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노중평
중국의 지방정부 사이트에 연주인(兗州人)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그 문장이, ‘兖州古城为古檀国地, 少昊之墟。史称夏邑.’이다. 이 문장 중에서 단국(檀國)이라는 단어가 있다.
‘연주 고성은 옛 단국의 땅이다. 소호의 터요, 역사는 하나라(夏邑에서, 읍은 성을 쌓아 방어하는 나라라는 뜻) 칭한다.’라는 뜻이다.
단국은 배달나라 말기에 있었던 나라이고, 단국의 역사는 배달나라 말기의 역사와 조선 초기의 역사 사이에 맞물려 있다.
조선조 말의 역사학자 이고선(李固善)의 『조선기(朝鮮紀)』에 다음 내용의 글이 있다. ‘단국은 천일태제(天一泰帝), 지일홍제(地一洪帝), 태일성제(太一聖帝), 3분이 통치했던 단명한 나라였다. 테일성제는 단군왕검을 말한다. 천일태제는 배달나라 제16세 축다리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고, 지일홍제는 배달나라 제17세 혁다세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고, 태일성제 단군왕검은 거불단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다.’
이들 세 분의 배달나라의 한웅들이 다스린 단국을, 중국의 연주인 사이트에서, 연주라 한 것이다.
『진서 지리지(晋书·地理志)』는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서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兖)자는 본래의 모양새가 끝과 단정함과 믿음의 의미가 함의(含意)된 말이다. 『사원(辞源)』의 주석에 따르면, 이순(李巡)이 말하기를, ‘제(濟)는 제수와 황하 사이에 있는 땅에 사는 사람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의 성격은 신의가 있고 공손하다. 그래서 연(兖)이라 하였다.’ 고 했다.
의사설(意思说)에 따르면, ‘제수와 황하 사이는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사람의 기질은 실익을 따지지 않고 근신하여, 이런 이유로 연주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명조(明朝) 만력년간(万历年间)에, 산동감찰어사(山东监察御史) 순안조은인(巡按姚恩仁)이 『연주부지(兖州府志)』를 찬하였다. 서문에서, ‘연군(兖郡)은 노국의 옛 도읍지(鲁之故都)이다. 오부자(吾夫子之)의 고향이다.’라고 하였다.
허다한 역사가들이 말한 정론(正論)은 ‘연은 천하의 으뜸이다’, ‘연주는 4천 년 동안 단정하고 신의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앞에서 ’연‘자와 ’연주‘에 대하여 해설한 사람들이, 사단(四端)에 대하여, 연나라 사람의 기질이라고 말했지만, 이 기질이 단국 사람의 기질이라고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단은 단국 사람의 기질이었다. 사단을 가진 자만이 주역(周易, 易經)에 나오는 무구(无咎)와 무예(无譽)를 판별하는 기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이 말은 주역이,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 천왕이 소성괘(小成卦) 8괘를 긋고, 복희 천왕이 대성괘(大成卦) 64괘를 긋고, 문왕이 사(辭)를 붙였다고 했는데, 주역을 완성한 나라는 배달나라 말기에 있었던 단국으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연주가 중국 유교문화의 발상지라는 말이 긍정적인 말로 들리는 이유는, 그곳이 사단의 발생지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연주는 중국 역사문화에서 이름있는 성(城)이다.
단국의 위치는 제수와 황하 사이에 있고, 여기에 살았던 단국 사람의 기질이 단정하고 근신하였다. 사단은 단국 사람의 기질이었다. 이곳에서 당나라 때 시인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가 태어났다.
나는 단국(檀國)의 단(檀)이 단(端)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단(檀)과 단(端)을 같은 뜻으로 본다는 말이다.
『사기(史记)』는 단국의 역사를 지우기 위하여, 단(檀)자를 연(兗)자로 대체하고, 하(夏)나라의 역사로 둔갑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하(负夏)、 부하(负瑕)、 하구(瑕丘)、하현(瑕县)、동노(东鲁)、사구성(沙丘城)、노군(鲁郡)、동군(东郡)、연군(兖郡)、하양(嵫阳)、자양(滋阳),역사는 요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4번이나 5번째 성을 쌓으면서, 약 4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历史可追溯到尧舜时代, 经过了四迁五筑的变化. 距今约四千多年历史〟)
이 설명은 연주가 요순시대로부터 명칭이 11번 변했고, 4번이나 성을 5번 쌓았는데, 그 역사는 4천 년이나 된다고 한 것이다. 요순시대라면, 조선의 단군왕검 시대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 시대의 이전 시대인 단국 시대는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지나족이 단군왕검 시대 이전 시대는 역사로 치지 않고 기록에서 빼버렸다. 자기들의 역사가 아니라고 빼버린 것이다.
