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오산에 있는 임진왜란 전적지 독산성을 찾았다. 독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산성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독산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주변이 넓은 평야지대이고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왜군에 맞서 수성전을 펼치며 서울 수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던 곳이 독산성이다.
1592년 4월 13일(이하 날짜는 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신립 장군이 이끄는 8천 명의 관군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하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임진년 그 해에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조선을 버리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이 싹텄다. 5월 7일 남해바다 옥포에서 이순신의 첫 승전보가 들려오고 육지에서는 지리멸렬했던 관군을 대신하여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경상도 의령에서 곽재우가 봉기했고, 고령에서 김면, 합천에서 정인홍, 영천에서 최응사 등의 의병부대가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김천일, 고경명, 김덕령 등의 의병이 궐기했고, 충청도의 조헌과 영규, 황해도의 이정암, 함경도의 정문부도 대표적인 의병장들이다. 이들은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적의 육상 병참선을 위협했다.
왜적의 침공 루트에 있었던 경상도 의병들은 대부분 스스로 모인 자모의병(自募義兵)으로 분류된다. 지역의 유생들이 사발통문을 돌리면 주변에서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반면 적의 발길이 닿지 않은 전라도 지역은 조정에서 불러서 모은 의병들이라 소모의병(召募義兵)이라고 한다.
경상도 의병들은 주로 영남에서 활동을 했지만, 김천일을 비롯한 전라도 의병들은 조정의 명령에 의해 전라감사 겸 순찰사였던 이광의 관군을 따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이를 남도근왕군이라 하며 약 5만 명이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사령관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었고 광주 목사 권율이 중위장으로 함께 참전했다.
남도근왕군은 말이 근왕군이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6월 3일 독산성을 거쳐 용인으로 진출했을 때,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조총병 1,600명의 기습을 받아 선봉이 무너졌다. 6일 광교산 자락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다가 적 기병대의 기습을 받은 남도근왕군은 일시에 와해되어 버렸다. 혼비백산한 이들은 뿔뿔이 흩으져 남쪽으로 다시 내려갔다. 오직 권율 휘하의 군사들만 편재를 유지한 채 온전하게 광주로 후퇴했다. 용인전투에서 승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후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한 수군장이었다. 용인전투 패배로 전라감사 이광은 파직되었다.
이 무렵 왜군은 곡창 호남을 공략하기 위하여 대둔산 자락의 이치 고개를 넘어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권율과 동복 현감 황진 등이 이끄는 관군과 수 천 명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왜군 제6번대를 1592년 7월 8일 가까스로 이치에서 막아내고 승리했다. 이날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왜 수군 주력을 섬멸한 한산대첩이 있었던 날이다. 이치전투 승리로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한산대첩과 이치전투 승리를 계기로 임진왜란의 판세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1592년 10윌 10일 경상도에서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려던 왜군 3만여 명은 진주성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고 물러났다.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명나라 원군 본대가 1592년 12월 25일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은 조선의 승병들과 함께 1593년 1월 6~9일 평양성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몰아내고 성을 탈환했다. 날씨는 겨울 혹한이 시작되었고, 남해에서 서해로 통하는 해상 보급로는 이순신이 완벽하게 차단해버렸다. 육상 보급로마저 의병들이 유린하니 진퇴양난에 빠진 왜군은 남쪽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권율은 서울 수복을 위해 북진했다. 권율은 관군과 의병 약 1만을 이끌고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으로 들어가 서울 수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1592년 12월 11일 일본군 제8번대 약 2만여 명이 독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권율은 선거이, 조경, 승병장 처영 등과 함께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성을 지키는 수성전을 펼쳤다. 조선군은 소수의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수시로 야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군을 교란시켰다.
이에 일본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독산성을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제방을 막고 있던 일본군을 야간에 기습하여 물길을 확보했다. 이때 전라도 도사(都事) 최철견이 의병 약 3천 명을 모아 원군으로 달려오자 왜군은 포위망을 풀고 퇴각했다.
독산성에서 승리한 권율은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한강 하구의 행주산성으로 진출했다. 이 즈음 평양성을 탈환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서울로 진격해 오다가 1월 27일 벽제관에서 대패하고 다시 개성으로 물러났다. 평양으로 진출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경도로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철군을 시작하여 서울 쪽으로 내려왔다.
서울 근교에 집결한 왜군 약 3만 명이 1593년 2월 12일 새벽부터 행주산성을 9회에 걸쳐 축차적으로 공격해 왔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약 1만의 조선군은 화차, 비격진천뢰 등 신무기를 적의 주공격로에 배치하고 가파른 지형을 활용하여 목책을 치고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부녀자들도 치마에 돌을 싸서 날랐다는 야사가 전해오는 행주산성전투는 극적이었다. 조선군의 화살이 거의 바닥날 즈음 방어선 일부가 뚫리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 승병 1천5백여 명이 필사적으로 백병전을 벌여 뚫린 방어선을 회복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방장을 지낸 충청수사 정걸이 위기의 순간에 서해를 통하여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싣고 와서 행주산성에 풀어놓았다. 결과는 조선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오산에 있는 독산성에서 권율 부대가 수성전을 펼치며 승리한 것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전초전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 수복을 위한 교두보였던 독산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면 행주대첩은 없었을 것이다. 독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권율 장군이 전투를 지휘했던 세마대(洗馬臺)가 있다. 하얀 쌀로 말을 씻어 내려, 멀리서 왜군이 보면 물로 말을 씻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성안에 물이 많이 있는 것처럼 기만전술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년 그 해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권율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 두 영웅은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독산성 세마대 바로 아래는 역사가 오래된 보적사라는 절이 있다. 독산성을 일주한 후 보적사 대웅전에 들러 독산성전투에서 순국한 선열들에게 묵념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