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청포도 사연을 머금은 유행가 아랑가를 펼친다. 우리의 고유한 유행가 아랑가는 한 곡조마다 7가지 요소를 품고 있다. 작사·작곡·가수·시대·사연·사람·모티브(탄생 배경지) 등이다.
그래서 한국 유행가 100년 속의 절창을 세월의 줄에 매달아 보면, 역사의 마디마디가 대롱거린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6.25 전쟁 휴전 3년 차이던 1956년, 서양 문물을 타고 들어온 자유연애 문화가 싹을 피우던 시절, 청춘남녀들의 연애 장소를 선도했던 노래, 도미가 부른 <청포도 사랑> 사연을 펼친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 어여쁜 아가씨여 손잡고 가잔다 / 그윽히 풍겨주는 포도 향기 / 달콤한 첫사랑의 향기 / 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면 / 바람은 산들바람 불어준다네 /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 아래로 / 그대와 단둘이서 / 오늘도 맺어보는 청포도 사랑.
이 노래의 배경지는 안양 인덕원 포도원이다. 그 시절 서울에서 안양은 멀었다. 뚝섬이나 용산 새남터 일대에서 나룻배를 타고 노량진 나루에서 내려 남태령을 넘어야 했다. 상도에서 장승배기를 지나 삼막을 거쳐 시흥 고갯길을 넘어가야 했다. 그 시절은 한강에 다리가 몇 개 놓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꼬박 하루가 걸리는 데이트 코스였다.
<청포도 사랑> 노래 속의 화자는 열애 중이다. 사랑하는 그녀와 같이 청포도원으로 데이트갈 꿈에 젖어있다. 청조(靑鳥), 파랑새는 희망의 새다. 그래서인가, 이 새를 소재로 한 시와 노래와 문학작품이 많다.
이 새를 노랫말에 얽은 유행가 아랑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가 <새야새야 파랑새야>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응원한 이 노래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한 일본제국주의의 포악과 조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분기(憤氣)를 실은 함성이었다.
이화촌이 노랫말을 짓고, 나화랑이 곡을 엮어서 도미가 부른 이 노래는 희망을 열망한 곡이다. 6.25전쟁이 정전(停戰)된 지 3년이 지나가던 황막한 시절, 대중들은 파랑새가 노래하는 청포도밭처럼 밝고 희망찬 일상을 얼마나 갈망했을까.
사실 파랑새가 포도밭에 깃드는 사례는 드물다. 이 새는 30센티가량의 작은 몸, 몸통은 청록색이며, 머리와 꼬랑지는 검다. 5~6월에 날아와 나무의 썩은 구멍이나 이사 간 딱따구리 둥지에 세 들어 산다. 이 새를 일본에서는 불법승(佛法僧)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삼보조(三寶鳥)라고 부른다.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기쁨과 희망을 상징한다.
포도나무는 언제부터 지구상에 살았을까. 약 6천만 년 전부터 북유럽, 북아메리카, 영국 남부지방 등에 포도송이와 비슷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자랐단다.

이것이 빙하기를 거치면서, 추위에 약한 종류는 멸종되고, 지중해 연한, 아프가니스탄,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비니페라(vinifera) 계통 품종들이 살아남았는데, 이것들이 현재 포도 종의 조상이란다. 인류의 포도 재배는 기원전 8천 년경 조니아(Georgia, 코카서스)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포도 사랑> 노래 속에서 파랑새가 노래한 포도(청포도 넝쿨)는,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하며, 본격적인 재배는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단다.
이 노래가 발표된 후 청춘 남녀들의 데이트 발길이 포도원으로 이어졌고, 노래가 히트하면서 <청포도 언덕길>, <청포도 로맨스>, <청포도 피는 밤> 등이 발표된다.
이 노래 <청포도 사랑>으로 도미는 1950~60년대 인기가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박경원·오기택·이미자·백설희·김상진·이은하 등이 리메이크했다.
본명이 오종수인 도미는, 1934년 상주에서 출생하여 6.25전쟁 중이던 1951년, 17세(대구 계성고 3학년)로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대구극장에서 실시한 오리엔트레코드 주관 제1회 전속가수 선발경연대회 입상을 하였던 것. 이때 공동입상자는 방운아(본명 방창만)이다.
