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코스모스 연가(戀歌)

이태상

 

청소년 시절 셰익스피어의 ‘오셀로(Othello, 1565)’를 읽다가 그 작품 속의 주인공 오셀로가 악인 이아고에게 속아 넘어가 선량하고 정숙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 증오와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목졸라 죽이면서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란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사랑이라고?

사랑은 무슨 사랑?

사랑과 정반대를 한 것이지.

사랑이란 말 자체를 모독하고

사랑이란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진실을

더할 수 없이 모욕하고 모독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격분해서 씩씩거렸다. (아직도 좀 그렇지만…)


오셀로가 진정으로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를 사랑했었다면 첫째로 그가 경솔하게 부인을 의심한 것부터 잘못이다.

 

둘째로 그가 진정으로 부인을 사랑했었다면 설혹 그녀가 정부와 정을 통하고 있는 현장을 자기가 직접 제 눈으로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기가 물러나 부인을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내 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셋째로 그가 자신의 경솔했던 잘못을 깨닫고 자살이란 간편한 방법으로 쉽게 책임 회피, 현실 도피를 하고 말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부인이 못다 살고 간 몫까지 합해서 몸은 죽고 없는 혼이라도 함께, 그야말로 한 몸, 한 마음, 한 영혼으로 한데 뭉쳐 아무리 괴롭더라도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살았어야 하리라. 이렇게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또 언젠가 미국 음악 영화 ‘로즈 마리(Rose Marie,1936)’를 보다가 그 끝 장면에 나는 무릎을 치면서 그 스토리의 결말이 좋아 쾌재(快哉)를 불렀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제 속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밖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우리 모두 각자가 저마다 거울처럼 바깥 세상에서 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백인 기마대가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 부락을 습격,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죄다 학살했는데, 어떻게 한 어린 소녀가 살아 남은 것을 이 기마대 상사가 거둬 자식처럼 키웠다. 그러나 이 아이가 커서 아름다운 처녀가 되자 상사는 이 처녀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인디언 처녀는 상사 아저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하면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상사 아저씨가 원하면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처녀는 뜻밖에 어떤 젊은 사냥꾼을 만나 둘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상사 아저씨를 저버리고 이 사냥꾼을 따라나설 수 없어 고민하는 처녀를 상사 아저씨가 제일 좋은 말에 올려 태우고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쳐서 처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에게로 보내준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내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았었다. 만약 기마대 상사 아저씨가 제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인디언 아가씨를 잡아두고 결혼까지 했었다면 결국 아가씨도 사냥꾼도 불행하게 만들고, 불행한 아가씨와 사는 자기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가 없었을 텐데, 자기가 사랑하는 아가씨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녀를 보내 줌으로써 한 쌍의 젊은이들이 행복했을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사랑한 아가씨가 행복하리라는 확신에서 또 그녀의 행복을 계속 빌어 주는 마음으로 제 가슴이 늘 아리고 저리도록 흐뭇 짜릿하게 그 자신 또한 행복하였으리라고.

 

청소년 시절 내가 보게 된 또 하나의 미국 영화 서부활극 ‘셰인(Shane, 1953)’이 나는 너무 너무 좋았다. 총잡이 셰인이 총잡이 생활을 청산하고 길을 가다가 머물게 된 어느 시골 농촌 마을에서 선량한 그 마을 사람들이 일단의 악당으로부터 온갖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안 잡겠다던 총을 다시 잡아 혼자서 여러 명의 총잡이 악당을 통쾌하게 해치우고 떠나가는 스토리였다.


어느 농가의 어린애와 잠시지만 친하게 지내면서 그 아이의 엄마, 농부의 아내가 보내는 사모의 정 어린 시선을 뒤로 하고 그 농부 가정의 행복을 빌며 냉정히 떠나가는 끝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이가 뒤쫓아가며 “셰인, 셰인” 부르는 소리가 먼 산울림으로 메아리치고…

 

그 영화 스토리에서와 같은 환경에 태어났었다면 나도 바로 그 주인공 셰인 같이 행동했으리라고 공명, 공감했었다. 하기야 그 당시 그 영화를 본 친구들과 가족까지도 (젊었을 때) 내 외모나 성품이 셰인 역을 맡은 배우 알란 랏드(Alan Ladd 1913-1964) 같다 했었으니까. 하하...

