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를 펼치면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에 서늘한 푸른색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호수를 보면서 파란 눈의 여인이 고혹적인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순간을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바로 ′푸른 눈동자의 바이칼′이다. 바이칼 앞에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은 지구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푸르고, 가장 차갑고, 가장 담수량이 많고, 가장 오래된 호수다. 336개의 강에서 바이칼로 흘러들어온 호숫물은 단 하나의 앙가라강을 통해 리스크비양카와 이르쿠츠크를 지나 예니세이강으로, 그리고 북극해로 들어간다.
고등학생 시절, 이광수의 ‘유정(有情)’을 읽고 소소한 연애사보다 주인공 최석이 친구 N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등장하는 바이칼호수의 신비스러운 모습과 시인 백석(白石)의 시 ′북방에서′에 서 느낀 북방민족으로서의 시베리아에 대한 향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들... 전쟁 중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감정들은 얽히고설켜 바이칼에 대한 향수는 세계 최고수심을 지닌 바이칼호수의 심연(深淵)만큼 깊어만 갔다.
우리나라에서 전쟁 중인 러시아로 가는 직항은 폐쇄된 지 이미 오래라 현재로서는 바이칼과 인접해 있는 몽골을 경유해서 철도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몽골의 울란바트로역에서 출발하여 바이칼 근처에 있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가는 국제열차는 오후 3시 넘어서 출발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라 두나라 국경에서 검문검색이 까다롭고 번거롭지만 기차는 브라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지나 바이칼호숫가에 연해 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따라 이르쿠츠크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몽골의 울란바트로를 출발한 바이칼행 열차는 25시간 만에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한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는 이곳으로 유배 온 120여명의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만든 도시다. 프랑스 파리까지 진군한 러시아 청년 귀족 장교들이 서유럽의 자유분방한 선진문화와 진보된 시민의식에 큰 충격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 농노를 해방하고 왕정을 전복시킬 계획으로 1825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게 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동토의 땅인 이곳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발콘스키 백작은 실존 인물로 쿠데타 주동자인데, 수형 생활이 끝나자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브라트족의 도시 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친다. 그의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290km 거리인 바이칼호수의 알혼섬을 향해 출발한다. 6월 초, 우리나라는 30도를 넘나드는 초여름이지만 이곳은 초가을 날씨다. 시내를 벗어나자 광활한 초원의 스텝지대가 시작된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뜨거운 태양 아래 자작나무로 만든 러시아 전통 목조 가옥, 자유 방임형 소 떼가 노니는 끝없는 초지가 끝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짙은 타이가 숲, 분홍색 이반차이 야생화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이런 환상적인 파노라마가 4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먼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버스는 타이가 숲을 헤치고 질주한다. 백석의 시 ′북방에서′ 중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는 것을 기억한다.′라는 시구(詩句)는 과거 북방민족으로서의 향수를 자극한다. 우리는 왜 이 나무들을 버려두고 떠났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로소 시에 담긴 백석의 심경을 이해한다. 샤먼의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바이칼의 자작나무는 땅과 하늘의 매개체다. 우윳빛 살갗 위에 상처처럼 난 거뭇거뭇한 속살은 신께 나약한 인간을 구원해 주십사하는 증표로 느껴진다.
드디어 지구의 태반인 바이칼호수에 도착한다. 바이(bai)는 풍요, 갈(gal)은 바다를 의미한다. 부두에서 바지선을 타고 숱한 인종들에 섞여서 바이칼을 건너 알혼섬으로 들어간다. 선임은 내·외국인 구분 없이 모두 무료다. 2,500만 년 나이를 먹은 바이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의 1/3 크기다. 남북 636km, 둘레 2,200km, 최고 수심 1,742m, 지구 담수의 20%를 지니고 있다.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과연 이곳에 서식하는 물범 네르파를 볼 수 있을까. 6만 마리로 추정되는데 갈수록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호수는 12월부터 결빙하면 5월까지 얼어있어 배는 운항하지 못하고 10인승 푸르공이 여행객을 실어 나른다. 약 10분 남짓 걸려 제주도 절반 크기의 알혼섬에 도착한다.

