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해방과 자연 해방은 하나다

제5회코스미안상 당선작품

조윤지

대상 당선 소감 - 조윤지

 

우선 이렇게 영광스러운 대상의 자리를 저에게 허락해주신 심사위원들께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인문학이라는 넓은 범주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담아내고자 했던 훌륭한 이야기를 출품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겸손하게 마음먹었는데 이런 뜻밖의 큰 결과로 보답받아 놀랍고, 기쁩니다. 

 

인공지능과 첨단 기술에 의존하고자 하는 현대의 빠른 흐름 속에서 인문학은 잠시 숨 쉴 틈을 주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맹목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현대 사회의 쉴 새 없는 초시간적, 공간적 흐름에 균열을 놓고 우리가 걸어 나가는 길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제동을 걸어 멈춰 세우는 작업이 인문학의 역할이겠지요. 

 

특히나 기후 위기와 불평등의 시대에서 인문학적 성찰과 사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자연과 인간을 오로지 기계와 기술, 과학의 이름으로만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불균형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애초에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오래된 물음이 바로 인문학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인문학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요. 기술과 자본의 흐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대에서는 인문학이 소홀이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코스미안 인문 칼럼 공모전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와 인간, 그리고 세계를 다시 인문학적으로 바라볼 소중한 기회의 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인문학은 지금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아픔들을 인문학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진단함으로써 어떠한 처방을 내려야 하는지 성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 저의 사유와 성찰이 많은 분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만큼 전달력이 있었다는 의미라고 생각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발전이라는 흐름을 따라 달려온 그 간의 시간 동안, 인간과 자연이 자기답게 살아가는 삶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시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저의 글은 인간 사회의 위기가 자연의 위기를 촉발했고, 자연의 위기가 다시 인간을 위협해오는 연쇄의 고리에 놓여있다는 통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론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시 자연과 인간을 곤경에 빠지게 한 첨단 기술과 자본의 원리로 해결하려는 피상적이고 환원론적인 근대의 논리가 사회의 주류 관점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개개인이 노동으로부터 겪는 존재론적 문제, 그리고 인간 모두가 지구로부터 겪는 문제, 지구가 인간으로 인해 겪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 나서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라는 개인은 영향력이 부족하여, 세상에 필요한 물음과 통찰을 코스미안을 통해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코스미안 뉴스에서 저의 이와 같은 진심을 알고, 세상에 함께 물음을 공유할 창구를 열어주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제가 시대에 던지고자 했던 이야기를 제대로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자연과 인간을 전일론적으로 바라보는 인문학이 우리의 위기를 해결할 열쇠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다시 한번 뜻깊은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당선작품 - 인간 해방과 자연 해방은 하나다

 

세계 무역이 일상 보편화되고, 우리네 살림살이는 점차 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처럼 달고 사는 커피가, 다이소의 물건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우리 앞에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매일 먹는 음식이, 내가 구입하는 상품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와 나의 앞에 있는 것인지 소비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마트에 가면 상품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구입함으로써 일상을 영위한다.’는 전제가 어느덧 공식처럼 자리 잡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을 뿐이다. 

 

살림살이 경제와 돈벌이 경제의 분리는 인류가 그동안 스스로 해 오던 제 삶의 앞가림 –자급과 재생산 노동-을 타인에게 위탁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인해 현대인은 스스로의 앞가림을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하고 돈을 매개로 여러 생산지역에 손 벌려야만 자기의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에티오피아나 콜롬비아 사람들의 노동력에 기대어 생산된 커피를 매일 마신다거나, 방글라데시 의류 공장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생산된 옷을 입는다거나, 제 3세계에서 채굴한 광물 원료가 사용된 자동차를 타고,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식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나 수많은 국가의 노동력이 수반된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한 명의 시민이 살아가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선진국의 사람들은 그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식민지 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 약자들 –저렴한 인건비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와 땀, 눈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안락함과 편리함, 양적 풍요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점점 더 먼 곳으로 흩어지고, 분산되고, 세계적 분업화 되어갈수록 내가 취하는 자원들의 출처나 이것을 만들어 낸 노동자-생산자-의 노동 환경이나, 그들의 얼굴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생산과정에 관심갖지 않게 됨은 말로 할 것도 없다. 얼굴 없는 생산자로부터 상품을 구입하는 얼굴 없는 소비자는 이제 모든 음식과 물건들이 버튼만 누르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동물의 죽음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육식은 배달 버튼, 주문 버튼만 누르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재생산이라는 생태적 한계와 자연의 시간은 고려되지 않은 채, 일상이 자판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살림살이의 외주화로 인해 내가 취하는 것들이 생태계로부터 왔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경제 성장을 위한 맹목적인 생산과 소비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케팅의 속삭임에 넘어가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되었다. 기업은 자연의 회복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순간이라도 생산을 멈추어서는 안 되기에 노동력과 자연을 24시간 기계 돌리듯이 다룬다. 

