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서원의 효시(嚆矢) 소수서원(紹修書院)

홍영수

소수서원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성리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했다. 그 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조정에 사액을 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명칭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리고 안축과 안보가 추가 배향되었다. 

 

소수서원의 설립 배경은 그 당시 향교가 쇠퇴하는 반면 성리학이 융성하던 때이다. 그리고 사림의 성장하는 시기다. 관학인 향교가 많았는데 설립 초기의 목적과 달리 운영과정에서 관리를 양성하는 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순수 교육기관의 성격이 퇴색되었고 결국. 관학의 부진은 결국 사학의 발달을 촉진하는 대표적인 사학이 바로 서원이다. 이때가 인간의 이성과 세계의 본질 탐구가 관심사였을 때이다.

 

고려시대 후반기에 받아들여진 성리학은 조선시대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적 모순을 성리학의 이념에 근거하여 극복하려는 사상체계였다. 훈구파의 유교와는 달리 유교와 불교의 양립에서 벗어나 불교를 비판하고 충효를 중시했다. 따라서 인륜을 바탕으로 사회 규범을 실천하고 장려했으나 익히 알고 있듯이 네 번의 사화, 즉 연산군 이래 무오, 갑자, 기묘, 을사 士禍를 거치며 사림파들은 학문에 몰두하기 위해 고향으로 낙향하여 향리나 산림에 은둔하면서 지방의 지주 세력으로 기반을 굳혔다. 그리고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명종 대에 이르러 사림 정치를 형성하고 계보를 이룬다. 

 

그 결과 부관참시를 당했던 김종직을 비롯해 영남 사류들이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주목받게 된다. 특히 이들은 교육과 교화를 표방하면서 사림의 결집을 도모하면서 서원을 설립하여 향촌의 활동을 강화하는 구심체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새벽에 출발해 가는 곳, 소수서원이다. 사실 전국의 서원 여러 곳을 다니면서 느낀 점은 철학이나 사상, 그 어떤 분야든 역사의 시대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원의 특색은 제사 기능과 교육이다. 그리고 선대의 현인들을 존경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초기 서원 보급에는 퇴계 이황의 노력과 영향이 매우 컸다. 무엇보다 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가의 통제와 과거 시험에 구속된 교육이 이루어진 관학인 성균관에 비해 서원 교육은 도학적 성리학에 중점을 두었고 선비 양성을 위한 입문으로는 소학小學, 가례家禮를 배우면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근본학문으로 삼았다.

 

소수서원의 이름은 명종 때 대제학인 신광한(1484-1555)이‘소수(紹修)로 정했다. ‘紹修’는 ‘자기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유학의 정신을 이어간다.’ 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유학을 잇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 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나라에서 인정받는 것이므로 서원의 사회적 지위가 격상될 뿐만 아니라 서원에 딸린 토지에 대해서는 면세 혜택이 주어지고, 소속 노비들은 면역의 특전을 누릴 수 있는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죽계천 건너에는 주세붕의 글씨로 전하는 붉은색의 ‘경(敬)자와 퇴계 이황의 글씨로 전하는 흰색 글씨의 ‘백운동(白雲洞)’이 커다랗게 음각되어 있다. ‘敬'은 성리학에서 수양론의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의미이다. 맹자 때는 ‘공경’하는 의미로, 공자 때는 ‘근신’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또한 ‘敬’은 주역에 나온 “군자경이직내 의이방외(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직(直)은 바른 위치를 말한 것이고, 방(方)은 그 의리를 말한 것이다. 군자가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행동거지를 방정하게 하게 한다는 뜻으로 안향과 퇴계의 근본 사상이기도 하다.

 

고전의 책을 읽을 때 특히 조선조에서 중국의 대 사상가나 큰 문장가들의 호, 또는 그들이 학문했던 장소 등을 빌려와 경모(景慕)하면서 자기 수양의 모범으로 삼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시각이 모화(慕華) 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당대 정치적, 시대적 배경에서는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도 경모해야 할 주자학의 대가들 문장가들도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의 입구에는 학자수學者樹로 불리는 노송들이 많고 그 옆으로 흐르는 죽계수를 보았는데 문득 서원에 배향된 안축(安軸)의 경기체가인 ‘죽계별곡(竹溪別曲)이 떠 올랐다. ‘아, 물 맑고 산 높은 경치 그 어떠하니잇고’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의 흥망에도 풍류가 한결같은 순정성 안,

다른 곳도 아닌 오직 취화봉에 임금의 태 묻었구나. 

아! 이 고을이 중흥하니,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청백한 기풍으로 관아를 울리더니 두 나라에서 급제하였네.

아, 산 높고 물 맑으니, 이 풍경이 어떠합니까?

 - 안축安軸의 「죽계별곡」1장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4.03.25 06:41 수정 2024.03.25 10:37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