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유석사
갑오년 신춘이 찾아왔다. 살아있는 것 이상의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해도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기 그지없다. 신춘이 되면 또 마음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시간이라는 열정에게 빠져 버린다. 누구나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만큼의 가장 빛나는 죄악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그런 인생은 스토리텔링으로 풍요롭게 출렁이고 못된 철학자의 혀처럼 영혼을 매혹시킨다. 해를 넘기면서 정리해야할 일들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아 내내 우울했었다. 질척거리는 우울을 안고 신춘으로 진입해 오고 나서야 나는 갑오년 청마가 찾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작년 티베트에서 돌아오신 나의 스승님은 은비령 깊은 암자로 들어가 삼년 무문관에 들어가셨고 나는 괜히 쓸쓸하고 외로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갑오년 청마가 찾아왔다. 나는 자인헌으로 달려가 스승님을 닮은 티베트 부처님 탱화 앞에 앉아 새해를 찬미하고 또 찬미했다.
작년 봄,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은 재원의 외국여성과 국제결혼을 했다. 관습이 만들어낸 방대한 주석 따위를 비웃으며 아들은 사소하고 매혹적인 진리의 편에 서서 사랑을 만들어 내며 행복해했다. 나의 이성은 매우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방어를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내 그들의 순수한 감정에 감염되어 같이 웃고 행복해하고 말았다. 독립해서 살고 있는 딸의 결혼이 남아있긴 하지만 나는 이제 인간적 자유를 획득했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에 걸림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신춘은 시간과 공간에 대적하지 않아도 되며 관습의 이주민으로 살지 않아도 좋을 때가 된 것이다. 우울을 접고 위태롭지 않게 서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간 이들의 뒷모습을 담담히 바라봐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새해 들어 자꾸 숫타니파타의 게송이 입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백산 자인헌에서 새해의 며칠을 보냈다. 빈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이 기립해서 바람의 등을 떠밀면 대나무 숲으로 몰려간 바람은 종일 쓰쓰륵 쓰쓰륵 거리며 자인헌을 휘돌며 돌아다녔다 밤새 아궁이는 뜨끈 거렸고 부뚜막에 앉아 졸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지난겨울 첫추위에 잃은 고양이의 새끼들을 떠올렸다. 고양이의 겨울은 인간보다 혹독하고 참담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고양이가 가여워 한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고양이는 오랜만에 따뜻한 부뚜막에서 긴 잠을 잤고 나는 바람숲의 순례자가 되어 밤새 꿈길을 따라 소백을 싸돌아 다녔다.
소백의 아침은 찬란하게 왔다. 산마다 봉우리마다 붉은 해덩이를 받아내느라 소백은 붉게 타오르고 나는 청마의 기운을 담아 소망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붙여 태양에게 던졌다. 올핸 히말라야 카일라스를 순례할 수 있기를, 올핸 좋은 작품 하나 쓸 수 있기를, 올핸 출판사가 번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기원의 마음을 품고 다시 산사순례를 나섰다. 소백산 천문대 아래 겨울햇살을 이고 앉아 졸고 있는 창락리를 지나 산으로 오르자 가파른 산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멀미가 나도록 경사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자 소백산 언덕위에 작고 소담한 유석사가 고고히 앉아 있었다. 신라 효소왕 때 혜통이 창건했다고 하니 그 세월을 짐작하고 남는데 지금은 새로 지은 대웅전만 강건하게 서서 저 풍기땅을 바라보며 불심을 전하고 있었다.
절마다 전설 하나쯤은 품고 있는데 유석사도 해석이 분분한 전설을 두고 중생의 불심 속으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소백산 깊은 산중에 있는 희방사를 희사한 경주의 호장 유석이 각별했던 두운조사와의 인연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절이라 유석사兪碩寺라고 하기도 하고 신라 의상대가 절 앞에 있던 느티나무 아래 반석에서 하룻밤을 묵어갔다고 하여 유석사留石寺라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리저리 살펴보니 대웅전 아래 공양간을 받치고 있는 큰 돌이 의상대사의 반석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지금은 수행이 깊은 스님 한분과 공양주 보살 한 분이 겨울햇살 아래 수북이 쌓인 눈들과 고독을 주고받으며 겨울을 나고 있었다.
나는 대웅전으로 들어가 삼배를 올리며 마음속의 마음을 끄집어내어 부처님 앞에 고했다. 부처는 말이 없고 나도 말없이 서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끄집어 낸 마음을 다시 마음속으로 집어넣었다. 한결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나는 홀가분한 마음을 안고 부처님께도 나에게도 합장했다. 부처님도 고맙고 나 자신도 고마웠다. 대웅전을 나서자 따뜻하게 웃으며 차나 한 잔 들고 가라고 하시는 공양주 보살님을 따라 공양간으로 갔다. 공양주 보살님은 점심공양을 차려 주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풀어 놓으셨다. 나는 공양주 보살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의 부모를 만나고 남편을 만나고 자식을 만나고 부처를 만났다. 부처는 공양주 보살님 속에서 또 다른 부처가 되어 나에게 한 없이 따뜻함을 전하고 있었는데 해는 뉘웃뉘웃 기울고 내려갈 길은 멀어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멀어져가는 나를 바라보며 흔드는 보살님의 손위로 노을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