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 무후사, 그 안에서 읽는 삼국지

‘젊어서는 삼국지를 읽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마라’


쓰촨성(四川省)의 성도인 청두(成都)에는 볼거리, 즐길 거리가 넘쳐난다. 발길 닿는 대로 어느 곳을 가도 여행지의 매력이 넘쳐흐른다. 무후사, 진리거리, 콴샹쯔거리, 판다기지 까지 천천히 둘러보고 즐기다 보면 하루가 빠르게 간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촉()의 수도였고 삼국시대 때는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이 도시는 여행자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중앙집권적 의식과 유교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4대 소설 중 단연 <삼국지>를 즐겨 읽는다. 지금도 소설, 만화 뿐 아니라 모바일 게임 등 <삼국지>와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들을 즐기고 있다.

 

청두에는 촉의 승상 제갈량의 사당이 있는데, 명나라 때 황제 유비의 묘와 합쳐 1,500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비가 주군이기 때문에 정식 명칭은 '한소열묘(漢昭烈廟)'이지만, 사람들이 유비보다 공명을 더 경모하기 때문에 공명의 시호 충무후(忠武侯)에서 따서 무후사(武侯祠)라고 부른다.


무후사 입구의 사자상. 어미와 장난치는 새끼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무후사에 들어서면 촉한의 영웅호걸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삼국지를 다시 읽는 듯 감회에 젖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유비를 기린 유비전(劉備殿)이 나온다. 유비전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명랑천고'(眀良千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명군양신, 유전천고'(眀君良臣, 流传千古)의 줄임말로, 명군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뜻이다.


'명랑천고'(眀良千古)의 '명'자를 자세히 보면 눈목 변의 밝을 명(眀)으로 쓰여 있다. 날일 변의 명(明)은 자연의 밝음이지만, 눈목 변의 명(眀)은 인지의 밝음으로 유비의 인덕이 더욱 빛났음을 의미한다.

 


 

유비전에는 유비의 황금상이 모셔져 있고, 벽에는 융중대의 액자가 걸려있다. 또 바로 옆 동에는 관우와 장비 등 문·무관 28인을 기념하는 동상이,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비는 가난한 집안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짜고 신발을 팔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유비의 황금상. 몰락한 한나라 황족의 후손인 유비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황건적의 난에 출정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면서부터다.

 

특이한 점은 유비상 오른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원래 유비전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아들 유선(劉禪)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유선상을 훼손해 버렸다. 한동안 새로 만들고 없어지기가 반복되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중건할 때 유선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유비상 왼쪽에는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침범하자 유선은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들고 나가 항복하려 한다. 유심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청두의 군사를 모두 모아 결사항전하려 했으나 유선과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심은 유비 묘를 찾아와 대성통곡한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촉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이룬 왕업을 손쉽게 내다버린 유선에 대한 청두 사람들의 반감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유약하고 무능했던 유선을 꾸짖는 듯한 후대인의 평가는 냉엄하기 짝이 없다.

 

유비의 손자인 유심상. 아들 때문에 아버지 유선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유비상이 있는 대청의 양 옆 방에는 관우와 장비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죽을 것을 결의한다. 비록 삼형제는 한날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대업 성취를 위해 전력투구한 그들의 기개와 절개는 지금도 무후사 유비전에 흘러넘친다.

 

유비전 대청과 이어진 좌우 긴 회랑에는 문신과 무장 28좌상이 있다. 문신상에는 염통을 위시하여 14명의 촉한 문신들이, 무장상에는 조자룡을 좌장으로 14명의 촉한 무신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실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한의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문 안쪽 바로 옆 벽면에는 출사표(出師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제갈량이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후주(後主) 유선에 바친 출사표는 고금의 명문으로 통한다. 후대 수많은 문인들이 출사표를 되새겨 남겼지만, 무후사의 출사표는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가 쓴 친필이다. 악비가 쓴 출사표는 처음에는 해서체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뒤로 가면 행서체로 바뀐다. 악비는 북방 유목민족에게 시달림을 당했던 남송의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기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써내려간 것이다.