 

어쩜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와 돌이켜 봐도, 내가 살아온 삶이 아닌게 아니라 셰인과 좀 비슷한 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군복무 시절이나 직장생활에서도 셰인처럼 나도 조용하면서도 당차게 ‘일조 유사시’엔 마치 ‘일기당천(一騎當千)’하듯 ‘악당’을 멋있게 해치웠고, ‘억강부약(抑强扶弱)’했지 ‘자전거 타듯’ 강자나 윗사람에게는 고개 깊이 숙여 ‘네, 네’ 절절 굽신거리면서 아랫사람 약자를 짓밟고 못살게 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우리 생각 좀 해보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남을 밟고 얼마나 높이 올라 설 수 있는지, 또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얼마나 마음 편안한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지 않은가.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면 최선이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는 최소한 상대방을 괴롭혀 불행하게 하지는 말야야지. 이것이 차선지책(次善之策)이 아니겠는가.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실화가 있다. 미국에 이민 온 인도 가정의 이야기다. 딸이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가 다른 청년을 사랑하게 되어 집을 나가 그 청년과 살다가 이 사실이 친지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자 아버지는 딸을 찾아내 살해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가족의 ‘수치’ 라는 것이었다.

 

요 얼마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The Me Too movement)’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인도, 파기스탄 등 중동 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명예살인(honor killing)’이 자행되고 있다지 않은가. 아내나 딸 또는 누이가 성폭행을 당하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피해자를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 살해한다니 말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못한 가족이 자책하고 속죄할 일이지 어찌 피해자를 죽여버릴 수가 있을까.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한 급우가 연필 한 자루 ‘훔쳤다’는 의심을 받자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도적맞았다는 그 연필이 연필통에 있었는데 책상 서랍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고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옛날 ‘악법도 법’이라며 독약을 먹고 자살한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왔지만, 이 ‘자살’이란 최선(最善)은 물론 차선(次善)은 커녕 최악(最惡)의 해법(解法)이 아닐까?

 

전태일 열사처럼 분신 자살할 수밖에 없을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라도 죽기보다는 살아서 시지프스처럼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마지막 한 방울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가며 운명의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이 피와 땀과 눈물이 아롱아롱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피어올라 깜깜하던 카오스 같은 하늘에 아름다운 코스모스 무지개로 피어나는 것이리라.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하늘이 깜깜할수록 하늘에 별이 그 더욱 빛날 수 있으며 우리가 날리는 연(鳶)도 바람을 탈 때보다 거스를 때 가장 높이 뜨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듯이 사노라면 절대로 풀릴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도 스스로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 just wait and see. More often than not, things sort themselves out.

 

내가 직접 겪은 예를 하나 들어보리라. 대학 진학 때 어떤 전공과목을 선택할까 생각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대학 과정은 하나의 교양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학문적인 기반, 경제적인 기반, 사회적인 기반, 다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생은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다지만 그런대로 내 나름의 방향감각을 갖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항해해 보기 위해서는 나침반 같은 인생관을 무엇보다 먼저 확립해 봐야겠다고. 그래서 선택한 과목이 종교철학이었다.

 

대학 시절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반대, 돈키호테처럼 ‘일인거사(一人擧事)’를 도모했다가 수포가 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첫인상이 코스모스 같았던 아가씨와의 첫사랑에 실연 당해 나는 동해에 투신까지 했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한국에는 가는 곳마다 길가에 깨끗하고 고운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 길가는 나그네의 향수를 달래준다. 이때면 예외 없이 나는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아물어가던 가슴 속 깊은 상처가 도져 다시 한번 ‘코스모스 상사병’을 앓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병 조약에 의해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 국치(國恥)의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군에 가담하셨다가 만주로 떠나신 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다음에도 아무 소식 없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였을까,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나도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못지않은 애국 투사가 되었을 텐데 하면서 어린 두 주먹을 꼭 쥐고 작은 가슴을 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4.19세대가 되었다.

 

대학 다닐 때 선거 운동을 좀 한 것이 주목되었었는지 오래 전에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중진급 국회의원이시던 모 인사께서 나보고 자기 비서로 일해 달라는 청을 사절하고 독불장군처럼 나는 엉뚱한 일을 남모르게 혼자 추진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앞으로 우리 세계는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국제무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외국어를 아는 것이 ‘현대인’의 필수적인 상식에 속할 것으로 판단하고,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는 물론 일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자습했고,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대학에서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배웠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 나는 영-독-프랑스-스페인어를 다른 대학생들과 군 장성 및 회사 사장님들에게 개인교수도 했다.


때는 자유당 말기, 이승만 대통령이 독선적인 자아도취에 빠져 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었다. 초대나 2대만 하고 물러나셨다면 미국의 조지 워싱턴처럼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실 텐데 자신의 남은 여생을 그르치고 한국 역사의 바람직한 흐름을 망쳐 놓고 계신 것이 아닌가. 젊은 혈기에 나는 분통이 터졌다.


