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청산도에서 ′느림의 미학′을 즐겨보자

여계봉 선임기자

아침 일찍 완도 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한 청산도행 페리는 평일이라 승객도 차량도 그리 많지 않다. 뱃전에 서니 바닷물에서는 청보리 색 푸르스름한 방광이 일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다도해가 펼쳐진다. 청옥 빛 바다 위에는 옥색 비단에 고운 장신구처럼 박혀있는 작은 섬들과 그 사이를 유영하는 고깃배들이 보인다. 50분 만에 도착한 청산도 도정항 부두에는 갈매기들이 몰려나와 육지 손님들을 반긴다. 그제야 지금까지 마음속에 그대를 숨겨둔 그리움을 봄볕 밖으로 꺼낸다. 

 

남도 끝자락 청산도는 봄을 품은 섬이다. 청산도는 여기저기가 푸른 섬이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산도 푸르고, 청보리밭도 푸르고, 지붕도 푸르다. 그래서 청산(靑山)이라는 이름이 전혀 낯설지 않다. 

 

느림의 섬 청산도에 유채꽃과 청보리가 바다에 치마폭을 담그고 있다.

 

청산도 여행의 백미는 봄바람에 살랑이는 청보리와 유채꽃이 절정인 4~5월이 적기다. 2007년 12월 아시아에서 최초로 청산도가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되면서 만들어진 슬로길은 테마 별로 짧게는 2km에서 길게는 6km까지 11개의 코스 17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합치면 42,195km에 이른다. 매년 봄에 슬로시티 걷기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붐비는 봄, 가을철의 성수기와 주말에는 간편하게 배낭만 메고 들어와 무료 순환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청산도 슬로길(완도군청 제공)

 

도정항에서 산허리 한 굽이를 넘어서면 언덕 위에 유채밭이 넓게 펼쳐지면서 너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당리 언덕이 나온다. 산자락 끝 포구 가까이 까지 비탈을 일구어 만든 유채밭과 여남은 채 되는 어촌의 정경이 그리도 안온하게 느껴진다. 남도의 원색, 밭이랑의 검붉은 황토, 보리밭 초록 물결 사이로 선명히 드러나는 노란 유채꽃밭에 잠시 넋을 잃고 풍경에 빠져든다. 바로 슬로길 1코스인 서편제 촬영지다.

 

하루 전 비바람에 몸을 누인 청보리가 해풍에 몸을 다시 세워 춤을 추는 푸른 들판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영화 서편제의 장면 장면이 퍼즐이 맞춰지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청산도 당리 언덕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촬영지다. 소리꾼 유봉과 의붓딸 송화, 그리고 동호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청보리밭 사이의 황톳길에서 진도아리랑에 맞춰 어깨춤을 추던 모습은 서편제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이다. 근처 주막에서 청산도 막걸리에 파래 해물전을 곁들이며 서편제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진도아리랑 한 자락을 어설프게 불러본다. 금세 불콰해지지만 오르는 취기는 해풍이 부드럽게 달래준다. 

 

서편제 촬영지는 청산도 슬로길 11코스 중 가장 사랑받는 코스다.

 

‘봄의 왈츠’ 드라마 세트장 아래로 보이는 도락마을 풍경은 가히 예술이다. 희한한 건 이곳 풍경이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곡조와도, ′봄의 왈츠′의 이국적인 서정과도 더없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아래쪽에서 보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 위쪽에서 보면 가장 이국적인 풍경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과 의붓딸 송화가 어깨춤을 추던 청보리밭

 

드라마 세트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화랑포길은 청산도 서남쪽에 장화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화랑포의 해안선을 따라서 도는 길인데, 화랑포전망대와 화랑포공원을 지나 2코스로 연결된다. ′파도가 꽃처럼 부서진다′하여 이름 붙여진 화랑포(花浪浦)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이름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6코스에 있는 양지마을 ′구들장 논′은 이곳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작은 섬에 사는 섬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을 못 먹는다′는 옛이야기가 있듯이 청산도 같은 작은 섬에는 모 한 포기 심을 공간이 부족했다. 청산도 땅은 온통 돌밭인 데다 비가 오면 금세 물이 빠진다. 그래서 만든 게 바로 구들장 논이다. 겉으로 보면 산비탈에 일군 다랑논과 별로 다른 게 없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구들장 논은 바닥에 구들장처럼 넓고 얇은 돌을 깔고 아래는 배수로를 만든 후 구들장 위에 흙을 쌓고 다져서 만든 논이다. 논에 스민 물이 구들장 아래 수로를 따라서 아래 논으로 흐르게 하여 귀한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서로 나눠 쓰려는 지혜를 응용한 것이다. 그래서 청산도의 구들장 논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6코스 구들장 논과 이어지는 7코스 시작점에는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지정된 상서리 돌담마을이 있다. 상서리는 오래전 동네 사람들이 돌담을 쌓아 집과 밭의 터를 만들고 그 경계로 삼았다. 사람 키만 한 돌담은 반듯하지 않아 더 운치 있고 매력적이다. 돌담을 따라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마당의 감나무는 돌담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돌과 한 몸이 된 담쟁이덩굴은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돌담은 사람들과 함께 긴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것이다. 

