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바이러스의 긍정적인 덕목을 하나 꼽으라면 인종이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우린 모두 생(生)과 사(死)의 경계인(境界人), 곧 지구별에 잠시 머무는 우주나그네 ‘코스미안’임을 각성케 해주는 것이리라.
“삶은 고통이죠.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거죠.”
몇 년 전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의 거장 빌 비올라(1951 - 2024 )가 한 말이다. 전시작 중 ‘물의 순교자’와 ‘도치된 탄생’에 관해서였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조수로 활동했던 비올라가 그가 만든 이미지를 느림의 미학에 적용한 작품을 갖고 지난 2015년 3월 방한했었다. ‘물의 순교자’는 2014년 5월 영국 런던 세인트 폴 성당에서 선보인 대형 비디오 영구 설치작업인 ‘순교자(흙, 공기, 불, 물)’의 하나이다.
그는 “순교자의 그리스 어원은 ‘증인’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중매체가 현대인들을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증인으로 만들고 있다”며 “이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면 고통과 역경, 죽음을 극복하면서까지도 가치나 신념을 지키려는 능력을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이어 “이 작품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행동이나 의지, 인내력, 희생의 가치”라고 부연했다. “사람은 신념이나 가치를 위해서 고통이나 역경을 극복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5m에 달하는 대형 스크린에 영사된 ‘도치된 탄생’은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한 남자가 나중에 깨끗한 물로 정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마지막에 나타나는 부드러운 안개는 수용, 각성, 탄생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는 백남준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내 평생 그런 분은 처음이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노인이나 청년,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이 열려 있었다. 당시 비디오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헸다. 백남준 선생은 내 인생의 최고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비올라의 2008년 작 ‘받아들임’은 원효대사가 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
이는 ‘태어나라. 사는 것이 즐겁다. 죽으라. 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놀랍다’는 원효대사의 반어법이 아니었을까. 삶은 희로애락이 있어 재미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능하지 않나. 어둠이 있어 빛이 있고, 고독을 모르면 사랑을 알 수 없듯이 말이어라. 진실로, 신(神)의 불꽃이 슈베르트 속에 살아있다. 1815년 슈베르트가 18세 때 괴테의 시 ‘첫사랑의 실연’의 시구 “혼자 내 상처를 어루만지네”를 노랫말로 작곡한 이 노래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젊은이의 애창곡이 되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노래를 애창할 때 이 멜로디는 우리를 또한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어 준다. 우리 자신 속에 깊이 내재하는 자의식을 일깨워준다. 슈베르트의 음절 한 소절 한 소절이 더할 수 없도록 애달픈 사랑의 극치를 느끼게 해준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말을 빌리자면 “노래로는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요술처럼 시인이나 작곡가가 꿈도 못 꾼 신비스러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보배를 찾게 해준다.
이란 태생이지만 영국에서 교육받고 영어로 시를 쓰는 미미 칼바티의 시 “내가 풀이고 그대가 바람이거든 나를 거쳐 불어주오’를 우리 다 함께 암송해 보리라.
내가 풀이고 그대가 바람이거든 나를 거쳐 불어주오.
내가 장미꽃이고 그대가 새이거든 내게 구애해 주오.
그대가 노랫말 운율이고 내가 그 시구 후렴 노래
가사이거든 내 입술에 머물지 말고 내게 다가와 주오.
그럼 그대가 오라고 눈짓하는 대로 나 그대에게 다가가리오.
부드러운 장갑 낀 그대의 강철 같은 손으로 쏜 화살이 날아와
내 가슴을 꿰뚫거든 내 온몸에 문신을 새겨 주오.
내 말이 독사의 꼬리처럼 독을 품었거든
그대의 주술 같은 매력으로 날 사로잡아 주오,
내가 그대의 왕관 월계관 잎이거든
그대는 날 전혀 모르는 내 나무껍질 가지일 뿐이라오.
아, 내가 그 나무껍질이었더라면 좋았을걸
오래되었어도 아직 나뭇잎이 피는
그럼 그대는 내게 맺히는 이슬로 내 그늘에 머물 것을
그대가 원하는 여인으로 그대와 결혼하려면
내가 어떤 형상과 모습을 해야 하나요.
그대는 내 그늘에 쉴 독수리, 내 불꽃에 달려들 불나방이거든
내게로 어서 날아와 주오.
그대가 서쪽에서 숨질 때 내가 동쪽에서 살아난다면
사랑하는 나의 님이여, 매일 밤 밤이면 밤마다
나를 새롭게 살려주기 위해 그대가 죽어 주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끝나면
우린 그냥 좋은 친구로 남는다오,
나의 영원한 벗이자 음악의 신 뮤즈요 애인이며
나의 ‘루미’에게 ‘샴수딘’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이슬람 종교의 태양이란 뜻인 그대여.
나의 하늘과 땅이 되어 주오
그러면 나는 본래의 나보다 두 배로 내가 되리오.
그대가 내게 세상의 반만 되어 줄 수 있다면,
이 시에서 카바티는 시 속의 애인을 쫓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애인, ‘사랑의 대상’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서 이 시 속 애인들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여러 가지 다른 시나리오를 시도하고 있어라. 풀과 바람처럼 사랑은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고요하고 달콤하며, 언제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음을 예시한다.