미숙하고 설익은 나이 탓이었겠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갖지 못할 직업이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첫째는 비서직, 둘째는 대변인직, 셋째는 대서나 대필업으로 얼마나 못났으면 제 일을 못하고 남의 심부름이나 하고, 제 말을 못하고 남의 말이나 옮기며, 제 글을 못 쓰고 남의 글이나 대신 써주랴 싶었다.

 

그러니 국회의원이라면 몰라도 국회의원 비서직은 직업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왕이면 대통령 비서 노릇을 해보리라. 그것도 대통령 비서직이 탐나서가 아니고, ‘호랑이를 잡자면 호랑이 굴게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 누구를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세간에 나도는 얘기로는 이 대통령께서 간신배, 모리배, 아첨배 무리들의 인(人)의 장막에 가려 민의(民意)와 세정(世情)을 제대로 살피시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내가 측근자가 되어 사심 없이 직언(直言)을 해보리라.

 

그래서 지금은 청와대라 하지만 그때는 경무대로 불리던 대통령 비서실의 의전비서가 되기로 마음먹고 당시 유력한 고위층 모모 인사의 천거까지 받았다.

 

한편 만일 계획대로 나의 간언(諫言)이 주효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나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는 날 서울 종로에 있는 고려당 빵집에 들렸다가 우연히 나는 한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아가씨는 너무도 코스모스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뒤를 밟아 신촌까지 따라가서 인사를 나누고 그 후로 우리는 몇 번 만나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 감상실에도 갔었다.

 

아가씨는 경남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약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9년 겨울 방학으로 부산에 있는 집에 내려가면서 아가씨가 내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 원서 한 권을 나는 받았다.

 

내가 추진하는 일이 성사되는 대로 부산으로 내려가 아가씨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개학해서 아가씨가 상경한 후 다음 해 2월 14일 성(聖) 발렌타인 축일(St. Valentine’s Day)에 ‘호수 그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 며칠 후 나는 증발되고 말았다.

 

갖은 고초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은신하면서 나는 나의 ‘코스모스 아가씨’에게 편지를 썼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나를 꼭 기다려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그냥 종이에다 펜과 잉크로 쓰기는 성의가 부족한 것 같고 성(性)에 안 차 나는 주사기로 피를 한 대접 뽑아 붓으로 창호지에다 혈서를 써 소포로 부쳤다.

 

이 혈서를 받아보고 질겁을 했는지 ‘코스모스 아가씨’에게서 자기를 잊어달라는 짤막한 답장이 왔다. 목숨을 걸고 무모하게 꾀하던 일이 틀어져 나락을 헤매면서도 ‘코스모스 아가씨’에 대한 사랑으로 간신히 버티어 오던 나에게 이 마지막 희망의 불빛이 꺼지자 너무도 깜깜 절벽 절망뿐이었다.

 

더 이상 살아 볼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어려서부터 미리 짜 놓았던 ‘마지막 코스’를 밟기로 나는 결심을 했다. 이 ‘마지막 코스’란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한 결과, 최악의 경우에 직면해서 내가 취할 수밖에 없는 ‘최후 조치’였다.

 

시험이고, 사업이고, 연애이고 간에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미지수인 결과에 전전긍긍하다 보면 불안감과 초조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 꼴이 안 되는 것 같아, 물론 최선의 결과를 희망 하고 기대하며 어떤 일이든 시작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처음부터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해 놓으면 ‘밑져 봤자 본전’ 격으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최악의 사태보다 더 나쁠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발상에서 나온 조치였다.

 

사사건건 일마다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는 것보다는 몰아서 한꺼번에 해두는 것이 더 유유자적하듯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아 나는 ‘최악 중의 최악’을 각오했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자폭하면 되지 않겠나?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죽어버리면 되겠지만,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할 때, 가령 내세가 있다고 가정해서 지옥하고도 그 지옥 맨 밑바닥까지 갈 각오만 되어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다 치고, 그럼, ‘최악 중의 최악’의 경우 어떻게 자살을 할 것인가? 나는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강구해 두었었다. 배라도 한 척 구할 수 있으면 인생 자체에 비유되는 망망대해로 노를 저어 가는 데까지 가다 죽으리라. 그렇지도 못하다면 그냥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가는 데까지 가다 죽으리라.