알혼은 브라트어로 ′나무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섬에는 나무가 별로 없다. 부두에서 후지르 마을로 가는 비포장 도로길을 푸르공(일명 우아직)이 먼지를 일으키며 신나게 달린다. 구릉길을 달리는 알혼섬의 전천후 교통수단 사륜구동 푸르공은 놀이공원 청룡열차다. 광활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달리는 이 차는 군용 차량을 개조한 것이다.

후지르 마을은 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근처에 지구상에서 영기(靈氣)가 가장 센 곳, 샤머니즘의 성지 부르한 바위가 있어 섬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들리는 마을이다. 부르한 바위로 가는 길이 험하지만 고운 님 만나려면 힘들고 더디게 찾아가야 그리움이 깊어지는 법이다. 도로 좌우 허허벌판에는 우리들에게 나지막이 ′본향(本鄕)을 찾아 잘 왔노라′ 라고 속삭여주는 들꽃들이 있어 길은 외롭지 않다. 약 1시간 만에 섬에서 가장 큰 후지르 마을 근교의 숙소에 도착한다. 호텔 이름이 ′바이칼로프 오스트록′, 이름에 걸맞게 요새처럼 지은 바이칼 통나무집 요새다.

요새 안의 통나무 오두막에 짐을 풀자마자 푸르공을 타고 근처에 있는 후지르 마을로 달려간다. 인구 2,500명의 후지르 마을은 브라트족 마을이다. 브라트족은 몽골계인데 몽골 반점, 탯줄을 문지방 밑에 묻는 풍습, 강강술래 춤, 선녀와 나무꾼과 심청전의 임당수 유사한 설화 등 7천 리나 떨어진 우리와 유사한 생활 습관이나 문화가 많다. 마을에서 걸어서 호숫가를 향해 걸어가면 언덕 위에 우리의 솟대를 닮은 13개 세르게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바이칼의 여러 강신들을 모시는 성소다. 우리나라 성황당 나무에 천 조각을 매달고 가족과 동네의 무사평안을 비는 의미와 같다.

언덕을 내려서면 호숫가에 영기서린 바위, 샤머니즘의 성지, 세상의 중심, 브라트족 성소, 몽골, 티벳, 탕구트족 발원지, 징기스칸이 묻힌 곳. 바로 부르한 바위가 있다. 브라트족은 선조인 징키스칸이 묻혀 있다하여 바위 위에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부르한은 하느님, 부처님을 의미하는데,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불함′은 ′부르한′을 의미하고,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을 부르한 바위로 규정하고 있다.

바이칼호수에 손을 담그면 3년, 발은 5년, 몸은 40년 젊어진다고 하는데, 초여름이지만 물이 너무 차서 수영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부르한 바위 언덕은 야생화 천국이다. 가는 꽃대로 바람에 흔들리면서 벌판을 지키는 작은 풀꽃들. 뽀송뽀송한 야생화가 솜이불처럼 나그네 마음을 덮어준다.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를 즐긴다. 자작나무로 만든 오두막에서 자작나무로 달구진 돌에 물을 뿌리면 나오는 증기를 쐬는데, 이 때 자작나무 잎이 달린 가지로 벗은 몸을 가볍게 쳐준다. 뜨거운 열기에 견디기 힘들면 바로 앞 바이칼호수에서 길러온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힌다. 몇 번 반복하니 여독은 금방 사라진다.
반야 후 호반에 나가니 날씨가 쌀쌀하다. 자켓을 걸치고 바이칼의 낙조를 감상한다. 지금은 ′나를 찾는 시간′이다. 차가운 호수에 들어가 발을 담근다. 마음도 담근다. 비로소 그동안 잊고 살았던 북방민족의 DNA를 되찾는 기분이다. 소설가 김종록은 ′바이칼은 내 영혼의 피정지(避靜地)이며 거룩한 자궁이다.′라고 말했다. 이곳을 피정지로 찾은 춘원과 백석처럼 나도 이곳에서 한민족의 향수를 느껴본다. 해가 장엄하게 수평선을 물들이는 시간, 출렁이는 바이칼 물결이 잠잠해지니 억겁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실감한다. 호수 깊이만큼 신비에 쌓여 막연한 동경과 가슴속 깊은 본향을 느낀다. 마지막을 불사르며 소멸해가는 바이칼의 해는 처절하리만큼 아름답다.

