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로 인해 몇 년간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었었다. 얼굴 전체가 마스크에 가려져 오로지 눈만 쳐다보고 살았다. 깜빡이는 신호등 응시하듯 언제부터 눈이 유일 신앙처럼 되었을까?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 진심인데 얼굴을 가린 마스크가 눈을 키우고, 눈으로 말하는 법을 학습한다.
눈 크게 뜨기, 눈 질끈 감기, 실눈 뜨기, 윙크하기, 눈동자 굴리기, 눈 깜빡이기, 눈웃음치기. 눈에 힘주기, 먼 허공 보기. 모자라는 자음과 모음을 대신해 때로는 두 눈썹까지, 주름진 미간까지도 단어의 의미소가 된다.
입술이 살지 않는 문장들은 건조하고 낯설어 자꾸만 실핏줄이 터진다. 너무 뇌쇄적인 시선은 농익어 부끄럽고, 진심을 놓친 눈빛은 문장이 되지 못해 도무지 행간이 읽히지 않는다. 갈수록 섬세하고 예민해진 눈 때문에 언어는 나약해지고 눈빛만 비대해진다. 마음과 마음의 불립문자가 된 눈은 오늘도 청포묵처럼 날창날창한 눈웃음을 짓고 있다. 일찍이 팬데믹을 겪었다는 외계인들처럼 입은 작아지고 눈만 커지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고 한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눈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마음을 읽고 많은 감정을 주고받는다. ‘눈빛만 봐도 안다.’라고 하는 말처럼 때로는 입으로 말하는 수많은 언어보다 진심을 담은 눈빛 하나가 가슴을 울리고 마음을 열리게 한다. 배우들의 눈빛 연기를 보면 대사 하나 없이도 공포, 우울, 열정, 슬픔, 환희, 불안, 멸시, 허망, 애수, 분노, 질투, 애증, 고통, 순수, 공허, 허탈, 조소, 강직 등 무대의 배경이나 감정이 그대로 살아난다.
동물들은 눈 자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노새나 낙타처럼 힘든 일을 하는 가축, 사슴이나 기린 같이 순하고 여린 동물들은 우물 같은 동공의 깊고 큰 눈을 가졌다. 투명하고 정직한 검은 눈동자의 섬 같다. 반면 사자나 표범, 야행성 맹금류의 눈은 몸집에 비해 작고 형형색색이다. 이글거리는 눈빛 속에 살기가 등등하다. 반면, 인간들만큼 변화무쌍하고 속임수를 가진 눈빛도 없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보았던 외갓집 누런 암소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막 어미 젖을 뗀 송아지를 오일장에 팔고 온 뒤였다. 어미는 사흘 밤낮을 굶고도 외양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산으로 꼴 먹이러 가기 위해 억지로 끌려 나온 소의 눈망울은 진홍빛 물안개로 흐려 있었다. 기른 정 봄날의 햇살이 그리 그리웠을까, 낳은 정 배냇짓 정한이 그리 서글펐을까. 하늘지붕 내려앉은 먹먹한 가슴은 주인이 그렇게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분노에 찬 눈빛으로 갑자기 뿔을 들이대며 고삐를 내팽개치고 산속으로 달아나버렸다. 뒤늦게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온 그 소는 높은 언덕에 올라서서 자식이 팔려나간 강 건너 장터 소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절망에 빠진 낙조 진 눈빛이었을 것이다. 인연은 또 해체인 것을, 다시없을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망각에 몸부림치는 몇 밤을 더 보내고서야 십우도(十牛圖)처럼, 자기 존재도 잃어야 회귀하는 평상심의 눈빛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은 얼굴에 붙은 작은 심장이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나 심리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눈빛마저 외면하는 것이다. 자의적이다. 세상에 무관심보다 서러운 것도 없다. 반면 두렵거나, 미안하거나, 잘못한 것이 있어도 상대의 눈을 피한다. 눈치를 보며 곁눈질을 하는 것이다. 의도적이다.
바늘처럼 뾰쪽한 가시눈으로 세상을 읽으려고 했다. 청안시보다 백안시였다. 높고 화려한 것에는 질투의 눈이었고, 낮고 부족한 것에는 멸시의 눈이었고, 이기고 지는 문제에는 오기의 눈빛이었다. 의리와 순수를 지향했으나 마음의 눈이 없어 겉치레에 불과했다. 남에게는 까칠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눈이었다. 못 본 척 감은 눈 뜨게 하고, 칼을 세운 눈 풀어내고, 헛거미 잡힌 눈 끌어내는, 내 안의 나를 읽고 있는 그 눈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생의 원근을 헤아려주고, 삶의 명암을 분별해주는 눈. 눈에도 온도가 있고, 문(門)이 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세계만 보니까 자기 욕구가 앞서고 서로의 소통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잘 본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작고 미미한 것도 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이쪽을 보느라 저쪽을 못 보고, 웃음만 보느라 눈물을 보지 못했다. 두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들, 눈 안에 있지만 눈 밖에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몹시도 묽은 눈이었다. 매듭진 데 없이 순하고 옅은 눈빛이었다. 바늘에 실 꿰느라 헛손질만 하는 노모의 눈은 언제부턴가 텅 빈 동공이었다. 자식의 걸음마다 응원처럼 따라붙던 어머니의 눈빛이 어느 날부터 젖은 영혼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를 향한 기대와 격려의 눈빛에도 무관심했고, 달의 뒤편처럼 못다 읽은 당신의 생에도 헛것을 본 양 눈 맞추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의 세상은 얼마나 외롭고 슬픈 일일까.
나는 어떤 눈을 가졌을까? 휴대폰을 꺼내 내 눈 사진을 찍어보았다. 나이가 들어 눈빛이 게슴츠레해지고 뱁새처럼 눈도 가늘어졌다. 눈웃음지으려 입꼬리를 올려도 호의를 담은 안시(眼施)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살벌하게만 보인다. 거울 앞에 보이는 눈보다 남의 눈에 비치는 눈이 중요할 것이다. 아낌없이 눈물샘을 꺼내 내 어둠부터 닦아내야겠다. 현자의 마음 같은 눈은 못될지라도 내 눈에 온기라도 찾아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아야겠다.
[허정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