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친구들과 같이 부른 설악찬가(雪嶽讚歌)

여계봉 선임기자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한 속초행 버스가 인제와 원통을 거쳐 한계령에 도착한다. 점봉산과 설악산을 잇는 안부인 한계령은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가야 할 길이 가지런하게 열려있는 한계령에 햇살이 들이치니 신록은 터질 듯 부푼다. 둥실둥실 몇 점 구름 떠가는 파란 하늘이 유난히 눈부시다. 1박 2일 동안 설악산을 같이 걷는 산 동무들은 몇 년 후면 모두 일흔이다. 나이 먹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풀잎 끝의 이슬(草露)처럼 온 몸을 던져 살라.' 이슬은 풀잎 끝에서 온 몸을 던지니까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맺힐 수 있다. 초로(草露)의 나이에는 순간을 위해 온몸을 던지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한계령 들머리에 선 산 동무들 

 

한계령 휴게소에서 근처 은비령에 사는 친구가 와서 사준 커피를 마신 후 산 오름을 시작한다. 얽매인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라. 매인 나를 푸는 일, 쉬운 게 아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기에 청산(靑山)은 멀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한계령 설악루에 올라 서 있다. 설악루는 한계령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아스라한 추억처럼 애절한 시구를 연상시키는 양희은의 ′한계령′ 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들머리인 한계령에서 2시간 이상 거친 숨을 수십 차례 토해야 서북능선이 지나가는 한계령 삼거리에 올라설 수 있다. 근심도 번뇌도 끼어들지 못할 시간이다. 물욕도 애욕도 저만치 물러나 있다. 산길은 정오의 시간인데도 적막하고 고즈넉하다. 느릿느릿 걷는 것처럼 마음에 충만을 주는 행위도 드물다. 평상심 안에 길이 있다. 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발 디딘 그 자리가 환한 길이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왼쪽은 귀때기청봉을 거쳐 대승령으로, 오른쪽은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삼거리 공터에서 점심을 먹고 대청봉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산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서북능선 따라 귀때기청봉과 대승령, 안산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산이 크기에 저 멀리 사방팔방에서 강강술래하는 능선들의 파동이 장중하다. 산이 깊기에 바깥세상의 티끌도 소음도 저승처럼 멀다. 산에 오르는 길 위에 구름 그림자 내려 고즈넉하다. 산은 첩첩하고 나무는 울울(鬱鬱)하지만 답답한 구석이 하나 없다. 멀리 하늘의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공간을 이등분한 산마루는 후련하고 유현하다.

 

한계령 너머로 보이는 점봉산과 망대암산

 

​등 뒤로 지나온 서북능선 마루금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이 주불인 설악산을 협시하고 있다. 대간 마루금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끝청과 중청이 고개를 내밀고 어서 오라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는 살을 에는 강풍으로 악명 높은 서북능선길이 여름에는 산객들에게 청명한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산길조차 평탄하여 가슴에 솔내음도 켜켜이 재면서 콧노래까지 부른다. 서북능선 북쪽은 첩첩산중이다. 능선 주변에 버티고 선 늙어서도 용트림처럼 굳센 소나무들. 가득 찬 적막에 리듬을 부여하며 흐르는 바람결. 하늘과 사이좋게 천지를 양분한 대간의 실루엣. 일어서거나 눕거나 어깨를 겯고서 골짜기를 통솔하는 바위의 군웅할거(群雄割據). 군살도 잡티도 하나 없는 절경이다. 분방하지만 현란하지 않으니 격조가 넘치는 풍광이며, 광활한 산협이지만 물물이 찬연하여 한 폭의 섬세한 수채화다.

 

서북능선 북쪽으로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내설악

 

끝청에 가까워지니 너덜지대가 계속 이어진다. 발바닥이 얼얼해지면서 무릎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고달픈 길이다. 발바닥은 고단하고 몸은 피곤하지만 남설악 점봉산의 넉넉한 풍경과 내설악의 수려한 풍광이 길손을 위무해준다. 몸은 힘들지만 설악찬가가 방언처럼 튀어나온다. 자연의 조화는, 설악의 선경(仙景)은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리라. 힘들면 쉬어간들 어떠리. 고생 끝에 낙인가. 끝청 전망대에서 펼쳐지는 360도 파노라마 조망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동안 땀 흘리며 힘들게 걸었던 노고를 그대로 보상해준다. 끝청을 지나니 좌로 중청, 우로 대청이 바짝 다가선다.