몇 년 전 한국에선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 시비가 있었다. 신경숙 씨 표절 의혹은 1999년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컴퓨터와 전자 매체의 일상화로 종이책과 신문 등 인쇄 매체가 사양길이라지만 한 자 한 자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어 전문가들이 쓴 글쓰기 노하우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흔히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많이 읽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 좀 해보면 어떤 언어이든 우리 모두 어려서 듣고 따라 하며 배운 게 아닌가. 그렇다면 언어를 배워 사용한다는 사실부터가 표절행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뿐만 아니라 영어로 ‘Practice makes perfect.’라고 하듯이 오랜 연마와 연습을 통해 어떤 일에서든 달인과 명인이 될 수 있지 않든가.
“이미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을 것이며 이미 된 것이 앞으로도 될 것이나, 태양 아래 새것이 없도다” 이 잘 알려진 성경 구약성서 전도서 구절처럼 ‘태양 아래 새것이 없다’고 전에 있던 일, 다른 사람들이 해 온 일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방해서 반복하게 마련 아닌가. 다만 각자 제 식으로 제 스타일로 변주하게 되는 것이리라. 일정시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해 일학년 담임 일본인 여선생님께서 첫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을 나는 평생토록 잊지 않고 살아왔다. 세 가지 학생이 있는데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낙제생,’ 시키는 대로 하는 ‘모범생,’ 그리고 누가 시키기도 전에 본인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우등생’이란 말씀이었다.
이 말을 좀 바꿔서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의 흉내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 기차도록 남의 흉내를 잘 내는 사람, 그리고 그 어느 누구의 흉내를 내기보다 다른 사람들 이 본받을 만한 롤모델이 되는 사람이다. 이 세 번째 타입은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서쪽으로 몰려갈 때 동쪽으로 가는 사람, 남들이 다 덩달아 ‘어’ 할 때 ‘아’ 하는 사람, 어느 누가 무엇이 어떻고저떻고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 주장할 때 딴 사람들처럼 무조건 ‘아멘’ 하며 박수치는 대신, ‘그게 아닐 건데’라고 토를 다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을 세상에선 괴짜니 반골이니 이단자라 부른다.
내 둘째 딸이 뉴욕 줄리아드 음대 오디션에서 연주할 지정곡인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러시아의 세계적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연주 녹음한 CD를 주면서 참고로 들어보라고 했더니 미리 듣지 않고 오디션 끝난 후에 들어보겠노라는 딸의 반응에 나는 쾌재를 불렀었다. 자, 이제 글쓰기로 돌아가서 다시 좀 생각해보리라. 어려서부터 내가 발견한 것이 있다. 그 한 가지는 진짜로 중요한 일들은 말이나 글이 필요 없이, 말과 글 이전에 행동이나 존재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부모나 선생님 그리고 소위 ‘성직자라 불리는 수많은 어른들의 말이나 글이 그들의 행동과 삶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y don’t practice what they preach.’이다. 또 어려서부터 내가 품게 된 의문이 있다. 글이란 왜 꼭 종이에다 연필이나 펜 또는 붓으로만 써야 하나.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난 차라리 보이지 않지만 너무도 실감 나는 인생이란 종이에다 삶이라는 펜으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이란 잉크를 찍어가며 써보리라고.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할 삶을 결코 말이나 글로 때우면서 사는 흉내만 내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또 어려서부터 영웅전, 위인전, 소설책 또는 영화를 읽고 보는데 만족할 수 없어, 나도 책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인물들처럼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리라. 아니 그보다는 소설이나 영화에도 없는 나 고유의 True Story를 엮어가며 살아보기로 작정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대학 다닐 때 일이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생으로 인하공대 학생회장이던 친구가 하루는 제가 쓴 장편소설이라며 나보고 읽어보라고 했다. 읽어보니 나를 주인공 모델로 쓴 것이 분명했다. 제 여동생과 나를 결혼시키려고 했던 친구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군에 있을 때 펜팔로 사귀던 아가씨는 나를 모델로 쓴 단편소설 ‘푸른 제복의 사나이’로 신춘문예에 입선해 작가로 등단했었고, 나와 헤어진 지 25년 만에 뉴욕에서 극적으로 다시 만나 재혼해 10개월 같이 사는 동안 또한 나를 모델로 장편소설 ‘꽃을 든 남자’ 상하권을 썼다. 이런 아빠의 유전자 때문일까. 내 둘째 딸의 영화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절대적인 사랑’ 이야기가 2015년 ‘사랑하면 산티아고로 떠나라, 그녀처럼’이란 책으로 출간되어 한국출판문화상까지 받았다.
설혹 삶 자체가 꿈꾸듯 하는 환상이고 환영이라 하더라도 픽션이나 예술이란 삶과 자연을 모방하는 표절행위로서 실물의 그림자에 불과하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실물을 제쳐 놓고 그 그림자를 쫓아가며 허깨비를 실물보다 다 애지중지할 일 아니리라. 이런 뜻에서 ‘작가는 단순한 자연인이 아니다’란 주장은 자연인들처럼 삶에 열중하지 않고, 사는 시늉만 하면서 마치 문화적인 특권층 귀족이나 된 양 행세하고 허세 부리는 행태라고 지탄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독일의 시성(詩聖)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설파했듯이 “실제로 드러난 행동인 행실이 전부이고 명예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