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여행은 꿈같은 약속이 든 마법의 상자‘라고 했다. 6월 초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마법의 상자'에서 나와 '꿈같은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미항 통영으로 달려간다. 서울을 벗어나자 소경의 눈뜸처럼 모든 것이 새롭다. 모처럼 맑고 화창한 날씨가 신경세포를 자극하여 약간 들뜬 분위기다.
한려수도 남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통영. 문화와 예술의 향기 은은하게 펼쳐지는 육지와 더불어 통영 바다에 뿌려진 보석 같은 섬들이 반짝이는 고장. 그가 품은 수많은 섬들 중 기암절벽과 등대섬, 그리고 '신비의 바닷길'이 펼쳐지는 소매물도로 떠난다.
어느 날의 동화 속 섬을 찾아서.
거제 저구항에는 소매물도행 선박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갈매기와 하나되는 순간, 자연과의 친화력이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 거제 저구항을 출발한 지 50분 만에 소매물도항에 도착한다. 섬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어 두 다리로 걸어야만 섬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썰물 때는 소매물도의 몽돌밭으로 모세의 바닷길이 열려 등대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하얀 등대가 서 있는 등대섬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은 소매물도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은 통영 8경에 포함되는 아름다운 비경이다.
등대섬 트레킹은 총 3.6km로 3시간이면 넉넉하게 원점회귀 할 수 있는 코스다. 약간 가파른 언덕에 펜션과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둣가를 지나 트레킹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섬의 허리를 따라 난 바닷가 산길을 약 40여분 굽어 돌아가면 산길이 끝나는 곳에 심연보다 깊고 푸른 다도해가 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폐교가 있는 언덕에서 땀을 잠시 식히고 아래로 내려서면 등대섬이 눈 앞에 펼쳐진다. 등대 왼쪽으로 옛날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신하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가던 중 그 아름다움에 반해 ‘서불과차(徐市過此)’라고 새겨놓은 글씽이굴이 있으며, 등대섬의 랜드마크 병풍바위가 보인다. 그뿐이랴. 아래로 더 내려가면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잇는 열목개 자갈길도 곧 나타나겠지. 산으로 올라오는 해풍이 이마를 스치자 몸에 배인 땀과 함께 일순간 마음속의 삼독도 사라진다. 해수 관세음보살의 공덕이련가.
매물도는 대매물도와 소매물도, 그리고 등대섬 이렇게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사이좋게 마주해 하루에 두어 번 바다 위에 길을 내어 만난다. 바다 한가운데 자리해 서로 의지하듯 마주한 두 섬은 거센 파도와 바람이 그려놓은 암벽들 덕분에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CF에도 자주 나온 소매물도에서 등대섬 가는 길은 '동화 속의 섬' 만은 아니다. 완급과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몇 구비의 고갯길을 거쳐야 갈 수 있는 피안의 세계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원래 80m쯤 떨어져 있는데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면 이 둘 사이에 아담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열목개 자갈길'이라고도 불리는 몽돌해변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배시간과 물때를 잘 맞추어야 등대섬과 소매물도를 오가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몽돌해변을 지나 등대섬 나무데크를 따라 주위 경관을 두루 살피며 유유자적 걷다 보면 어느새 힘 안 들이고 등대 위에 올라와 있다.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우측 아래로 명물 촛대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소매물도, 매물도의 이름은 유래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조선 초기의 한자 지명은 '매매도', 후기에는 '매미도'와 '매물도'로 표기했다. 이러한 '매', '미', '물' 등은 물을 의미하던 옛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육지로부터 아주 먼 바다에 놓인 섬'이란 뜻풀이가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등대에서 내려오다 보니 관사 아래로 선착장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가 끝나 소매물도를 거치지 않고 등대섬으로 바로 입도하는 관광객이 많아지면 이곳 자연 생태계가 제대로 보전될지 걱정이 앞선다.
포구로 가기 전에 망태봉을 들린다. 망을 보던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먼 바다까지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소매물도 북쪽 500m 거리에 맏형격인 대매물도가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불과 70여㎞ 거리에 있다. 망태봉 정상에 있는 관세역사관은 1970~80년대 남해안 일대의 밀수를 감시하던 곳이다. 이곳 감시초소는 첨단시스템이 도입되면서 폐쇄되었고 지금은 관세역사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포구 선착장 위로 솜털이 촘촘히 박힌 채 움직임 없는 푸른 하늘을 보니 청적(淸寂)이 인다. 다인들이 차를 마실 때 느끼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고 하는데 지금 소매물도 하늘이야말로 바로 ‘청적’이 아닐까.
다음 여행을 위해 '꿈같은 약속이 든 마법의 상자‘ 속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짧고도 길었던 소매물도 여정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