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내가 대학생이 되던 그 해에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제작되고, 그 다음해에 개봉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늘 사실들을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어둡니다. 이런 습관이 나를 수필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의 신념이라면, 나와 관계를 맺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데우스〉는 청년이었던 나에게 두 가지 면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선線을 넘는 명랑하고 자유로운 모차르트가 직면하는 천재의 위기였고, 다른 하나는 최선을 다하지만 선을 넘지 못하고 미쳐 버리는 살리에리가 보여주는 평범한 사람의 위기였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나는 대학에서 20년 동안 대표적으로 ‘알프스 지역 전설과 요들송’이라는 과목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늘 축제 기간에 맞춰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한 학기 수업 전체가 축제로 연출되길 원했습니다.
‘음악의 소리’는 시각 효과와 어울리면서 먼 곳에서 바람소리와 함께 들려 옵니다. 카메라 앵글은 하늘의 구름을 뚫고 대지로, 그리고 중세의 교회들을 거친 후, 들판에 선 한 여인으로 시각을 좁혀 갑니다. 순간, 바람 소리는 사라지고, 넓은 치마를 입은 마리아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열창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가슴이 다 뻥 뚫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물론 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는,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마돈나〉라는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는 조각이 있습니다. 둘은 각각 신의 출생과 죽음을 형상화해 냈습니다.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신이 될 그 사람을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보여 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 속의 인물 마리아도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모범적이고 자연스럽습니다. 강제성이 없습니다. 놀기 위한 옷을 따로 만들어 입히고, 나무 위에도 올라가게 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놀면서 성장하는 법입니다.
반면에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끊임없이 선을 넘으면서도 운명에 지배받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지만 결국에는 쓰러지는 무서운 투쟁을 그려 냅니다. 고통은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창조적인 삶을 지켜보던 경쟁자 살리에리는 질투심에 불탑니다. 천재가 자신의 운명 앞에서 무너지는 데 반해, 이 질투하는 인물은 자신의 욕심 앞에서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맙니다. 영화는 그가 정신병원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과 함께 시작하고 마감합니다. 이렇게 하여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보여주는 두 가지의 상반된 비극을 연출해 냅니다.
몇 년 전에는 우연히 〈위플래쉬〉라는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 속 인물 중 유독, 선생 역할을 한 인물의 외모와 성격이 유학시절 나의 지도교수님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놀랍기도 했고 또 동시에 그때의 힘든 시절을 떠올리게도 했습니다. 그는 늘 ‘넌 할 수 있어, 인마!’ 하고 다그쳤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제자에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한계를 넘어서며 극복해 주기를 바랍니다. 극복은 대신해 줄 수가 없는 일이어서 그저 잔인하기만 합니다. 나의 스승이 가르침을 펼치면서 자주 외웠던 구절입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는 내가 죽지 않으면 더욱 강해지리라고 굳게 믿어주었던 것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 음악의 소리를 ‘자연스럽게’를 보여 줬다면, 〈위플래쉬〉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한계를 넘게 하는 기술로서 ‘채찍질’을 연출해 냈고, 〈아마데우스〉는 이 두 가지의 힘들을 서로 대립의 형식으로 일궈냈습니다. 양성陽性의 힘이 음성陰性의 힘을 만나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선악이 음양처럼 둘이 함께 모여 태극을 이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