『만청중국행정구획강목(瞞淸中國行政區劃綱目)』 산동성(山東省) 의 연주부(兗州府) 항목은 연주의 위치와 역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주는 산동성 중남부에 위치한다. 춘추시대 이후에 지명이 출현하였다. 춘추시대는 우임금시대에 구주(九州)를 명명하였던 시대로 파악된다. 연주는 구주에 속한 하나의 주이다. 연은 고대에 연으로 이름을 지었다. 『사기하본기』는 연주(兗州)를 연주(沇州)라 하였다. 연주가 정식으로 행정구획이 된 것은 서한의 한무제가 14주를 설치하고, 자사(刺史)를 두어 업무를 개시했을 때였다.(位于山東省中南部, 地名出現于春秋之后, 春秋戰國時把禹時的九州冠以称謂, 兗州卽其一, 兗古作沇, 『史記夏本記』 兗州作沇州, 兗州正式作爲行政區劃是在西漢武帝設14州刺史時開始的.)
춘추시대에 지명이 출현했다고 했으므로, 한무제가 연주의 위치에 있었던 번조선을 멸망시킨 이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우임금이 9주를 임명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우임금의 하나라가 산동 반도에 있었던 번조선의 서쪽 변방에 있었던 나라에 불과함으로, 사실 배달나라 시대에 9주를 봉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단국의 태제였다고 볼 수 있다.
단국의 태제는 배달나라의 제 16세 축다리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인데, 『부소보서(扶蘇譜序)』에 보면, 중원을 9주에 봉한 분이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 천제였으므로, 우임금이 9주를 봉했다는 것은 역사 왜곡으로 볼 수 있다.
연주라는 지명이 생긴 때는, 서한의 무제가 9주를 14주로 확대했던 때였다. 이때는 BC 238에 진시황이 3조선 중에서, 번조선과 진조선을 멸망시킨 이후에, 또 서한의 무제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3조선 중에서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막조선도 멸망시킨 BC 108 이후가 된다.
단국 시대엔 연주(兖州)를 연주(沇州)로 불렀다고 볼 수 있다. 『사기』에 기록하기를, “순(舜)은 기주인(冀州人)이다. 순은 여산(廬山)에서 농사짓고 뇌택(雷澤, 兖州泽)에서 고기 잡았다. 하빈(河滨)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수구(寿丘)에서 그릇을 만들었다. 부하(负夏-兗州)에서 세월을 보냈다. 고대에 부하천(负夏泉)인데, 원명은 순천(舜泉)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글들은 단국의 실체를 없애고자, 지명을 세탁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공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조선족이 한국에 들어와서 부동산을 싹쓸이하고, 보이스피싱하고, 의료보험을 거덜을 내는 것을 보면, 사단을 맹자에게 전이시킨 화이(華夷)가 단국의 후예인 한족(韓族)에게 끼처온 해악(害惡)이 그대로 전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국의 도덕인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4가지 마음이다. 맹자(孟子)가 사단을 말했다고 전해 오는데, 맹자는 어디에서 힌트를 얻어서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은 단(端)자에 들어 있다. 단자가 나온 곳은 조선(朝鮮)의 전신인 단국이다. 단국이 있었던 곳이 지금 중국의 연주(兗州)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선포하기 전에 단국이 연주 땅에 있었다.
지금 한족(韓族)이 선진국이 되어, 심성(心性)이 순화(淳化)되어 가는 마당에, 우리가 단국에서 물려받은 단정한 기질(四端)이, 거친 심성을 가진 조선족과 중국인의 무지막지한 침략을 당하여 무너지고 있으니, 앞으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들 침략자 중에서 악한 종자들을 분별하여 한국 땅에서 추방하고, 남은 자들은 공산당에게서 받은 죄의식이 없고, 양심이 없고, 입을 벌리면 거짓말하는 소시오패스 기질을 없애 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