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맨발

허정진

깊은 산속 농막에서 잠시 지내본 적 있었다. 혼자였다. 사느라 목매달았던 모든 것을 잃고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오직 몸으로만 살아야 하는 맨발 같은 생활이었다. 산속이라 그런지 겨울에 눈도 자주 오고 적설량도 많아서 길이 없어질 만큼 천지를 뒤덮었다.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온 세상이 밤새 눈으로 가득 차 있고, 멀리 산 까치 울음소리에는 고요와 적막이 뚝뚝 떨어졌다. 하얀 숫눈 위에 목 길고 눈이 큰 고라니 발자국이 선연히 남겨져 있었다. 추운 밤에 산장 근처는 왜 찾아왔을까. 따뜻한 불빛이 그리웠는지 창밖에 잠시 머문 듯 산허리로 다시 돌아간 흔적이었다. 외로웠다면 그도 맨발이다.

 

누구나 맨발로 태어난다. 몸 중 가장 늦게 세상에 나와 제일 낮은 곳에서 평생토록 무거운 하중을 견뎌내는 것이 발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포장하지 않은 맨발 그 자체가 순수하고 성스러운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부처님도 무소유의 맨발로 중생을 제도하며 살다가 열반에 들었고, 예수님도 자신을 낮추며 겸손과 섬김의 본으로 제자들의 맨발을 씻어주었다. 문태준 시인은 어물전 개조개에서 맨발을 보았고,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를 외치며 맨발로 욕조를 뛰쳐나왔다. 영화 <라이언>에서는 입양 후 성인이 된 ‘사루’가 인도의 친어머니를 찾아가는 길도 맨발이었다.

 

세상에 맨발 아닌 것이 없다. 산도 나무도, 바람에 떠다니는 구름도, 엄동설한에 꽁꽁 얼어붙은 강물도 모두 맨발이다. 철새들 무리에서 홀로 낙오된 청둥오리, 장대비를 피해 나뭇잎 아래 찾아든 풀벌레, 아슬아슬한 담장을 타고 넘는 길고양이들도 모두 맨발이다. 어두운 땅속에 뿌리를 둔 풀과 나무도 맨발로 꽃과 잎을 피워내고, 비바람 맞으며 서 있는 전봇대도 맨발로 산 너머 불을 밝힌다. 맨발이 날개가 되어 허공을 날아오르는 영혼들은 가고 싶은 길보다 가야만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하는 고독함이 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나 길 위에 맨발로 선 사람들은 있다. 먹고 산다는, 그 날것의 고통과 준엄함에 야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궁핍과 허기일 수도 있고 아픔과 슬픔일 수도 있다. 밤낮도, 안팎도 없다. 위험과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체면과 설움도 참고 견디어 낸다. 발바닥의 힘만으로도 험난한 세상을 당차게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지치지도 않고 포기하는 법도 없다. 생명은 살기 위해 어떤 조건과 환경에도 도전하게 마련이지만 그 밑천은 달랑 맨발뿐이다.

 

우여곡절 없는 인생은 없는 것 같다. 산다는 것 자체가 굴곡진 계곡처럼 오르고 내리는 일이어서 어쩌다 보면 맨발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편하고 안전한 신발 한 켤레 없이 맨발로 헤쳐 나가야 하는 세상은 얼마나 두렵고 막막한 일인가. 맨발이란 밑바닥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며, 홀로 서는 것이고, 꿈을 꾸는 자이며, 지켜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맨발의 절실함으로 나와 가족과 세상을 만들고 나의 존재를 완성한다.

 

나도 그랬다. 집안의 맏이로서 기둥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너무 이른 나이의 결혼으로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사느라 항상 불안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더구나 빈손으로 미국에 이민하고 나서는 삶이 어름사니 외줄 타기 같았다. 자기 나라에서 나고 자란 기득권과 기회를 포기하고 떠난 그곳에서 나는 맨손, 맨발로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줄과 밥벌이가 매달린 일에는 아무리 두툼한 양말과 신발을 꺼내 신어도 발은 시리기만 했다. 

 

밥을 벌기 위한 길에 평탄함은 없다. 아무도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는 길을 허허벌판에 홀로 걸어가는 외롭고 불안한 여정이었다. 남들은 사랑과 행복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가는데 혼자만 고통과 불행의 등짐을 지고 걷는 것 같았다. 삶이 적란운처럼 우중충했다. 생계를 짊어진 발바닥의 통점들이 삶을 언제나 긴장과 강박 속에 놓여 있게 했는지, 어디선가 뒷배가 갑자기 나타나“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어!”란 한마디조차 얼마나 듣고 싶어 했는지.

 

발에 난 상처는 삶의 흔적이고 증명이다. 한 생애의 문신이며 이력서이다. 신발에 가려져 있을 뿐 찢기고 갈라지고 부르트고, 수없이 맺힌 물집이나 동상까지도 상처 없는 맨발은 없다.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는 가시밭길에 상처 나고 짓눌린 삶에 오체투지로 새겨진 한 사람의 인생사가 있다. 그래서 맨발 속에 감춰진 오래된 유산은 갑골문자로 기록한 직립의 자서전이다. 세월의 눈물을 담은 산증인이며, 먹과녁 같은 초행길을 가는 지도와 나침반이다. 

 

따뜻한 봄 햇살에 맨발을 꺼내놓고 흙밭을 디뎌본다. 감촉이 부드럽고 감미롭다. 대지의 민낯이 전하는 삶의 이야기들이 발바닥을 간질인다. 이제 삶이 울렁거리던 시간은 지났다. ‘다쳐본 적이 없는 자가 흉터를 알 수 없다.’라는 말처럼 실패와 좌절과 나락의 시간을 견뎌왔던 사람들은 안다. 힘들었지만 그 상처를 이겨낸 영광은 자신들의 영혼 안에 숨어있었던 맨발의 힘이었다는 것을. 밤낮없이 서둘러 뜀박질만 하던 그 맨발은 이제 시간을 다 써버린 사람처럼 느리고 천천히 걷는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맨발로 와서 세파를 견디다 맨발로 돌아가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발 없는 뱀처럼 헐렁한 곡선으로 길을 여는 바닥이면서도 뿌리인 그 발, “그래! 수고했다.”라며 이제 조금은 쉬어도 좋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3.19 10:17 수정 2024.03.1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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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