섬이라고 알려진 사이프러스는 튀르키예 아래 지중해에 위치한 섬나라다. 사이프러스 또한 동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오스만 제국 영토로 흡수되었고, 19세기부터 대영제국의 실질적 지배를 받다가 1960년 사이프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사이프러스에는 다수의 그리스인과 일부 튀르키예인이 공존하며 살았는데, 1960년 이후 하나의 그리스를 지향하는 그리스 강경파들과 군부가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튀르키예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결국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은 사이프러스의 강제 합병을 위해 대통령을 교체하고 군대를 파병했고 이에 튀르키예는 자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사이프러스를 침공했다.
튀르키예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사이프러스군, 시민군 및 일부 그리스군을 초토화시키고 한 달 만에 섬의 북부를 장악했다. 그리스의 남사이프러스와 튀르키예의 북사이프러스는 끝내 합의하지 못했고 1983년 북사이프러스 튀르크 공화국이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현재까지 북사이프러스 공화국은 튀르키예만이 인정하는 미승인국이다.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지중해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2018년 에르도안 정부는 북사이프러스 영해로 시추선을 보내 매립된 천연가스를 탐사했다. 그리스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스에게 북사이프러스 공화국은 튀르키예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미승인국이며, 따라서 북사이프러스 영해 또한 사이프러스의 것이라는 입장이다. 지중해에는 약 2조㎥ 이상의 천연가스와 17억 배럴의 석유가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는 1년에 약 436억㎥의 천연가스와 7억 배럴을 소비한다. 석탄 석유 자원에 의존하고 에너지 자원 수입율이 높은 튀르키예에게 지중해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기회인 이유이다.
튀르키예는 리비아와 동지중해 배타적 경제수역(EEZ) 경계 확장 협상을 타결하면서 지중해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는 자국령 크레타섬의 영해가 침범된다는 이유로 협정의 무효를 주장하고, 튀르키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집트와 튀르키예-리비아 EEZ와 겹치는 새로운 EEZ 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는 2021년 튀르키예인과 문화를 뜻하는 '튀르크'와 에게해의 이름을 합친 'Turkaegean'(튀르키지안) 상표를 등록해 관광 홍보에 사용하면서 이미지 변화를 통해 그리스의 에게해 독점을 막고 경제수역의 당위성을 확립하려는 노력 중에 있다.
유럽이 튀르키예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는 이유
튀르키예는 EU의 규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원 전쟁과 홍보 전쟁을 이어가며 로잔 조약으로 빼앗긴 지중해를 재차지하기 위해 그리스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EU는 'Turkaegean'에 대한 상표 등록을 승인하고 지중해 문제에 대한 튀르키예 제재를 검토만 하는 등, 회원국 그리스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개입에 미적지근한 입장이다. 일개 EU 가입 승인 대기 국가의 횡포에 27개국이 꼼짝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통로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은 튀르키예를 NATO의 핵심 회원국으로 성장시켰고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두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또한 강력한 군사력과 적극적인 외교정책 기조를 바탕으로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다양한 국가와 깊게 얽혀있고 중재국을 자청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EU로서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회원국 그리스를 위해 튀르키예로부터 등을 돌리고 적대하기 껄끄러운 상황이다.
또한 튀르키예는 시리아 난민 및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최대 규모로 수용하고 있으며, 2016년 EU와 지원금을 받는 대신 국경을 차단해 난민들의 유럽행을 차단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2016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튀르키예에서 인권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자 EU는 협정에서 약속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튀르키예는 난민들에게 그리스로 향하는 국경을 일시적으로 열어 EU를 강하게 압박했다. 유럽은 튀르키예라는 위태로운 댐이 터져 난민의 홍수가 밀려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권의 적극적인 외교 정책, 중동, 발칸, 유럽에 대한 영향력 증대, 난민 문제, 지리적 중요성 이 네 가지 특성은 튀르키예에게 서방 진영의 보편적 가치를 위반하거나 심기를 거스르더라도 누구도 쉽게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하는 방패를 들려주었다. 내년 6월 튀르키예에서 대선이 치러질 예정이다. 2003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첫 재선 도전이지만 처음으로 여론조사에서 밀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튀르키예가 굳건하고 현 정권이 잘해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에르도안에게 그리스를 꺾고 에게해로 진출하는 것은 자원, 관광, 홍보, 민심을 모두 잡을 매력적인 카드다. 지중해 문제는 이제 그리스-튀르키예, EU-튀르키예 분쟁으로 번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튀르키예의 국제정치학적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의 스웨덴, 핀란드 NATO 가입 거부 사태로 인해 유럽의 튀르키예에 대한 신뢰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지중해를 두고 펼쳐지는 EU 대표단 그리스와 오스만의 후예의 팽팽한 대치, 최종적으로 누가 지중해를 움켜쥐고 발칸과 흑해의 패권에 한 걸음 더 다가설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