이것이 내가 선택한 나의 죽는 방법인 동시에 나의 사는 방법이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의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나의 결심과 의지였다. 이렇게 해서 마치 오래 비장했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뽑듯..

 

‘미치고

못난

놈이라

욕하셔도

바다

코스모스의

품에

뛰어

들겠습니다’

 

이런 유서를 ‘코스모스 아가씨’에게 띄우고 나는 동해바다에 투신했다. 정말 인명은 재천이었을까. 구사일생이 아닌 구십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으며 서울에 있는 ‘메디컬 센터’에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4.19가 났다.

 

하루는 신문에서 ‘코스모스’라고 한 4.19 의연금 기부자가 명단에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코스모스 아가씨’가, 내가 4.19운동에 관여 동참했다가 희생된 것으로 알고 나를 생각하는 추모의 정(情)이라고 단정, 나는 감읍(感泣)했다.

 

이 순간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나는 행복했다. 이 행복감을 만끽하면서 나는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 수술 받고 괜찮은 몸을 꾀병을 앓아 두 번, 세 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제일 좋겠고, 다시 깨어난다 해도 ‘코스모스’의 추억만으로 나는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면 내가 차라리 성불구가 되는 것이 편리하지 않겠나 하는 속셈에서였다. 척추 수술을 받으면 성불구가 된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자나 깨나 ‘코스모스’를 생각하면서 일 년 가까이 입원해 있던 어느 날, 다시 신문에서 이대 졸업반 학생들에게 앙케이트로 설문 조사한 여학생들의 결혼관에 대한 기사를 나는 읽게 되었다. 나의 ‘코스모스’도 졸업반이었다. 그 가운데 ‘결혼하지 않겠다’는 몇몇 학생의 말이 내 눈에 띄었다. 또 그중에서

 

‘남자의

생애가

너무도

모질고

비참한

것같아…

 

이 말이 내 가슴을 무섭게 쳤다.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데 죽은 줄만 알고 나를 못 잊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하는구나. 내가 참으로 못 할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한시라도 빨리 이 끔찍한 고통에서 ‘코스모스’를 해방시켜야겠다고 생각하니 나는 또 자신이 없었다. 혹 내가 이미 성불구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코스모스’ 앞에 나타날 수 없지. 성불구가 아니라도 아빠 구실, 아빠 노릇을 하는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심히 미심쩍었다.

 

그래서 나의 정충(精蟲) 정자(精子) 검사까지 해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나는 ‘코스모스’에게 편지를 썼다. 1961년 2월 14일 ‘호수 그릴’에서 만나자고. 이날은 집안 어른들도 그 자리에 나오시도록 한 터라 학교로 보낸 나의 편지를 ‘코스모스’가 받아보았는지 확인하려고 이대로 찾아 가 보았더니 편지를 수신자 본인이 찾아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는 그 편지를 되찾아 ‘코스모스’가 서울에서 거처하는 주소를 물어 찾아갔다.

 

그야말로 ‘착각은 자유, 망상은 바다’라고 만나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도 크게 착각, 얼토당토않게 터무니 없는 망상, 망념에 사로잡혀 온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코스모스’는 나와 헤어진 후 교제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고 했다.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고 돌아오는 나는 허탈감과 공허감에 빠져 눈앞이 아찔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죽었다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희열과 희망에 차 ‘코스모스’와 함께 할 한없이 보람되고 복된 아름다운 우리의 앞날을 꿈꾸었었는데…

 

스웨덴의 정치가로 국내 정치 무대 진출이 여의치 않자 국제 정치 무대에서 활약 196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전 유엔사무총장 닥 함마슐트(Dag Hammarskjold 1905-1961)처럼 나도 외교관이 되어 우리나라의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힘써 보리라는 포부와 야심으로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고등고시용 법률책들을 한 보따리 사 놓고 몸도 추스르고 요양할 겸 설악산에 있는 어느 절에 가서 행정고시 준비를 하기로 했었는데…

 

나는 자포자기 끝에 코르셋을 한 몸으로 자원입대, 의병 면제된 병역 의무를 ‘사서’ 군대 생활을 했다. (고시 공부하려던 책들은 다 불태워 버리고.)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나의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평생토록 코스모스를 그리워하면서 키워온 ‘코스미안 사상과 철학’도 싹트는 일이 없었으리라. 그러니 이래도 저래도, 얻어도 잃어도, 다 좋고 괜찮다고 해야 하리라. 가는 길이 오는 길 되고, 오는 길이 가는 길 되며, 저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말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코스미안'사상 창시


작성 2022.09.20 10:04 수정 2022.09.2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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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