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삶이 외롭다고 느껴지면 지리산으로

여계봉 선임기자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산'이다. 민속학자 조용헌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을 빗대어 ″기운이 빠져 몸이 처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하고,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겨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요즘 들어 부쩍 가을을 타는 남자 여섯이 모여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첫차를 타고 지리산 자락인 함양 마천의 백무동으로 출발한다.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가을 남자들

 

버스는 4시간 반 걸러 함양 백무동시외버스정류소에 도착한다. 이곳 마을 이름의 유래는 원래 100명의 무당이 거처하던 골짜기라 하여 백무동(百巫洞)이었는데, 와전되어 백무동(白武洞)으로 변했다고 한다. 주차장 근처 상가를 거쳐 백무동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백무동에서 장터목을 오르는 코스는 백무동탐방지원센터를 출발, 하동바위를 지나는 고전적인 루트와 가내소폭포와 내림폭포를 거치는 한신계곡 코스가 있는데, 한신계곡으로 오르면 약 2시간 정도 더 소요된다. 하동바위로 오르는 코스는 등반 거리는 비교적 짧지만 경사가 급하여 초보자는 다소 힘들어하는 코스다. 

 

산 들머리 백무동탐방지원센터

 

산 들머리를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나 하동바위에 도착한다. 간간이 산새 지저귀는 소리에 산중 적막이 깨어질 뿐 주위는 깊은 침묵뿐이다. 촉촉한 이끼는 길가의 크고 작은 바위들과 고목 둥치를 덮어 소곤소곤 말을 걸고 있고 생생하게 살아서 숨 쉬는 숲의 향기가 폐부로 깊숙이 밀려든다. 참샘에 도착해서 소지봉을 오르는 힘든 오르막에 대비하여 간식으로 기력을 채운다. 발길을 재촉하여 소지봉에 다다르니 숨이 턱에 닿는다. 소지봉부터 장터목까지는 경사가 완만한 산죽나무 오솔길이어서 호젓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이끼가 살아 숨 쉬는 백무동 숲길

 

백무동에서 약 4시간 정도 걸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한다. 장터목은 옛날 산청의 시천 사람들과 함양의 마천 사람들이 닷새에 한 번씩 만나 물물교환을 하는 장터였기 때문에 장터목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천왕봉 일출을 보러 전국에서 등산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오늘도 그 시절 장터 마냥 사람들로 북적인다. 해 질 무렵 대피소에서 바라본 반야봉의 노을이 마치 여인의 아름다운 둔부에 석양이 내려앉은 듯하여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본다. 

 

어둠이 내려앉은 장터목대피소  

 

새벽에 일어나 느긋하게 행장을 꾸리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천왕봉으로 향하는 나무데크를 올라 운무 속 산길을 따라간다. 제석봉을 오르는 등산로 좌우로 고사목들이 운무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사목의 사라진 숨결을 느끼고 싶어 잠시 길을 멈춘다. 사람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제석봉은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어 버렸지만, 앙상한 마른 가지만 가진 죽은 나무가 좌우 대칭을 유지한 채 말끔한 흰색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지리산의 험한 바람을 견뎌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고 한편으로 처절하리만큼 아름답게 느껴진다. 

 

죽어서 더 아름다운 제석봉의 고사목

 

안개와 구름이 만들어 내는 몽환의 선계에 빠져 천왕봉 가는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모든 잡념은 사라지고 고요한 적막 속에 놓여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연과의 교감과 합일을 통해 비로소 살아있음으로써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변화무쌍한 자연을 통해 긍정하는 힘의 지혜 또한 배우게 되리라. 이따금 씩 들려오는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와 우리 일행을 포함해서 그만의 빛나는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통천문 계단을 오르기 전 암반에 거친 뿌리를 박은 한그루의 낙락장송이 처연하게 대자연의 거센 바람에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통천문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낙락장송

 

통천문을 올라서 얼마간 더 가파른 암벽 길을 오른다. 마침내 천왕봉 정상이다. 정상은 몇 발짝 끝으로 사방이 암벽 낭떠러지다.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고,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6.77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지리의 주 능선

 

정상에는 사당인 성모사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아진 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聖母祠)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 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천왕봉에 올라 지혜를 얻은 사람들

 