악비가 쓴 제갈량의 출사표. 처음과 끝의 서체가 다르다.

 

 

무후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이다.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로 폐허가 된 무후사를 강희제가 직접 명령하여 대대적으로 중건, 확장한다. 중건 후 무후사는 크게 유비전과 제갈량전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통해 군신 합장사당의 특색을 갖추게 된다.


제갈량전은 유비전 바로 뒤에 있다. 화려하고 위엄 있는 유비전과 달리 상대적으로 고아하고 수수하다.
제갈량전 향로 끝을 붙잡고 서있는 촉한의 어린 군사 목에 감긴 주황색 머플러가 앙증맞다.
현판에 새겨진 명수우주(名垂宇宙). ‘이름이 온 우주에 널리 빛난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쓴 시의 한 대목이다.

 

제갈량전 안에 들어가면 제갈량상이 중앙에 앉아 있다. 오늘날까지 제갈량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것은 유비를 위한 무한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와 평소 생활에서 백성들을 아꼈기 때문이다. 전투를 벌여 적의 성을 함락하는 것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하는 위민(爲民)정책은 제갈량의 기본 통치철학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전쟁 포로를 인간적으로 처우하고 점령지 주민을 우대하여 짧은 시일에 촉한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후대인들이 제갈량전 안에 남긴 편액과 현판은 이런 제갈량의 애민(愛民)사상을 기리고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온후한 표정에 제갈건을 쓰고 제갈선을 들고 있는 모습은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제갈량은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 뒤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한다. 제갈량은 유언으로 "담을 치지 말고, 석물을 쓰지 말며, 모든 제물도 없이 하라."고 당부한다. 실제로 산시(陝西)성 딩준산(定軍山)에 위치한 제갈량묘는 명성에 비해 작고 단아하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위군에 포위당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돌파를 시도하다 결국 전사한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촉한의 군사(軍師)가 된 제갈량을 포함하여 3대가 촉에 대한 충성을 최후까지 다했던 것이다.

 

유비보다 더 인정받는 제갈공명,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역사 속 실제 제갈량도 과연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물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렇게 제갈량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가 불가능을 알면서도 어지러운 현실에 당당히 나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후사 제갈량전 뒤에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삼의묘 내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좌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묘당 마당에는 도원결의(桃園結義) 부터 유비의 죽음까지 삼형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사를 벽화로 전시하여 보는 이를 흥미롭게 한다.

삼의묘는 도원결의로 형제가 된 유비, 관우, 장비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소설 <삼국지>는 유비, 관우, 장비가 장비의 집 뒷마당인 도원에서 의형제를 결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75치의 키로 귀가 어깨까지 처지고 양팔이 무릎까지 닿은 유비, 키가 9척에 두 자나 늘어뜨린 수염과 붉은 얼굴에 누에눈썹을 한 관우, 8척 키에 표범 눈, 턱수염을 가진 장비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민중들의 심금을 울려왔다.

 

삼형제는 태어난 날은 달랐어도 훗날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죽기를 맹세한다. 그러나 10여년 가까이 홀로 형주(荊州)를 지켜왔던 관우는 유비의 무리한 북벌 명령과 위나라와 오나라의 협공으로 219년 여몽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게 된다.

 

관우의 부음을 듣고 반격을 서두르다 부하 장수들에게 목이 잘린 장비.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패전하고 돌아와 죽음을 맞게 되는 유비.

승리 가능성이 1%도 안 되었으나 유비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북벌에 나섰다가 오장원에 묻히게 되는 제갈량.

 

그들의 성공하지 못한 미완의 대업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다양하고 깊은 영감을 주며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


신성동진(神聖同臻)은 ‘숭고하면서 장엄함은 완벽히 갖춘 것’이라는 뜻으로, 결국 유비(劉備)를 칭송하는 말이다.

