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서천기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벌포 역사순례

김용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서천기행 

 

서천을 찾은 것은 역사적인 대사건의 현장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서천이라고 하지만 장항이란 말이 낮에 익다. 장항선 기차의 종착역이며 항구인 그곳엔 민족의 수난사가 적나라하게 점철되어 있었다. 당나라군을 물리친 기벌포 해전,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백광전투, 최무선이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섬멸한 진포대첩, 일제농산물 수탈 항구 등 큼직한 역사적 흔적을 더듬어 조명하는 기행이었다. 내려갈 때는 서울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서울, 천안, 예산, 홍성, 대천, 서천 장항에 이르고 올 때는 서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대천. 서산, 홍성, 평택을 거처 서울에 이른다. 

 

장항은 장항선 종착역이 있는 항구다. 강 건너 맞은편에 군산항이 있다. 남쪽에 군산, 북쪽에 장항, 합성하여 군장이라고 일컫는다. 일제는 군장에서 호남평야의 농산물과 석탄, 광석등 한국 자원을 수탈해 갔다. 당시 군장은 공업 도시로 원산과 더불어 가장 번창한 왜관 도시이며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곳이었다. 

 

그러나 서천은 잃어버린 세월의 환을 되새겨 느끼는 슬로우 도시로 변했다. 서천의 해변을 거닐다 보면 장항 동 제련소에서 연기가 펄펄 나던 그 화려한 시절을 상기하는데 지금은 갯벌 위에 덩그렇게 내 버려진 폐선과 어구들, 더럽혀진 갯벌과 해변에서 세월의 무상을 느낀다. 

 

장항은 역사적인 대 사변이 일어났던 곳이다. 당나라 소정방의 6만 대군이 침입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신라 김시득 장수가 기벌포(진포) 대전에 승리하여 당나라를 내쫓았던 현장이며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로 550척 왜구를 무찔렀던 전장이었다. 그리고 일제 땐 수탈 항구로 번창했는데 지금은 낙후한 슬로 시티 어촌이 되어 곳곳에 과거의 영화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서천 여행의 진미

 

본격적인 서천기행은 마량포 홍원항에서 힘찬 봄 쭈꾸미 미향을 음미하며 시작한다. 마량포는 꼴갑(꼴뚜기, 갑오징어), 쭈꾸미, 새조개, 꽃게, 자연산 전어, 간자미의 집산 항이다. 쭈꾸미 사브사브는 꿈틀거리는 놈을 끓는 야채 국물에 넣어 익혀 먹는데. 머리부터 담가야 잘 익는다. 다릴 잘라 먹고 머리는 다시 가위집을 넣어 더 익히면 주꾸미 최고 맛을 느낄 수 있다. 

 

쭈꾸미 향미에 취한 후 다시 승용차는 아펜젤로 기념관을 지나 한국 최초의 성경 전래 기념관을 둘러본다. 이곳으로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래한 곳이다. 1816년 영국의 해군탐사 메레이 멕스웰 대령이 군함을 이끌고 마량진에 서해안 지리 탐사차 왔다가 이곳 첨사인 조대복에게 성경을 선물하고 탐사를 허락받았다. 그들이 조선 지도를 만들어 서양에 알렸다. 해송방풍림이 길게 늘어선 춘장대 해수욕장에서 라돈과 비철 금속 떡모래사장을 걸으며 힐링의 자유를 만끽한다. 떡모래 춘장대 해변에 해풍을 맞으며 갯벌에 나뒹굴 듯 얹혀있는 폐선이 애처롭다. 

 

다시 승용차는 마량리 동백꽃 숲으로 향한다. 서해 일출과 일몰의 명소인 동백정에 올라 먼 서해의 황톳빛 바다를 바라며 동백꽃 향기에 취해본다. 동백정에 동백꽃이 만발하였다. 동백은 3색의 꽃 색을 가진다. 빨강 동백은 열정의 꽃말을 가졌고 노랑 동백은 그리움과 하얀 동백은 순결의 의미가 있다. 십일홍이란 말이 무색하게 동백은 진 후에도 아름다운 빛을 간직하는 것이다. 동백꽃은 꽃잎이 5잎과 7잎이 있다. 7잎 동백은 붉고 아름다우며 씨가 굵다. 동백은 꽃보다 씨를 선호하여 식용과 화장유의 원료이다.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를 정도면 조선 땐 양가 댁 규수였다. 동백정의 동백꽃은 서천을 찾는 여행자에게 한층 낭만과 사랑을 젖게 한다. 

