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무이다

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운명은 무이다.” 키르케고르가 불안의 개념 속에 남겨놓은 명언입니다. ‘운명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정해진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이야기의 특징입니다. 삶의 이야기는 무이지만, 그래서 동시에 무한합니다.


근대 들어 교회의 그늘에서 벗어나 사람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한 최초의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입니다. 그는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서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은 만화경 속의 그림과 같다. 돌릴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이는 것 같지만, 눈앞에 있는 그림은 사실 언제나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현상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단일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은 하나의 형식과 같습니다. 그 형식 속에 다양한 내용이 채워져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유일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 한결같습니다. 그것을 관찰한 최초의 철학자가 쇼펜하우어라는 얘깁니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 키르케고르는 1813년, 니체는 1844년생입니다. 각각 25년, 31년의 나이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의 삶을 연구한 거대한 선구자들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이념 속에서 길을 찾았고,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의 이념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으며, 니체는 안티크리스트를 외치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등장을 선포했습니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를 완성하던 순간에, 즉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새로운 AD 계산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노 도미니, 즉 신의 등장을 선포한 후, 그때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 계산법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신이 된 철학자라니! 버릇없기로는 단연 최곱니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이들 세 명은 모두 사람과 사람의 삶을 관찰했고,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규명하는 데 목숨을 바쳤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의 삶을 옹호했고 변호했으며 응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나는 저세상 가노라!’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저세상은 생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삶은 현상과 본질이 한데 어울려야만 가능한 개념들입니다. 현상을 무시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현상이 있으니까 본질도 아울러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어두운 공간에 들어서면 어정쩡한 자세로 걷게 되는 것이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눈을 감아도 보인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즉 보이지 않은 본질적인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귀신도 보는 존재입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생지옥을 경험할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천국을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중세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천국의 소식을 복음소식이란 이름으로 불러 대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이제 대지의 뜻에 귀를 열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관심했던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대지 아래 지옥이 있다는 식으로 두려워하지도 쓸데없는 생각에 휩싸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이들에게서 공통점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관념적인 개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개념들이 의미하는 바를 바꿔 놓은 것이다. 그릇은 같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운명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운명 때문에 삶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도 운명을 아는 것을 지혜라고 설명하며 ‘지천명’을 가르쳤습니다. 니체도 ‘운명은 사랑하라’라는 말로 ‘아모르 파티’를 가르쳤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운명은 무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네 자식에게 행운을 주고 바다에 내던져라”라는 속담을 좋아했습니다.


작성 2023.07.03 08:56 수정 2023.07.0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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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