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비 칼럼]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하양(河陽), 물과 볕이 만나는 곳

윤은비

 

 -첫사랑, 첫 만남 

학과 우편함에서 방금 도착한 편지 한 장을 안고 학관 뒤 호수를 돌아 달린다. 막 시작하는 수업에 이제까지 옆에 있던 내가 왜 늦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오후 수업을 통째로 빠질 수도 있음을 누군가는 알기도 할 것이다. 그의 존재를 펄럭펄럭 떠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꼭 한 친구에게는 은밀하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문장은 수려했고, 멀리서 바라보는 마음은 애틋하고 소중했다. 기숙사 앞뜰에 봄꽃이 피었다고 보내온 사진 속 활짝 웃는 얼굴은 오래도록 지니고 다녔을 것이다.

 

발신인이 몇 번쯤 바뀌었을까. 대구시 남구 봉덕동 작은 마을 끝에 효성여자대학교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스무 살 몽글몽글 피어나던 마음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4학년 마지막 학기는 옮겨진 캠퍼스로 다녀야 했다. 대학 시절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는 한 달 동안 시내 고등학교로 출근했던 교생실습과 어설프게 시작되던 사회생활 속에 흐려져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릎을 동그랗게 싸안고 오래도록 호수를 바라보던 자세를 내 몸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뿐.

 

구석구석 유서 깊은 여자대학교의 아담하고 내밀한 캠퍼스를 두고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멀미가 나도록 달려야 했던 경산시 하양읍은 황량하고 삭막하기가 가히 살인적이었다.

 

 -삼십년 후

멋 부린 신발 뒤축이 번번이 벗겨지던 돌길에는 보도블록이 덮이고, 우산 없이 홈빡 젖던 소나기도 반가울 듯 흙먼지 날리던 큰길은 이제 반지르르 기름기도는 팔차선 아스팔트가 되었다. 그때 덜렁 한 동 먼저 세워졌던 인문관은 도대체 어딘지 짐작할 수도 없고 이웃에도 종합대학교가 들어섰다. 이른바 대학도시 대학로가 된 하양에 교직원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품어 볼 편지도, 돌아서 달릴 호수도 이제는 없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이 더 먼저 없어졌을 것이다. 팔랑팔랑 흩날리는 봄꽃 아래로 후배며 제자며 아들딸인 그들이 대신 걷는 길을, 공연히 주눅이 들어 되도록 먼 데로만 눈길 주며 걷게 된다.

 

온 학교는 연둣빛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꽃잎이 눈처럼 내려서 그 연한 것을 손바닥에 담아도 보았는데. 공학관 쪽에서 나오는 길은 너무 낭만적인 것이 문제다. 맑으면 맑은 대로 비 오면 비가 와서, 잔디 사이 오솔길에서도 신록이 짙은 큰길에서도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된다. 쓸쓸한 표정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한 무리의 공대생들을 마주친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만으론 부족했나보다. “사랑합니다, 교수님~”까지 큰 소리로 과분한 적선을 한다. 요란하고 절도 있는 군대식 애정 고백에 체신도 지키지 못하고 마음이 지나치게 환해진다. 그 역시 감추지 못하고 다 들키고 만다.

 

 -시간을 거슬러

흐르는 듯 머무는 듯 고요한 청천 대부잠수교 아래, 강물 위로 볕이 출렁이고 그 볕 아래 물이 또 반짝인다. 반짝이는 것이 물인지 볕인지는 한낱 핑계일 뿐 내 마음이 먼저 빛나고 있다. 금호강 건너 이곳에 오면 청춘을 고스란히 다시 누려도 될 것 같다. 물과 볕이 만나 부서지며 섬세하게 흐르는 곳, 누구라도 이 도시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일은 죄 되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하양역에서 밤기차를 탄다. 바다를 돌아오는 작은 기차, 역을 나가면 몇 걸음 걷지 않아 철로가 있고, 역사 저편 앞으로도 백 년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그리운 도시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돌아선다. 햐양(河陽), 흐르는 볕의 이름을 가진 도시! 밤에도 찬란하다.

 

 세상 한 구석이 아름답다-행복의 주소, 고향의 이름  

 

서울은 참 멀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지방에서만 사는 내게, 서울특별시는 특별한 일정으로 가서 바쁘게 돌아오는 세계 속의 도시이다. 지하철을 갈아타거나 기차를 기다리는 사이 인사동이나 대학가를 바쁘게 다녔을 뿐. 한 번도 생활의 터전으로 삼을 기회가 없었다.

 

물리적 거리보다 정서적 거리도 만만치 않다. 여행 중 때마침 퇴근 시간의 긴자(銀座)거리를 지나며 문득 떠올랐던 생각은 도쿄만큼도 서울에 대한 체험이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워의 도심에 갇혀본 적도, 밤길을 천천히 걷거나 야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적도 없다. 같은 말을 쓰는 내 나라의 수도에 대해 텔레비전으로 본 장면만 생생하다.

 

대구 동성로는 내 청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거리다. 중고교 시절 6년을 버스로 지나다녔다. 내 나이보다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 한국전쟁을 견디고도 남아있고, 앞산공원에서는 온 도시를 내려다볼 수도 있다. 비 오는 날, 산정의 찻집에서 바라보면 도시는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운 그림으로 젖어 든다.

 

봄이 오는 수성못, 삼덕동의 낙엽길이며 시원하게 뻗은 동대구로의 키 큰 가로수도 눈 감으면 금방이라도 그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만 같다. 신천대로를 지나 대구를 벗어날 즈음, 가로등 불빛이 금호강에 비치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고향에 대해 인색하고 삭막하게만 여기던 내가 이제라도 복원해 낸 기억이다. 나야말로 꼭 알맞게 살기 편해서 고맙고 행복했건만, 멀리로 가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고향이란 말조차 싫었던 적이 있다. 근래엔 전국의 모든 대학을 수도권 소재의 서울대와 그렇지 못한 지방대로 나누기도 한다니, 요즘 아이들의 지방에 대한 열패감이 너무 깊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생활권을 좁혀오는 동안 심리적 거리는 더 멀어지지 않았는지 답답하기도 하다.

 

지방대 졸업생에 대한 사회의 벽이 높다지만 자기만의 새로운 힘으로 당당히 맞서야 한다. 미래는 국경도 없이 가까워지는 세계를 향해 열려있고, 중심이란 사람을 기준으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으니까. 지금 어디에 있느냐보다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행복은 멀리에 있지만은 않다. 세계 속의 도시 서울도 누군가에겐 그리운 곳이며 또 새로운 고향이 되기도 하겠지만.

 

 에필로그,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답다-행인주의보  

 

닿을 수 없는 것이 아름답다. 누군가 남기고 지나간 비누 냄새, 짧았던 계절의 꽃향기, 아스라이 먼 곳의 안부. 팬더믹이 강요하는 거리 두기도 마음 한편을 편안하게 해주는 날들이었다. 

 

행인 1, 2, 3/ 산책길 비켜서며 의미 없이 인사하고/ 신호를 기다리는 길 위의 모든 당신/ 이만큼 있어 주는 배려/ 우리는 거리가 필요해요/ 무심한 척 외면하고 지나가기로 해요/ 나 잠시 당신 곁을 스치게 되었네요/ 우리 서로 행인인 것을 용서하기로 해요/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시간, 멀리 있는 당신이 아름다워요.

 

[윤은비]

yooneh0520@hanmail.net

 

작성 2022.11.08 11:11 수정 2022.11.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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