새벽에 알혼섬 후지르 마을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바이칼의 감추진 어두운 이면을 보게 된다. 과거 어촌이었던 마을 포구에는 녹슨 어선들이 황량한 모습을 하고 호수가 아닌 모래 위에 정박해 있다. 알혼섬 주민들의 주업은 고기잡이와 목축이다. 바이칼에서만 잡히는 연어과 민물생선인 오물을 남획하는 바람에 어획량이 크게 줄어 어선들은 출어를 포기하고, 관광 숙박업소들이 속속 들어서는 바람에 바이칼의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오늘은 소설 ‘유정(有情)’에 나오는 바이칼 호수 서쪽 리스키비얀카로 간다. 여기는 바이칼의 호숫물이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 앙가라강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친구 딸 정임과의 염문으로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최석은 세상과 동떨어진 바이칼 서쪽 호수의 브라트족 집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유일한 친구 N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라트족 주인 노파는 잠들고, 달빛 실은 바이칼 물결이 어촌 앞 바위를 때리고 있소.′
소설 속 주인공이 갈등과 번민 속에서 살았던 호반의 오두막집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곳 원주민 에벤카족과 브라트족, 그리고 슬라브족이 살았던 자작나무 숲속의 딸지 민속박물관과 강가를 거닐어 본다. 리스트비얀카의 작은 항구에서 유람선을 타고 바이칼호숫가를 1시간이나 돌고, 바이칼호수를 빠져나가는 앙가라강을 볼 수 있는 체르스키 전망대 산정에도 올라 한참을 찾아본다.

깊은 숲속의 호반 식당에서 전통 민속 공연을 보면서 러시아식 전통 꼬치 샤슬릭에 보드카를 몇 잔 마신다. 공연단 손에 이끌려 건네주는 전통 악기로 같이 연주도 해본다. 우리와 외모와 문화가 너무나 흡사한 브라트족 예쁜 처자가 부르는 ′카츄사′ 노래에 짙은 연민과 향수를 느끼니 가슴은 저며 오고, 취기가 크게 오르자 혼자 살며시 식당을 빠져나온다.

최석은 친구 N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깊은 삼림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다가 얼마 뒤 병들어 죽는다. 정임은 최석이 막 숨을 거둔 뒤 도착한다. 어둠에 젖어가는 숲속 식당 호숫가를 거닐며 최석의 마지막 오두막을 찾아본다. 자작나무와 적송이 우거진 저기쯤일까? 숲속을 한참을 헤매었는데 거기에는 최석도, 정임도 없었다. 이곳을 다녀간 춘원이 있었을 뿐이다.
에메랄드빛 바이칼호수가 햇빛에 반짝인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슴에 품어왔던 환상, 기대, 추억, 향수, 그리고 바닥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마저도 호수로 떠내려 보낸다.
*우리나라에서 바이칼호수 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전쟁 중인 러시아로 가는 직항은 폐쇄된 지 이미 오래라서 현재로서는 바이칼과 인접해 있는 몽골에서 철도를 이용하여 가는 것이 접근성이 가장 좋다. 물론 강원도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페리가 있지만, 배와 시베리아횡단철도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다. 매주 토, 일요일 주 2회 몽골의 울란바트로역에서 출발해서 바이칼 근처에 있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가는 열차(25시간 소요)는 오후 3시 넘어서 출발한다. 단,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라 국경에서 검문검색이 까다롭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몽골의 울란바트로를 출발한 몽골종단열차는 러시아 브라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에서 바이칼호숫가에 연해 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따라 달리다가 종착역인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중국 북경에서도 몽골종단철도를 이용해서 울란바트로를 거쳐 시베리아횡단철도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운행하지 않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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