 

담쟁이덩굴과 한 몸이 된 상서리 돌담길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다. 

 

상서리 돌담마을에서 동촌리 돌담길과 할머니 나무를 지나면 신흥리 솔숲 해변이 나온다. 신흥리에서 청산도의 새끼섬인 목섬으로 가는 해안 길에는 대규모의 전복 양식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눈길을 끈다. 청산도에서 목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항도로 들어가야 한다. 과거에는 하루에 두어 번 들고나는 물때에 맞춰 항도로 건너갔지만 지금은 방파제가 놓여져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항도에서 목섬으로 가는 숲길은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울창한 원시림의 오솔길이다. 붉은 잎이 통째로 낙화한 동백꽃들이 발 닿는 곳마다 붉게 물들어 놓아 발걸음을 더욱 느리게 한다. 시간이 멈춘 듯 움직임이 없는 숲속은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원초적 풍경이다. 그래서 이곳은 진정 ′느림의 미학′을 맘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만약 방파제가 놓이지 않았더라면 이 길은 진정한 청산도의 슬로길이 되었으리라. 

 

목섬은 항도에서 원시림의 속살을 가로질러야 만날 수 있다. 

 

섬이 작아 약 30분 정도 산길을 걸으면 7코스의 종점인 목섬에 닿는다. 청산도에서 일출의 명소로 유명하고 낚싯대만 드리우면 고기가 문다 해서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목섬 가는 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청산도의 감춰진 비경이라 슬로길을 찾는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청산도의 새끼 섬 목섬. 새 목을 닮았다고 해서 새목아지섬으로도 불린다. 

 

5코스에 있는 범바위는 청산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다랑논에서 범바위로 올라가는 시멘트 포장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폭이 좁다. 간간이 교행이 가능한 장소가 있지만 올라가는 내내 내려오는 차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올라간다. 

 

범바위는 신선의 뜻을 어긴 애기 범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먼 옛날, 신선으로부터 십장생(十長生)에 들어갈 동물들을 소집하라는 명을 받은 범이 자신이 그 명단에 없다는 사실에 성이 나서 사슴을 죽인다. 그래서 신선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바위로 변하게 되는데 바로 범바위다. 웅크린 범의 모습을 하고 있는 범바위 부근에는 자철석이 많아 자력 작용이 활발해 실제로 나침반들이 제각기 엉뚱한 곳을 가리킨다. 맑은 날에는 범바위 전망대에서 거문도와 제주도가 보인다.

 

청산도에서 가장 기가 센 범바위

 

범바위를 뒤로하고 8코스로 이동한다. 신흥리와 상산포를 지나 노적도로 가는 길에는 햇살이 눈 시리게 부서져 내리고, 길가의 샛노란 유채꽃과 무릎까지 자란 보리는 봄바람에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파도처럼 일렁인다. 진산리 갯돌해변에서는 파도가 전해 주는 청아한 갯돌의 울림을 한참 동안 듣는다. 해안 길 오른쪽으로 청산도의 삼라만상이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해인(海印)이 아니던가. 부처는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산도 섬 구석구석 어디에나 있다. 

 

노적도전망대. 왼쪽으로 생일도와 금일도가 보이는 일출 명소다. 

 

9코스는 국화리에서 지리까지 이어진다. 이 길에 단풍나무로 터널로 만들어진 단풍길이 있다. 단풍하면 가을이 연상되지만 봄날의 하늘을 가린 연두색 단풍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봄 햇살이 황홀하기만 하다. 한적하고 풋풋한 봄날에 붉게 물든 가을의 단풍을 상상하면서 청산도 단풍길을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걷는다. 

 

봄볕 받은 국화리 단풍길은 가을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길이다.

 

청산도에서 ‘느림의 미학’에 빠져든 자유롭고 달콤한 시간들. 이렇게 한갓지고 유유자적한 날들을 앞으로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 고개를 드니 흰 구름 몇 조각이 둥실 뜬 하늘은 에메랄드빛을 무한정 쏟아내고 그 빛을 고스란히 품은 남도의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느림의 미학′에 빠져든 자유롭고 달콤한 날들

 

뭍으로 나가는 뱃전에 서서 청산도를 바라본다. 

 

느린 풍경으로 삶의 쉼표가 있는 청산도 

푸른 바다와 푸른 청보리와 푸른 다도해의 작은 섬들 

돌담길과 구들장 논, 그리고 이어지는 삶의 사연들 

 

청산도의 숱한 풍경들은 봄날 실바람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서울역에서 KTX로 광주송정역에 도착하거나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광주종합터미널로 이동한 후 완도행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완도 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 완도항 여객선터미널에서 1일 6회 운항하는 청산도행 페리에 승선. 차량을 싣고 가거나, 차 없이 배를 타고 청산도로 들어가 무료 공용버스를 이용. ′치유가 필요해 청산도를 걸어봐′ 행사가 2024. 4. 6.(토) ~ 21(일)까지 완도군 청산면 일원에서 개최 중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4.04.15 01:43 수정 2024.04.15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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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