평소 현인을 흠모하던 오종수는 학교를 마치고 박춘석을 찾아가서 현인의 <신라의 달밤>으로 오디션을 받는다. 이때 박춘석이 야인초 작사가를 소개하고, 노랫말을 청탁하여 본인이 곡을 붙여 불린 노래가 <신라의 북소리>다. 이것이 도미의 가수 생활 시작이고, <청포도 사랑>, <하이킹의 노래>, <청춘 브라보>, <비의 탱고>, <효녀 심청>, <사도세자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다.
신라의 서적 『화랑세기』에 청조가(靑鳥歌)가 실려 있다. 화랑 사다함이 미실(신라 27대 선덕여왕. 632~647재위)을 사랑했는데, 전쟁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미실은 궁중으로 들어가 전군(殿君)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이에 상심한 사다함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이해 내 콩밭에 머물렀니/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밭의 파랑새야…….’
조선시대 『숙영낭자전』에 낭군이 과거시험을 보러 간 사이, 고부(姑婦)간의 갈등 속에 파랑새가 등장하고, 매월당 김시습도 파랑새 울음소리를 듣고 《문청조성유감》(聞靑鳥聲有感)이란 시를 남겼다.
‘꿈에 부용성서 보허자 노래 듣다가/ 잠 깨니 파랑새의 울음소리 들려온다/ 얼키설키 뒤엉킨 살구나무 가지에/ 집 모롱이 기운/ 햇볕 숲을 뚫고 환하도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멀리 곤륜산 꼭대기서/ 건너온 줄 내 아노니...’
<청포도 사랑> 노래를 음유하다 보면 이육사(1904~1944)의 시가 연상된다. 1939년 《문장》 8호에 발표했던 절규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역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대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흠뿍 적셔도 좋으련~’
이 시와 도미의 <청포도 사랑> 노래는 17년의 간극(間隙)이 있지만,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치하와 전쟁 폐허에서 희망을 준 메시지는 같은 궤(軌)다. 이육사는 1904년 안동 출생, 1944년 39세로 중국 허베이성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본명은 이활(李活), 개명 전에는 이원록·이원삼이다.
이원록은 1925년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1919년 창단)에 가입한다. 1926년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지만, 1927년 귀국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 죄수 번호가 <264>, 그래서 출옥 후 호를 <이육사>라고 지었다. 그가 타계한 이듬해에 발표된 유시(遺詩)가 <광야>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의 본관은 진보(眞寶),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유행가에는 노랫말에 얽힌 과실도 매달리고, 모티브 사연을 되살려내는 역사도 대롱거린다.
<청포도 사랑> 노래가 1일 데이트 코스의 노래였다면, 1박2일 일정의 데이트 여행 노래는 박경원이 열창한 <이별의 인천항>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연안여객선을 타고, 월미도와 작약도에 들어가면, 다음 날 배를 타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하룻밤이, 한평생 백년해로의 만리장성이 되었던 것이다.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그 시절 좀 더 긴 데이트 여행지는 서산, 태안 만리포였다. 이 여행지를 얽은 노래가 박경원의 <만리포 사랑>이다. 2박3일 정도의 여행지였다. 오늘날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해수욕장이다. ‘똑딱선 기적소리 만리포라 내 고향~’
이곳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고불 맹사성(온양 출생)이 중국 사진을 영접하고 배웅했던 곳이다. 사신 송별식 때 깃발에 적었던 문구가, ‘만리바다 무사항행’이었다. 여기 ‘만리’라는 문구가 만리포 지명의 단초이다. 1950년대 후반, 태안군 소원면장을 역임한, 박노익 선생이 주체가 되어 만리포해수욕장을 개장했다.
청포도가 탱글탱글 익어가는 계절, 만방에 계시는 코스미안뉴스 가족 여러분들의 삶이 짙푸르게 농익기를 기원드린다. 사랑도, 건강도, 우정도, 행복지수도 모두가 당신이 그 속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 저마다가 코스미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