천왕봉 표지석에 몸을 기댄 채 홍조된 일행들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답다. 맑은 날에는 남쪽으로는 첩첩히 요동치며 야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남해 바닷가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남 방향으로 돌아서면 광양 백운산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는 지나온 지리산 주 능선이 파도치듯 길게 뻗어있다. 북으로는 지리산 최고의 계곡인 칠선계곡이 내려다보이고, 가까이에 창암산, 범화산이 또렷하며 함양 읍내 건너 멀리 백운산과 덕유산 연릉이 연자색으로 둘러쳐져 있다. 시선을 북동 방향으로 돌리면 중봉, 하봉으로 이어진 능선길이 가까이에 있고, 약간 멀리 웅석봉의 기나긴 능선이 성곽처럼 누워서 지리산을 호위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경호강 물줄기가 아른거린다.

 

천왕봉 남쪽으로 산들이 첩첩이 요동치며 남해로 이어진다. 

 

1시간 가량 정상에서 머물다 하산한다. 이정표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중봉, 대원사로 이어지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중산리 방향이다.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대표적이며 고전적인 산길이다. 천왕봉에 이르는 제일 짧은 코스로 등산인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며, 옛날 시인 묵객들도 대부분 이 길로 천왕봉을 올랐다. 천왕봉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전부 중산리로 내려와 계곡의 수량이 항상 풍부해 지리산의 깊은 맛을 더해준다.

 

개선문(1,660m)은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남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이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전쟁터에서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불암 터 근처로 내려서니 지리산의 주 능선이 도열해 있다. 한참을 바라보며 서로 석별의 아쉬움을 나눈다. 중산리 계곡 너머로 장쾌하게 뻗어내린 일출봉 능선과 함께 내려온다. 산청과 하동 쪽 산자락과 그 너머 남해바다는 아직도 운무에 덮여있다.

 

산 날머리인 중산리는 운무에 덮여있다. 

 

법계사로 내려서기 전에 커다란 마당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 오니 비로소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약 30분간 쉬면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지리의 절경을 감상한다. 바람결이 코끝을 스친다. 마음껏 들여 마신다. 법계사로 내려서는 철계단 직전에 있는 전망 좋은 마당바위에서 구름이 걷히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법계사는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해발 1,450m에 위치한 절로,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다.

 

법주사 일주문. 대처 사찰에 비해 크기가 작고 폭이 좁은 독특한 구조이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때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수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법계사 삼층석탑

 

법계사 바로 아래 위치한 로타리 대피소에서 중산리로 길을 잡고 내려선다. 걸으면 걸을수록 백두대간은 더욱 살가워진다. 몸은 대간 길에 머물기 원하고 마음은 대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기 원하다 보니 친밀함은 더욱 가까워지고 그리움은 더욱 깊어진다. 그런 마음의 길을 이어 나가기 위해 눈에 가득 담아본다. 하산 길에 만나는 망바위(1,140m)는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 김일손은 이 바위를 세존암이라 불렀다.

 

삼거리 계곡의 출렁다리를 건너고 장터목대피소와 천왕봉의 삼거리를 지나면 칼바위가 나온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홈바위는 장터목을 오르는 계곡에 있다.

 

이성계의 전설이 담긴 칼바위

 

야영장을 지나서 내려오면 법계교가 나온다. 다리 아래로 중산리 계곡에서 내려온 옥류가 기암에 구슬 물방울을 튀기며 도도하게 흐른다. 다소 지루한 급한 경사길을 꾸준하게 내려서면 계곡 아래로부터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중산리 상부의 두 골짜기가 합쳐지는 합수부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는 대지의 맑은 핏줄, 젖줄이 되어 항시 영원토록 젊으리라. 중산리탐방안내센터에 도착해서 근처 식당에서 온수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산행 뒷풀이 시간을 가진다. 산채비빔밥, 버섯파전에 지리산 더덕막걸리가 금새 바닥을 드러낸다. 이 순간 우리는 주선(酒仙)! 더 이상 무엇이 부러우랴.

 

이틀 동안 지리의 품속에 안겨 자연이 주는 삶의 지혜를 가슴에 가득 담고서 서울로 향하는 차량에 몸을 싣는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지리산 연봉을 보니 신갈나무 잔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 굴참나무 둥지로 날아드는 산새 소리, 외로운 나무들이 서로 보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순간 나도 지리산도 다시 숨이 멎는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3.11.13 08:53 수정 2023.12.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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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