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전라우수사 휘하에는 임치첨사와 가리포첨사 두 명의 첨사(僉使)가 있었으며, 각 첨사는 휘하에 여러 명의 만호를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임치첨사는 홍견(洪堅)이라는 장수로서 그가 관할하던 임치진은 지금의 전남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목포, 다경포, 법성포, 검모포 등이 임치진의 속진이었다.
임치첨사 홍견의 직책과 이름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타난다. 『난중일기』의 1594년 일기에는 '임치첨사'라는 직책이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 『난중일기』의 1596년 3월 1일 일기에 이르러 임치첨사의 이름이 홍견으로 명시되었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23일
맑았다. 아침에 순천부사(권준), 흥양현감(배흥립)이 왔다. 늦게 곤양군수 이광악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황세득)도 왔는데 임치첨사가 함께 왔다.
[원문] 廿三日辛未 晴. 朝 順天興陽來. 晩 昆陽李光岳 持酒來. 長興亦來 臨淄同來.
홍견의 신상과 행적은 「융경6년임신12월초2일문무과별시방목」의 무과급제자 명단과 『남양홍씨세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목과 세보에 따르면 그의 자는 강중(剛仲), 호는 도장(道庄), 본관은 남양(南陽), 생몰년은 1535년~1610년이며, 남양홍씨 남양군파(南陽君派) 파조 홍주(洪澍)의 8대손이다.
홍견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점은 그의 신상과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도장선생유사』라는 책이 전한다는 사실이다. 문신이 아닌 무신에 대한 조선시대 기록이 이렇게 책으로 자세히 남아서 전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흥미롭다. 『도장선생유사』는 홍견의 족보, 연보(年譜), 평생록(平生錄), 유서(遺書), 무과방목, 사우록(師友錄), 행장, 묘갈명 등 그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록을 담고 있다.
『도장선생유사』 에 수록된 기록 가운데 「연보」는 그가 제수받았던 관직을 기록하면서 품계와 소속 관청까지 함께 기록하였는데, 「연보」가 작성될 때 그의 고신 교지(관직을 제수받을 때 받는 교지)를 직접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수록된 홍견의 여러 가지 제수 기록 가운데 고부군수(古阜郡守) 제수 기록(1598년 4월), 김해부사(金海府使) 제수 기록(1599년 4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제수 기록(1604년 10월), 고원군수(高原郡守) 제수 기록(1605년 6월)은 각각 『고부군읍지』의 「선생안」, 정희득(1575~1640년)의 『해상일록』 기해년(1599년) 7월 6일(재임 기록), 『선조실록』의 기사(180권, 선조37년-1604년 10월 12일 무오 5번째 기사-제수 기록), 『선조실록』의 기사(188권, 선조38년-1605년 6월 5일 무신 1번째 기사-재임 기록)을 통해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즉, 『도장선생유사』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다수 포함된 책으로서 연구할 가치가 높은 중요한 사료로 판단된다.
『도장선생유사』에 따르면 홍견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 1월에 임치첨사로 제수되었다. 임치첨사가 전라우수영에서 고위급 장수인 점을 고려하면, 전라우수영이 참전했던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제2차 당항포해전 등에 임치첨사 홍견도 당연히 참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장선생유사』는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그 디지털화된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융경6년임신12월초2일문무과별시방목(隆慶六年壬申十二月初二日文武科別試榜目)」
『도장선생유사(道庄先生遺事)』, 국립중앙도서관
한국고전종합DB, 정희득(鄭希得)의 『해상일록(海上日錄)』
『조선시대 수군진조사1 전라우수영편』, 2011,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남양홍씨세보(南陽洪氏世譜)』(唐洪)
『고부군읍지(古阜郡邑誌)』, 「선생안(先生案)」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