 

서천의 낭만은 서해랑 56길에서

 

서해랑 56길은 서해의 자연풍경을 즐감하는 곳이다. 손대지 않은 해변과 버려진 어구와 낡은 집들, 그리고 어수선한 해변이 나그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월하리를 한참 걸어 다사항을 지나 송석리에 이른다. 송석리에서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된다. 송석리. 자동차 캠프장의 해변 갯벌에 우뚝 솟은 검은 매 바위가 녹슨 폐선 같았다. 매바위 공원을 지나 해찬 솔길 트래킹은 여행의 절정을 이룬다. 드넓은 송림욕장엔 한참 맥문동이 한여름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맥문동과 송림이 우거진 산림욕장을 사뿐하게 걸어가는 기분은 그야말로 서천을 찾은 슬로 시티 행보였다. 1.5km의 맥문동 송림 욕장을 지나면 250m 스카이 워크에 오른다. 황해와 서천의 갯벌이 황량하게 펼쳐져 있다. 기벌포 해변이라고 한다.

 

스카이워크 기벌포 전망대에서 먼바다를 응시하며 기벌포 해전의 승전보를 듣는다. 과연 이 갯벌에서 어떻게 승전고를 울렸을까? 무명의 장수가 당나라를 내쫓고 신라를 구한 대첩이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내려고 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고 당나라는 안동도호부 대함대를 이끌고 기벌포 해변으로 들어와서 신라 전복을 기도했다. 

 

“저 많은 대군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대장군 김삼광(김유신 장군의 장남) 한탄을 하였다.

 

“장군 염려 마세요. 적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아들 김윤중이 말했다.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김시득이란 제독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 그자가 누군데, 어떻게......?” 

 

김윤중과 김시득은 100척의 병선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마침내 500여 척의 1만5천의 당군이 밀물을 타고 기벌포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당나라 함선이 모두 갯벌 등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신라 수군이 당도하여 갯벌에 올라선 적군을 여지없이 대파하였다. 현장에서 4천여 명의 당군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밀물이 다시 들자 당군은 도망을 갔다. 대승리였다.

 

676년 11월에 금강 하류 진포대전(기벌포)에서 김시득 장수가 7년 동안 치러온 당나라와 전쟁을 종식했다. 문무왕은 당군을 몰아내고 당의 식민지배를 청산하였다. 하늘이 내린 천운이었다. 전투 중에 설인귀는 측천무후로부터 퇴각 명령을 받았다. 당시 티베트군이 당나라를 침범하여 위기에 처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티베트의 양면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서 신라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티베트전으로 병력을 빼돌렸다. 그 정보를 김시득 장수가 듣고 전투준비를 하였다. 676년 11월, 기벌포 대첩으로 당군을 신라에서 몰아냈다. 문무왕은 기벌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름 없는 장수 김시득을 불렀다.

 

“그대는 어떤 가문의 소장인가?”

“저는 김유신 장군의 서자입니다.”

“뭐라 대장군의 서자라고.......?”

“네,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싸웠습니다.”

 

그때였다. 대장군 김삼광(김유신의 장남)이 불쑥 나와 김시득의 목에 칼을 대었다.

 

“네 이놈, 어디서 굴러먹은 놈이 감이 대장군의 아들이라 하느냐?” 

“제가 분명 김유신 장군이 숨겨진 서자입니다. 이 증표로 확인해 보십시오.”

 그는 김유신 장군이 지녔던 김수로왕의 왕검을 내놓았다. 

“이 검은 잃어버린 아버님의 가야의 왕검이다. 네놈이 훔친 것이로다.”

“아버님이 내게 내린 진검입니다.”

“삼촌이 맞습니다. 아버님.”

 

김윤중이 나섰다. 문무왕이 진검을 확인하였다. 대장군 김삼광은 칼을 들고 울먹였다.

 

“장군의 검이 맞도다. 하하하 역시 대장군의 아들이로다.”

 

김시득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아들이었다. 

