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발발 69주년 6월이다. 호국보훈의 달, 나라를 지키다가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공훈에 보답하는 달이란 말이다. 여기서 지켜낸 나라 이름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다. 6.25전쟁 중에 전사·순직하신 호국용사님들은 언제쯤 평안하게 영면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사망·실종된 분들은 공식 명부로 16만여 명이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지 않은 태 휴전으로 총성이 멎은 후, 시신을 수습한 분들 3만여 명은 전쟁의 총성이 멎은 1955년에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고, 13만여 분은 오늘도 조국의 산야에 묻혀서 나라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신다. 미 수습 호국용사님들이다. 그 당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위령(慰靈)하는 동시에 살아서 전투에 임하는 전우들의 결기(結己)를 북돋우기 위한 <노래 전우야 잘 자라>를 풀어보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 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 같이 별 같이.(가사 전문)
<전우야 잘 자라> 노래에 묘사된, 꽃잎처럼 사라져 간 님들은 낙동강 방어선 칠곡·왜관·다부동·유학산·Y고지·형산강·금호강·창녕·남지 등등에서 전사·실종되신 분들을 묘사한다. 물론 피로 물들었던 조국산하 어느 곳에 잠드신 분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랴. 전쟁 상황에서 대중가요는 전투화 발자국과 총소리를 따라가며, 화약 냄새를 따라서 바람결에 일렁거린다. 그런 전쟁대중가요의 대표가 바로 <전우야 잘 자라>다. ‘치세에는 즐거운 노래, 난세에는 원망의 노래, 망국에는 한탄의 노래’가 불린다고 했다. 그렇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돌진하는 용사들에게는 당연히 사기와 군기를 고양하는 노랫말과 용진을 추임(諏恁)하는 멜로디가 절실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정부는 6월 28일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임시수도를 7월 7일 대전으로, 7월 16일 대구로, 8월 18일 부산으로 이전을 하였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1950년 8월 1일 낙동강까지 밀려 극한점에서 버티던(작전명, Stand or Die작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작전명칭, 크로마이트. chromite) 성공으로 북진반격을 감행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이북으로 북진공격을 한다. 남침 36일 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13일 만에 다시 서울을 수복한다.
이때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9월 15일을 인천상륙작전 D-데이로, 5천분의 1의 성공가능성에 전략적 결단을 한다.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국군과 UN군은 총반격으로 진격한다. 전투화발자국과 화약 냄새를 뒤로하면서, 쓰러진 전우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북진(北進). 이처럼 불바람과 총포탄 여운이 감돌던 어느 날, 피난도 가지 못하고 서울귀퉁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작사가 유호(兪湖, 본명 유해준, 1921~)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는 안도감으로 명동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박시춘을 만난다. 그날 둘은 술 도가니에 빠졌다.
명동 뒷골목에서 시작하여 필동 박시춘의 적산가옥(敵産家屋)까지 걸어 간 둘은 술기운에 젖은 감성으로 밀고 밀리는 전쟁 상황을 읊조리면서 하나는 기타로 가락을 퉁기고, 하나는 오선지에 가사를 적어나갔다. 최후방어선 낙동강을 1절로, 북진행로 추풍령을 2절로, 노들섬 한강수를 3절로, 원한의 38선을 4절로.
유호는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들 3형제는 황준·연준·해준이다. 황주·연안·해주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그 지명의 첫 자를 이름 첫 자로 붙인 것이다. 그는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온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였고, 1939년에 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를 졸업하고, 1942년에 일본제국미술학교 2년을 수료하였으며, 가수 현인의 고교 1년 후배이다. 1943년에 귀국하여 동양극장 문예부에서 쓴 극본이 청춘좌에서 공연됐는데, 이때 처음으로 유호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그 후 두 편의 낭독소설을 썼는데, 이것이 경성방송국(KBS)에서 방송된 인연으로 1945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쓴다. 1947년 경성중앙방송국은 당시 음악계의 거장 박시춘과 손목인을 앞세워 경음악단을 창단하고, 이때 유호는 박시춘과의 인연이 된다.
이 노래는 국방정훈국을 통하여 전군에 보급되었다가, 1951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린 1.4후퇴 즈음에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구절이 불길하다고 금지곡이 되었다가 해금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6.25전쟁이 낳은 불멸의 명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이 노래 작곡가 박시춘은 이난영·반야월과 함께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3대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