 

끝청에서 바라보는 남설악과 서북능선, 그리고 내설악의 조망은 가히 압권이다.

 

중청가는 등로에 있는 고사목은 죽음이 아니라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하늘이 깊은 방죽처럼 푸르니 얼굴이 반사되어 비칠 것만 같다. 구름을 뚫고 능선으로 투명한 햇빛이 부서져 내린다. 장엄한 설악에 반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진다. 주위에 햇살 멱을 감는 나무들의 몸내까지도 상큼하고 코끝으로 온갖 산향(散香)이 들이친다. 몸이 길을 가지만 정작 앞서가는 건 마음이다. 마음을 움직여 산길을 걷는다는 일, 이건 어쩌면 생의 본질이며 선창(先唱)이다. 

 

중청대피소와 대청봉이 나타나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윽고 중청대피소에 도착한다. 산객을 반기는 산장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산 오름의 피로가 스스로 사라진다. 대피소 공터를 쓸어가는 시원한 바람결이 예사롭지 않다. 나그네의 헛욕심도 바람결에 씻겨간다. 대피소에서 울산바위를 줌으로 당기니 운무를 머리에 인 동해바다까지 함께 다가선다. 홍옥 빛으로 저무는 해를, 주황으로 번지는 노을을, 황금빛 물무늬 아롱거리는 동해를 보니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운해를 감은 산군들이 벌써 으스름하다. 공룡능선 좌측 끝의 마등령은 15여 년 전 겨울, 마침 이곳을 지나던 산행팀을 폭설이 덮쳐 대학 동기인 친구가 유명을 달리한 애절한 아픔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을 너무나 사랑해서 산에서 영면한 친구의 명복을 간절하게 빌어본다.

 

중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속초 시내 야경

 

중청대피소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대청봉을 오른다. 랜턴 불빛을 따라 어둠에 잠긴 산길을 걷는다. 길은 적막한데 새벽 안개만이 스멀스멀 똬리처럼 풀리다가 감기길 거듭하며 홀로 분주하다. 드디어 대청봉(1,703m)에 올라선다. 산 정상을 올라가 보라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다. 산 아래처럼 좁은 소견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상에 선 초로(草露)의 산 동무들 

 

동해에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일출의 광명은 오늘도 보기 어렵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어둠이 걷히니 좌로부터 용아장성, 공룡능선, 마등령, 황철봉, 울산바위, 화채봉까지 설악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아장성 뒤로 공룡능선과 황철봉,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로지르는 신선대, 그 뒤로 외설악의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청봉을 옹립한 산의 신하들이 주름주름 낮은 포복을 하는 중에 운무가 샛바람에 날린 비단 자락처럼 내려앉으니 찬탄할 만한 비경이다. 흐트러지면서 여미고, 여미다가 다시 풀리는 저 산군의 출렁거림에서 오체투지를 본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바로 부처다.

 

대청봉에서 바라본 설악의 비경

 

대청봉 산정은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눈이 덮여 있고 유월과 칠월이면 진달래와 철쭉, 벚꽃 등 온갖 꽃이 피어 3만 평 되는 산비탈이 온통 하늘 꽃밭이 된다. 정상 주위에는 조용하지만 강인하게 강풍을 견디고 있는 풀과 나무들이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몸 낮추라는 소식일까. 한여름이지만 덤불 숲을 훑는 바람이 아직도 서늘하다. 

 

중청대피소를 지나 소청으로 가는 산길은 산협 사이를 맵시 있게 휘어지고 돌아나가며 내린 산 그림자가 임의 속살같이 애틋하기만 하다. 안개의 기습을 받은 소나무들이 길모퉁이 휘어질 때마다 저만치서 꿈속에서 보는 풍경처럼 아련하고 아득하다. 소청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다 고개를 드니 악명 높은 공룡능선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소청 전망대에서 서니 발아래로 소청대피소와 용아장성 끝에 모신 봉정암의 삼층석탑이 아득하게 보인다. 