 

해찬솔 길을 걸어 장항항에 이른다. 장항항은 황해와 금강 하류의 물류집산지였다. 항구에 높이 솟은 장항제련소 굴뚝은 서천의 랜드마크이며 일제의 조선 경제 침탈의 현장이다. 장항제련소는 한국 최초의 구리제련소였다. 당시 장항역 광장엔 엄청난 수탈 농산물과 산업 재료 화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장항제련소는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되어 동 제련공장, 비철금속제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64년에는 연 제련공장이 준공으로 1974년과 귀금속제련 공장과 1984년에 주석제련공장을 준공하였다. 나아가서 동파이프공장, 용광로 공정을 폐쇄하고 전기동 공정으로 전환하였다. 1989년 럭키금성에 인수, LG금속, 동합금 압연소재 부품공장이 신설되었다.

 

황금봉 장항엔 꼴갑어 수산물 집산지로 늘 꼴갑(골뚜기와 갑오징어) 판장을 이루었다. 군장항의 최고 명품 어물은 꼴갑숙회 일 것이다. 나도 잠시 소주 한잔을 기울며 꼴갑 숙회를 맛본다. 일비였다. 항구 옆엔 장항선의 종점인 장항역이 있다. 지금은 장항역이 신역으로 옮겨간 후 옛 정취를 잃었다. 강 건너 두 항구를 오가던 나룻배의 낭만도 사라지고 군장 대교로 소통한다. 

 

서천의 역사적인 명소를 찾아서

 

서천은 한산모시의 고장이다. 한산모시 옷을 입은 여인의 우아한 자태는 과연 선녀로다. 모시하면 모시떡 정도로 알고 있지만 모시는 최고급 천으로 이용하였다. 모시대는 성장하면 2m 이상의 키로 자란다. 이 모시대 껍질을 벗겨 덧층을 긁어내고 속 줄기는 말려 잘게 쪼개 실로 만들어 이어서 베틀에서 천을 짠다. 탈색 표백한 하얀 천이 한산모시다. 그 가늘고 정교함이 감미롭다. 하얀 모시로 여름옷을 만들어 입으려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 우아하고 귀티 남이 신선이로다.

 

금강하구는 물의 정원이다. 하구둑을 상하로 전개되는 저수지는 수생 동식물이 서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이 늪에 수많은 철새가 도래하여 터를 잡고 있다. 수변 공원의 국립 해양 생태박물관엔 5,200종의 해양 식물의 생태를 전시하고 있다.

 

서천의 인물하며 목은 이색과 월남 이상재를 떠올린다. 이색의 생가에서 불사이군의 충절을 되새긴다. 이색은 고려말 최고의 지성이며 재상이었다. 아버지 이곡이 이룬 유교 바탕 위에 절개를 지킨 영상으로 유명하다. 이곡은 영해 군수 때 그곳 유지 김택의 딸과 혼인하여 이색을 낳았고 이색은 영해에서 자랐지만, 서천에서 정신적 바탕을 길렀다. 원나라에서 장원급제한 한림학자였다. 이색의 생가엔 지조를 상징하는 배룡나무 숲이 화사하게 꽃을 피워 불사이군의 충절을 느끼게 하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에서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긴다. 선생은 조선의 정부 정무국장일 때 조. 일 합병에 분개하며 퇴임하여 독립운동과 사회운동가로 활동하였다.‘나라가 없음은 민족은 금수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명언이었다. 그리고 봉서사엔 국보 아미타여래 3전 좌상을 감상하고 고선 최대의 한옥인 이하복 고택에서 중부 지방의 ⌺자형 초가 가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철새 도래지인 금강 하구 신성리 갈대밭은 우리나라 4대 습지 중 하나이다. 갈대숲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고 호수와 늪, 갈대와 수생식물의 낭만적인 휴양지이다.  석양의 갈대숲에 내리는 철새의 군무는 과히 환상적이다. 강을 따라 벚꽃길에 아름다운 카페촌엔 젊은이들의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서천에서 잃어버린 1930년대의 풍물을 만난다. 시간이 멈춰버린 판교 마을의 옛 정취가 감탄을 자아낸다. 옛 거리, 일본식 가옥과 주택, 정미소, 거리풍경이 낯에 익은 일제 수탈의 산재 들이었다. 이렇듯 서천 기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보는 순례 여행이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

 

작성 2024.03.28 06:19 수정 2024.03.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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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