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베토벤의 생애

김은영

한 사람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베토벤의 생애’와 함께 나는 베토벤의 고뇌의 삶을 따라갔다. 문장의 사이사이에서 그의 신음과 한숨과 절망의 절규를 들었다. 책의 첫 장을 열며 두 개의 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생애의 반 이상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전원교향곡에서 악기가 연주하는 자연의 속삭임과 새소리들을 어떻게 그렇게 사실적으로 구현해 내었는지, 다른 하나는 로망롤랭이라는 노벨문학상의 거장이 베토벤이라는 다른 거장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였다. 

 

거장이 안내하는 베토벤 일생의 질곡을 나도 같이 왕래하면서 대게는 깊은 연민으로 그리고 경이로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책 위에 손을 얹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고 아담한 책이지만 그 안에서는 가난하고 힘든 고뇌와 고통이 가시덩굴처럼 엉켜있지만 결국에는 환희의 송가가 들린다. 아름다운 전원의 조화와 폭풍을 겸비한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한참 물이 오른 유월의 신록은 지난밤 폭풍으로 말끔하다. 씻겨진 나무 사이로 밝은 햇빛이 빗겨져 내려와 내 젖은 뜰에서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로망롤랭은 베토벤의 일생은 폭풍 치는 하루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의 57년의 일생이 마음속에 그려진다.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의 못생긴 남자. 아버지의 학대, 가장으로서 평생 말썽 많은 동생들을 돌보며, 귀머거리의 독신 음악가. 만년에는 더 이상 안 들리는 귀를 감출 수 없어 대화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의 세계를 개척하고 확대한 750여 편의 작품들. 인간의 기쁨은 그를 외면했지만, 그는 지켰다. 내면세계를 천상의 빛과 같은 환희의 세계로 구축했다. 그렇게 살아 준 그의 영웅됨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잡아두고 싶었다. 저자는 서문을 베토벤과 저자와의 관계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때(1902년) 나는 계속 질풍노도에 흔들리던 시기였다. 나는 파리를 떠나 열흘 동안 내 어린 시절의 친구이며 인생의 투쟁에서 여러 번 나를 지탱해 준 사람, 베토벤의 생가로 피신했다. 열흘간 거기서 베토벤의 그림자를 만나고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저자는 자신의 신작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베토벤의 강한 손이 축복해 줌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용기와 슬픔과 기쁨이 마음에 스민 채’로 삶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8년간 발표된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퍼>는 베토벤의 생애를 모델로 했고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베토벤의 대표적인 교향곡들과 같은 음악시 같은 인생의 전투에서 사랑과 용기, 창조를 위해 싸우는 영웅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주제는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고 로맹롤랭의 인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된 계기는 로맹롤랭이 청년기에 문호 톨스토이에게서 받은 답장이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톨스토이에게 참다운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편지를 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는데 답장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참된 작가의 조건은 온 인류를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로망롤랭은 그 후로 톨스토이가 조언한 대로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반파시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성이었고 진실을 향한 외침으로 유럽의 양심으로 평가받는다. 노벨문학상의 상금은 적십자사와 사회사업에 기부함으로 인류애를 실천하는 지성이었다.

 

‘영웅은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아니고 오직 마음으로 위대했던 사람’들 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이 영웅들은 ‘긴 생애에 걸친 순교’라고 할 수 있듯이 ‘매일 일정한 분량의 시련을 식량처럼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느껴질 때 잠시 그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어 쉬면서’ 이런 거룩한 영혼들에게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차분한 힘과 강력한 선함’의 물세례를 받아보자. 

 

굳이 무엇을 이루었느냐고 물을 것도 없이 ‘그 눈빛만 보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만 읽어도 인생은 고통 속에서만 가장 위대하고 가장 풍성하며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자신이 베토벤의 생가에서 경험한 것을 독자들에게 제안하는 듯하다. 

 

“나는 이 영웅 중 첫손 꼽히는 자리를 강하고 순수했던 인물, 베토벤에게 내어주고자 한다.” 

 

로맹롤랭은 베토벤은 못생겼다고 한다. 키가 작달막하고 어깨가 구부정하고 목이 굵고 얼굴은 ‘불쾌한 벽돌색’이고 네모나고 넓적하다. 벽돌색 이마 위에 숱이 많은 검은 머리가 사방으로 뻗어서 ‘봉두난발’이었다. 어떤 이는 그의 머리를 ‘마치 메두사의 머리에서 뻗은 뱀들’ 같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눈은 움푹 들어간 눈구멍 안에서 유난히 반짝였고 ‘보이는 것은 모조리 간파하겠다’라는 듯 강렬하게 ‘야생적으로 이글거렸다’고 한다.

 

우락부락한 평민 출신의 ‘천박한’ 외모였지만 모든 여자들이 그에게 매료당했다. 그 매력은 말을 시작하면서 발산하는데 말을 하며 미소를 지으면 하얀 치아가 반짝반짝 빛나고 두 눈은 아름답고 호소력이 가득하다. 여자들은 그의 못생긴 얼굴과 매력적인 눈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언제나 그의 두 눈이 승리해서 ‘아가씨들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폈다’. 

