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진 칼럼] 문패, 나를 공개하다

허정진

사람은 집이 없이 살 수 없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식구들을 보호하고, 먹고 자고 생활하는 필수적인 주거 공간이다. 휴식과 행복을 주는 삶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이다. 우리가 몸담고 부대끼며 사는 공간이며 우리 삶의 배경이자 중심이다. 집은 형태와 장소이자 살아가는 이유이며 의미가 되기도 한다. ‘

 

동네 골목 어귀에 새집이 들어섰다. 아담한 단층 양옥에 잔디 마당도 널찍하고 정원수도 조형미가 돋보인다. 철제 꽃장식으로 된 나지막한 울타리도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여 시원스럽고 보기 좋았다. 그 출입문 곁에 예쁜 서각 문패가 있었다. 둥그스름한 나무판에 산뜻한 한글체로 그들 부부와 자녀 이름,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문구, 그 집의 주소지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아마 젊은 부부가 사는 모양이다. 옛날 문패와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집집이 대문 옆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문패가 걸려있었다. 장방형의 육면체 나무에 먹물로 이름을 쓰거나, 검은 바탕에 은종이를 붙이고 니스를 바르거나, 권세 있는 집에서는 반질반질한 대리석에 음각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지번(地番) 제도가 없어서 대부분 이름만 한자식으로 적었다. 우편물도 누구네 집의 누구라는 식으로 문패에 의해 배달이 되었기에 그 위상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 집의 주인이며 호주라는 뜻이고 가장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했다. 외부인의 절대 불가침 영역이고, 식구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성역의 출입구였다. 문패는 이 조그만 제국의 간판이었고 한 집안의 살아있는 기표(旗標)이자 명예였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남의 집 문패를 훔쳐 가는 일도 있었다. 아들자식이 많거나, 자녀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집의 문패를 떼어다 삶은 물에 밥을 지어 먹으면 소원성취한다는 속설도 있었다. 

 

문패는 식구들의 안전지대이며 등대였다. 객지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말 없는 문패지만 그것을 마주한다는 자체로 더없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내 가족들이 있는 집이고, 나도 이 세상에서 누구에겐가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좋았다. 가야만 할 행간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을 때 고향 집의 문패를 생각하면 보이지 않던 힘과 용기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을 걸어놓은 대문 앞이기에 남들 입에 흉허물이 오르내릴 수는 없었다. 집 앞 골목도 깨끗하게 쓸고, 눈이 오면 식구나 길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치우는 일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과 ‘가정’을 지극히 여기는 우리 민족에게 문패란 한 집안의 응집과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문패는 자기 존재의 증명이고 정체성의 표상이 아닌가 한다. 체코 프라하 네루도바 거리는 그림이나 조각을 문 위에 내걸어 자신의 이미지를 표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패란 꼭 이름이 아니더라도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도 그 가옥이나 가족의 특징을 살려 감나무 집이나 대나무 집, 우물터 집, 목수 집, 쌍둥이 집, 오부자 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의미 자체가 그 집의 문패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웃음 띤 허수아비는 가을 들판의 문패고, 나이 든 정자나무는 내 고향 마을을 상징하는 문패다. 어쩌면 동물들이 자기 구역을 표시하는 배뇨도, 갯벌에 달랑게가 커다란 집게발 들고 지나간 발자국도 모두 그들의 문패인지도 모른다. 나뭇가지마다 봄이 되면 저마다 초록의 이파리를 내다 걸고, 꽃마다 자신만의 무늬와 빛깔로 하늘 한가운데 일필휘지 수놓는다. 모두 문패다. 

 

내 이름의 문패를 건다는 것은 이 집이 내 집이라는 뜻이다. 방을 얻어 같은 집에 산다는 이유로 함부로 문패를 달 수는 없었다. 문패 한번 달고 사는 것이 누구에게나 평생의 소원이었다. 가장의 자존심이고 삶의 자긍심이었다. 대명천지에 내 피붙이들이 살아갈 터를 만들었다는 성취감에 가장의 어깨가 우쭐해지는 날이었다. 내 집이란 의미가 붙으면 그 집은 작아도 궁궐이 된다. 고생 끝에 집을 장만하고 문패를 달 때는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왕후장상도 부럽지 않았다.

 

어린 시절이었다. 사업에 성공한 아버지가 읍내에서는 보기 드문 큰 저택을 지었다. 본채와 아래채, 넓은 정원과 커다란 창고까지 딸린 집이었다. 여분의 방들도 많아서 더부살이나 군식구도 있었고 멀리서 친지들도 수시로 들락거렸다. 문설주에는 아버지의 문패가 당당하게 걸려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집 구경하느라 대문을 기웃거리는 동안 우리는 부족함 없이 행복한 몇 해를 보냈다.

 

어느 날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식구는 갑자기 아래채로 살림살이를 옮기고 단칸방에서 옹색하게 기거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가족들이 내가 살던 안집으로 들어와 주인집이 되고 하루아침에 우리 형제는 남의 집 자식이 되어버렸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 앞에 서면 아버지의 문패는 떼어지고 새로 들어온 주인집 아저씨의 문패가 버젓이 걸려있었다. 마치 아버지란 존재가 없어진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문패가 사라진 그 집은 마치 쓰름매미가 벗어놓고 간 허물처럼 슬프고 헛헛하기만 했다. 

 

요즘은 문패를 달지 않는다. 예전처럼 평생 살기 위한(住) 집이 아니라 지금은 팔고 사는(買) 집이어서 굳이 문패가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주거 양식이 아파트로 변하면서 성씨나 이름 대신 몇 동 몇 호로 불린다. 단독주택도 번지수 표지만 있을 뿐 이름이 들어간 문패는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꺼리는 경향이다. 문패가 없어도 불편한 일은 아니지만 이름 대신 숫자만을 내걸고 사는 것이 바코드를 부여받은 기계 인간 같기만 하다. 내 집이 아니어서 문패를 달지 못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었지만 나를 드러내기 싫어 문패를 달지 않는 세상도 역시 씁쓸한 일이다.

 

문패는 나를 공개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향한 악의 없는 인사며 소통의 첫걸음이다. 내 명함을 꺼내놓거나, 차량이나 광고물에 회사 로고를 붙이거나, 선수들 유니폼에 이름을 새기거나, 농산물에 생산자 표기를 하는 것처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매체나 도구는 모두 문패다. 문패가 있어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생기고 타인을 향해 책임감 있는 자세가 된다. 선량과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자신과 가문, 학교, 회사, 조국의 얼굴과 문패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열심히 살자고는 했지만 당당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불이익을 받을까 봐 함부로 나서거나 정체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다거나 낯설다는 핑계로 혀 밑에 말을 감추고 숙주로만 살았는지도 모른다. 작은 댓글 하나 올리는데도 가명이나 익명화에 익숙했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의나 정의를 베푸는 참 의인의 노릇을 한 것도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의 그림자 속에 은폐, 수시로 가면을 바꿔가며 나의 이기와 체면의 경계에서 서성이지 않았나 싶다. 

 

동네 공터 은행나무가 먼 허공에 샛노란 문패를 불립문자처럼 내걸었다. 나도 문패를 달아야겠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지는 못하더라도 남 앞에 손가락질받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4.04.03 10:22 수정 2024.04.0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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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