 

내가 있는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라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일상을 꾸려가던 인간 사회는 산업 혁명 이후 점차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해 가면서 자유 무역과 생산의 외부화로 인하여 그 비현실성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선진 문명국가들이 비현실적인 일상을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비현실성을 뒷받침해줄 근원이 필요하다. 그 근원은 바로 인간이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한 식량이다. 현대 도시는 식량을 자가 공급할 수 없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식량 생산에 필요한 땅과 노동력을 모두 도시 밖으로 내보내 버리고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치부하며 선을 그어버렸다. 

 

그렇게 식량 생산의 근간이 되는 자연과 대지를 외면한 채 자기 자신들은 도시라는 고립된 섬에 가두어 놓고, 섬에서의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해 전 세계의 식량 생산지에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도시와 농촌이 그러하고, 넓게 보면 선진국과 제3세계의 소농 관계가 그러하다. 변경지가 없으면 먹고살 수 없으면서, 내가 더 잘 살기 위해 적반하장으로 변경지를 착취하는 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원리이다. 

 

노동과 삶의 분리를 넘어서 노동 역시도 뿔뿔이 흩어져 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전 세계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하는 이 기이하고도 기괴한 현상은, 더 이상 현실적이라거나 합리적이라는 말로 수식될 수 없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비교우위 이론’은 얼핏 보면 매우 합리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내가 잘하는 것과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서로 교환하면 양측 모두가 질적으로 우수한 결과물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그 비교우위 이론이 결국 전 세계적인 경제적 불균형을 낳았고, 개인이 생태계에 주는 부담까지 극대화시키는 비극을 초래했다. 선진국에서 에너지를 소비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지구가 족히 4개에서 5개쯤은 필요하다. 살림살이의 외주화가 불러낸 일상의 비현실성은 결국 환상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한국을 먹여 살린 것이 중공업과 반도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한국을 먹여 살린 것은 공동화되어가는 지방의 농촌과 전 세계의 소농과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장과 방글라데시의 의류 공장이다. 축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 학대당하다 생을 마감한 육상 동물들과 어망에 걸려 헐떡이던 해양 동물들이다. 인간은 단 한 순간도 반도체를 씹어 먹고 살았던 적이 없다. 우리를 먹여 살린 것은 전부 보이지 않는 자연과 보이지 않는 노동이었다.

 

살림살이를 시장에 내맡김으로써 이러한 사실은 쉽게 은폐된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연결된 지구에서 그 먼 곳의 노동력에 기생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숨긴다. 우리가 서로 이어진 먹이 사슬의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도록 음식을 식품화함으로써 생태계의 일원임을 숨긴다. 지구는 무한대로 상품을 뽑아낼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유기체적 존재임을 숨긴다. 

 

무한대로 성장하겠다는 욕심은 인간 역시도 재생산이 필요한 유기체임을 잊게 만든다. 효율성의 논리는 인간의 노동력과 자연의 생산력을 모두 고갈시키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우리의 살림살이를 문어발식으로 뻗어 내느라 스스로를 갉아먹는 붕 뜬 노동에 몸을 던진다.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명감 대신 노예 계약 아래서 농사를 짓고, 중노동을 한다. 

 

곡물, 가축,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의 생명체들은 더 이상 돌봄과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라 채근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 자연-인간은 자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매개가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환상을 심고, 체제가 유지되도록 지구를 강제한다. 인간은 자본을 위해 삶-여가와 휴식, 자기 돌봄의 시간-을 포기하고 노동하며 다른 생명들의 삶을 빼앗는다. 제 속도와 시간대로 살아가야 할 동물들의 삶을 빼앗고, 그들의 터전을 빼앗고, GMO라는 이름으로 곡식들의 자연스러운 삶을 빼앗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현대인은 착취자인 동시에 피착취자다. 

 

도시는 더욱 팽창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비현실적인 일상은 멈출 줄 모른 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자생할 수 없는 시스템이 커지면 커질수록, 인류와 자연의 존속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점점 더 좁아지고 배척당하는 소농과 자연의 자리가 더욱더 커져가는 탐욕의 문명을 지탱해야 한다면 그 문명은 무너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부터의 자연 해방이 곧 체제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열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가정과 지역을 떠나 먼 곳으로 이동하도록 둘 것이 아니라, 다시 우리의 눈앞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작성 2023.10.11 10:15 수정 2023.10.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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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