 

그 예로 그가 친하게 지낸 부른스비크 집안과 귀차르디 집안의 서로 사촌 간인 그 두 집안의 세 아가씨들 모두가 베토벤을 사랑했다. 그들 중 중간인 쥴리에타가 가장 적극적이었고 베토벤도 그녀를 사랑했다. 아마 이때가 그의 일생에서 열정의 폭풍이 부는 아주 짧은 짜릿한 행복의 순간이었으리라. 줄리에타에게 ‘월광소나타’를 헌정했다. 월광 소나타의 마지막 장은 ‘프레스토 아지타토(presto agitato, 열정적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이다. 쥴리에타를 향한 열정의 마음인 듯 ‘매우 빠른 속도로 열정의 미친 바람’이 활활 불어갔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지만, 쥴리에타는 베토벤이 아닌 어느 백작을 선택했다. 

 

실연의 아픔은 그에게 휘몰아친 다른 폭풍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열정 소나타를 쓴 후 몇 개월 후 그는 유서를 쓴다. 빈의 근교 하일리겐슈타트 시골에서 쓴 유서는 그의 사망 후에 발견되었는데 난청이 시작된 것이 유서를 쓰는 시점에서 6년 전부터였다고 적혀있다. 치료를 위하여 하일리겐슈타트로 왔지만, 더 악화하여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유서에는 ‘사람들은 먼 곳의 목동의 피리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이 비참한 삶을, 정말 비참한 삶이지…”라고 한탄하면서 동생들에게 자신의 사후에 대한 조치로 몇 가지 지시한다. “너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물론 슬프게…” 그리고 그는 신에게 호소한다. “오 하늘의 섭리여! 순수한 환희의 날을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주소서! 참된 기쁨의 울림이 내게 낯설어진 지 오래입니다. 

 

“오! 언제나, 오! 언제나, 신이시여! 제가 자연과 인간의 사원 속에서 그 울림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다시는 못 느낀다고요. 안 됩니다!. 오! 그건 너무 잔인합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운명은 그렇게 문을 두드렸다. 잔인하게, 그러나 그는 결국 환희를 다른 방법으로 찾아냈다. 

 

베토벤은 독일 본의 가난한 집의 누추한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궁정 테너 가수였지만 알코올중독자였다. 베토벤이 가장 많이 닮은 할아버지는 퀼른 선제후(選擧候)의 악장(樂長)이었다. 불행하게도 할아버지는 4살 때 돌아가셨다. 알콜중독자 아버지는 모짜르트가 신동으로 잘 나가는 것을 부러워해서 베토벤도 그렇게 만들어 자신의 술값을 벌고 싶어 했다. 4살 때부터 시작한 아버지의 훈련은 잔인했다. 때리기 일쑤였고 방에 가두어 놓고 몇 시간이고 바이올린을 켜도록 했다.

 

열 한 살에 극장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어 가족을 위한 빵을 벌어야 했다. 그나마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는 17살 때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귓병뿐 아니라 평생을 따라다니는 갖가지 다른 병들, 조울증, 만성설사, 알코올중독, 만년에는 복수가 차서 4번이나 복수를 빼내는 시술을 했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만년에는 혼자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해서 노숙자로 경찰에 잡혀간 적도 있었다.  

 

무능한 아버지 대신 맏이로 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동생들조차 제대로 살지 못해서 언제나 베토벤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술가로서의 수입은 고정적이지 못하고 몇 년에 걸쳐 악보를 써서 출판사나 귀족에게 주면 돈을 주기도 하고 안 주기도 한다. 출판사에 악보를 넘겨주어도 미리 돈을 받았기에 악보를 주어도 받을 돈이 없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질곡의 삶과는 달리 그의 정신은 언제나 드높았다. 예술은 기교가 아니라 더 높은 내면을 드러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어느 날 그의 일기에 이런 말이 적혀있다. “음악은 인간 정신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게 해야 한다.”, “음악이란 어떤 지혜나 철학보다 더 높이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내 음악의 의미를 꿰뚫어 보는 이는 다른 이들이 처해 있는 온갖 비참한 삶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은 이러한 경지를 들어내는 것이었을까. 합창교향곡의 마지막 장은 쉴러의 시에 곡을 붙인 ‘환희의 송가’이다. 곡이 끝나고 관중들이 열광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으나 귀머거리 지휘자는 그저 멍하니 연주자들을 보고 서 있었다. 당시 알토 담당의 성악가 웅가가 그를 돌려 세웠다. 그제서야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천둥과 번개가 친 폭풍의 인생을 인내로 건너와서 아름다운 환희의 하늘을 보았다. 그의 유서에서 ‘순수한 환희를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던 그의 갈망이 실현되었다. 

 

거친 폭풍우와 싸우며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은 그의 목표는 드높은 내면의 세계, 영혼의 자유로움과 기쁨의 경지였다. 그의 승리는 인간의 승리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외로울 때, 죽음의 절망에 놓여 있을 때, 그의 무릎에 몸을 기대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삶과 새로운 계약을 맺고 원기를 되찾을 수 있다. 베토벤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로맹롤랭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베토벤이 내 마음속에도 들어와 살게 해야 한다. 

 

 

[김은영]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사

오크라호마주립대학 박사과정

시납스인터내셔날 CEO

미국환경청 국가환경정책/기술 자문위원

Email: kimeuny2011@gmail.com

 

작성 2024.06.10 11:15 수정 2024.06.1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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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