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이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며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임진왜란을 마주한 이순신 장군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였었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 장군의 직책은 전라좌수사였다. 전쟁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조정과 달리 이순신은 전라도지역에서 전쟁을 대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진왜란의 해전은 경상도지역에서 발생했었다.
초기 왜군이 적극적으로 해전을 걸어왔던 상황에서는 여수에 본영을 유지한 채로 경상도로 나와서 적과 전투를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계속된 이순신 장군의 승리의 결과로, 왜군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상황이 오자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서라도 진을 옮겨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견내량(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 아래의 해엽) 근처로 진을 옮긴 후 이순신 장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가을 기운이 바람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배 뜸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도 번거롭네.
달빛은 백전에 비치고 정신은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에 어느덧 닭이 운다.
난중일기 중 계사년(1593년) 7월 15일에 수록된 이 시는 조선의 승리를 위해 견내량으로 이동하며 국가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왜구를 막을 대책이 없어, 기반을 옮겨야하는 안타까운 조선의 상황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 이 모습이야 말로 이순신 장군이 지닌 문인적 모습의 표출이다.
시의 내용과 함께 진을 옮긴 후의 이순신 장군의 행보를 파악하는 것 또한 이순신장군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반을 처음부터 닦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좌절하지 않고 견내량의 지형을 적절하게 활용할 방어전선을 마련했다. 이순신 장군의 철저한 대비덕분에 정유년(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이 조정으로 압송될 때 까지 조선의 수군은 서해 항로를 통한 왜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기반을 과감히 놓고 갈 수 있었던 결정을 내린 원동력은 무엇이었으며 이동 후에서 철저한 대비로 왜적을 막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를 고민을 해볼 수 있다. 이 두 질문은 결국 이와 같은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순신정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시에서 보듯 그 이후의 행보는 선공후사로 대표되는 ‘사랑’과 자신의 본분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력’이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이 아닌 조선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순신 장군은 그전까지 기반이 없었던 견내량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해 왜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공동체를 위한 선공후사로 대표되는 ‘사랑’의 감정과 어떠한 자리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자력’의 정신이 기반이 된다면, 오늘날의 우리가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서도 스스로의 욕심을 버리고 공동체(작게는 가족부터 사회까지)를 위한 공적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진을 옮기는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녹아들어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