 

 

머리는 뤄양에, 몸은 당양에. 죽어서 신이 된 관우는 중국인들에게 의와 부를 상징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좋아하는 술 때문에 부하들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된 장비. 머리는 양쯔강 변에, 몸은 랑중(閬中)에 묻혀 있다.

 

 

삼의묘를 나와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 가는 붉은 벽담 사이의 길은 무후사의 숨은 진주다. 수백 년 된 대나무 숲 사이에 닦여진 길은 회색 돌바닥, 붉은 벽, 푸른 대나무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걷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길은 청두를 소개하는 선전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혜릉가는 붉은 돌담길을 걷다보면 담 너머 대나무 숲에서 판다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다.

 

무후사에 조성된 유비묘인 '한소열묘'(漢昭烈廟)1,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황릉이라 분위기가 엄숙하고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덤가는 숲길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세상에 기세를 떨쳤던 데 비해 무덤이 작은 편이다. 그것이 죽기 전 유비의 유지였다니, 후대의 존경과 사랑을 길이 받을 만하다.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높이 12m의 무덤 위는 나무와 덩굴이 무성하다.

 

유비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이릉(夷陵) 전투 때문이다.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대한 응징과 형주 탈환을 목적으로 대군을 동원해 오()나라를 침공한다. 촉한으로서는 삼국의 균형을 깨고, 삼국 쟁패전에서 역전을 기대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수였으나 오나라 육손이 유비군을 궤멸시킨다. 이 때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비는 63살의 나이에 병사하여 이곳 혜릉(惠陵)으로 이장된다.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한 황실의 부흥을 천명하고 황제로서 즉위하는 데 성공한 유비의 묘.
무덤에 손을 댄 도굴꾼이 줄지어 횡사하면서 1,7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혜릉. 감(甘)부인과 오(吳)부인도 같이 묻혀 있다.

 

 

작은 벽돌을 촘촘하게 원형으로 두른 담은 지난 쓰촨 대지진 때도 무사했다. 벽돌 하나하나 마다 벽공들 이름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는데, 벽이 허물어지면 벽공은 물론 그의 가족들의 목숨까지 담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벽공이 이름을 새긴 1,700여 년 전 그 순간의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장인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마음 한구석이 짠해온다.


묘를 두르고 있는 원형의 담이 인상적이다. 중국인들은 이곳에 마실 오듯 들러 봉헌하고 산책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무후사 담 너머는 비단길이라는 뜻을 가진 진리(錦里)거리다. 촉나라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재현한 곳으로 서울의 북촌이나 인사동과 비슷한 분위기다.

 

입구에 들어서면 건물에 매달린 홍등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념품 숍에서는 가면, 수공예품, 인형, 골동품, 미술품 등 각종 상품들이 눈길을 붙잡고 노천카페와 음식점에서는 꼬치구이, 국수, 솜사탕 등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쓰촨 지방의 성도이니 만큼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진리거리는 촉 시대를 재현한 타임슬립(time slip)의 길이다.
콴샹쯔 거리에서 공연예술을 펼치는 아티스트.

 

 

 

중국 사람들 사이에 젊어서는 삼국지를 읽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마라는 말이 있다. 삼국지에는 젊은이들의 용기와 포부를 길러주고 지혜와 사려를 깊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고, 늙으면 꾀만 늘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삼국지를 10번 정도 읽었다. ‘늙어서의 기준이 몇 살이 되는 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젊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도 청두를 다녀온 후 며칠 만에 다시 삼국지를 손에 들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2.14 17:39 수정 2019.02.15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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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1/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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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자님 (2019.03.09 09:45) 
청두에서
10여년전 구채구갈때 청두에서 출발했어요. 그때 무후사와 금리거리 갔었는데 금리거리에서 쇼핑하느라고 무후사는 스쳐 지나쳤는데 오늘에야 무후사 제대로 공부하고 갑니다.ㅎ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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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님 (2019.02.15 18:29) 
청두
사천성 성도 다녀온지도 5년이 지났는데 무후사 기사보니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금리거리 청나라 상가의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마신 추억도 새록새록. 감사합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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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