 

소청에서 바라본 용아장성의 위용

 

하산길은 좌로 공룡능선, 우로 화채봉(1,320m)이 희운각대피소까지 일행과 동행한다. 순정함의 기암으로 치장한 공룡능선과 끝없이 이어지는 장쾌한 화채능선. 두 눈에 모조리 쓸어담기에 족한 함축적인 산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山)을 신(神)이라 불러도 무방하리. 협곡 사이로 내려갈수록 물소리와 새 소리뿐, 산의 적막은 깊어진다. 나무도 숲도 계곡도 하늘도 일체가 묵언에 들어 있다. 명상에 잠긴 산이 바로 적멸이다.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하니 맞은편 봉우리들은 산 그림자로 그윽하다. 골짜기는 푸른 연기 같은 이내로 넘쳐 마치 저물녘의 연못 같다. 

 

희운각대피소로 가는 하산길에 만난 공룡능선 

 

희운각대피소를 지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급경사의 철계단을 따라가면 길은 기암 협곡속으로 들어가길 거듭한다. 궁벽한 산중, 외진 길이다. 후미진 산길에선 내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걷다가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기기 적격이다. 이 산길의 임자는 바위다. 바위들은 어쩌면 생의 가파른 먼 길을 걷고 걸은 뒤 마침내 좌정했는지 모른다. 그저 조용히 다른 자연의 형제들이 내는 교향악을 경청하는 일만 남았을 뿐. 일말의 고뇌조차 없이 그저 제 몸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거나 우듬지에 쏟아지는 햇살과 희롱한다. 바위들의 침묵과 위엄. 이건 덧없는 존재가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이다.

 

 깊은 울림 속에 빠진 천불동계곡

 

이윽고 양폭대피소에 도착한다. 인적이 드문 대피소 부근은 적막이 가득하다.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한 탓인가. 한바탕 삶의 여정이 끝난 뒤의 정적이 이런 것일까. 이렇게 황홀한 고요에 닿게 될까. 햇살에 출렁거리는 산속, 몸은 사바세계에 머물고,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 주름주름 능선을 휘감는 시늉을 하던 운무가 제물에 질리듯 머리를 풀어헤치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운무의 바깥, 하늘 한구석이 열린다.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의 천불동계곡. 정제미, 균형미, 함축미가 섞인 모양새가 한편의 단아한 선시(仙詩)를 보는 듯하다. 계곡에는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소나무 뿌리의 인욕(忍辱)에 바위마저 금이 가는데, 실로 소나무는 살아 있는 법문이다. 천불동계곡 사이로 여기저기로 촛농처럼 흐르는 암반들이 허옇고 거대하다. 그래서 이 산은 오직 푸르기만 한 게 아니라 희고 밝다.

 

장군봉. 금강굴로 오르는 철계단이 아스라이 보인다.

 

비선대(飛仙臺)에 도착한다. 걸어온 지난 시간의 굽어진 길이 꿈결처럼 아련하다. 계곡은 한낮이지만 그림자가 서늘하다. 뜨거운 햇살이 비선대에도 비스듬히 들이치니 초록으로 치장한 나무들의 몸에 양광이 어려 문득 눈부시다. 칼라일은 '자연은 신이 갈아입는 옷'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설악은 여름옷을 입고 있다. 협곡의 물길에 팬 비선대 바위는 상처인가 기쁨인가. 떨어진 물은 흘러내려 고운 연둣빛을 머금고 와선대 바위 연못과 한 몸이 된다. 그동안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되어 신흥사 청동통일대불에게 정성을 다해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경배를 올린다. 신흥사 일주문을 나서면서 이제 선계에서 속계로 돌아간다. 즉, 선인에서 속인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다짐해본다. 날마다 자자(自恣)라! 쥐고 있는 것들 다 놔버리리라.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눈을 감으니 1박 2일 동안 짧았지만 분주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1박 2일 동안 초로(草露)의 친구들과 같이 부른 설악찬가는 생의 찬가이자 삶의 찬가다. 그리고 설악산이 아름다운 것은 찬가를 같이 부른 친구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yeogb@naver.com

 

작성 2023.07.11 10:13 수정 2023.07.1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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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진님 (2023.07.11 13:56) 
정말 실감과 감성을 잘 표현했네...내가 10여년 전에 가본 코스를 다시 한번 즐기게 해주네....굿!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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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