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양파와 같다. 양파 껍질을 한 번에 한 꺼풀씩 벗기노라면 때로는 매워서 눈물이 난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나 난 내 길을 가고 있다”
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1878-1967)의 말이다. 그의 자서전 회고록 ‘언제나 낯선 젊은이들(1953)’에서 대장장이였던 그의 아버지 삶을 같은 세대의 유명한 정치인 제임스 블레인(1830-1893)의 인생과 대조시켜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미덕을 아래와 같이 칭송한다.
“속된 욕심에 찬 야망, 허위나 허세, 임시변통의 책략과 속임수로 점철된 제임스 블레인의 인생역정을 뒤돌아볼 때 그의 부귀공명보다 차라리 나는 내가 일일이 이름을 댈 수 있는 20여 명의 단순 소박한 노동자들의 삶을 택하리라. 이들은 세상이 좁다고 설치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않고 각자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를 내고 보람을 느낀다. 저 높은 자리에서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권력과 명예와 재산의 ‘매춘부’들과 비교할 때 나는 나의 부친 오거스트 샌드버그의 삶과 공적을 바로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비록 그 어떤 위원회 위원장이거나 위원은 아니었어도 아무도 아닌 ‘무명씨’라기보다 ‘유명씨’ 그 누구였다고. 당신은 인생 순례길에 만나는 아무에게도 못 할 짓 하지 않고 당신을 알게 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삶을 주고 가셨다”
이 말에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몸을 불살라 죽은 우리나라의 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미국의 뉴욕주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1957 - )의 부친으로 1983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 뉴욕주 주지사를 역임한 마리오 쿠오모(1932-2015)의 말이다.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특히 역경과 고난에 대해서. 어느 날 밤 불리하게 돌아가는 선거전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자포자기 상태에서 나는 내 골방 서재에 들어가 메모를 좀 하려고 연필을 찾았다.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아버지의 옛날 명함이 나왔다. 우리가 만들어 드린 것으로 그는 퍽 자랑스러워하셨다.
안드리아 쿠오모
이탈리안 아메리칸 식품상
우량 수입품 재고 다량
이 명함을 쓰실 일이 한 번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명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하셨다. 내가 지치고 낙담한 상태라고 하면 아버지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셨는지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식품점 뒤에 있는 아파트에 세를 들어 살다가 처음으로 우리 집을 갖게 되어 뉴욕 홀리스우드로 이사한 직후의 일이다. 집 주위로 땅도 좀 있고 나무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전나무과의 상록 침엽수 교목인 가문비나무로 높이가 40피트가량 되었다. 우리가 이사 온 지 한 주도 안 돼 굉장히 심한 폭풍이 불어 닥쳤다. 그날 밤 가게 문을 닫고 집에 와 보니 이 큰 나무가 뿌리가 뽑힌 채 넘어져 있었다. 프랭키와 나 우리 두 형제는 새파랗게 질려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오케이. 자, 일으켜 세우자.”
“아니,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나무뿌리가 다 뽑혀 땅 밖으로 나와 있는데요.”
“아니야, 우리가 일으켜 세우면 돼. 나무는 다시 뿌리를 땅속에 뻗고 높이 자랄 거야.”
우리 형제는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고 아버지 따라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그 큰 나무를 다시 똑바로 일으켜 세워 놓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나무뿌리가 박혔던 자리를 더욱더 넓게 파냈다. 그러자 나무는 점점 더 안전하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우리 형제는 부지런히 삽질해 진흙으로 뿌리를 덮고 또 덮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큰 돌들을 갖다 나무의 밑 둥지 둘레로 쌓고 나무 주위로 말뚝을 박아 밧줄로 나무줄기 몸통을 튼튼히 붙잡아 주셨다.
그러고 나서 두어 시간 지난 다음 둘러보시더니 “걱정하지 마라. 다시 잘 자랄 테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옛날 명함을 보면서 난 울고 싶었다. 오늘날 차를 타고 그 집 앞을 지나가노라면 그 푸른 상록의 침엽수 가문비나무가 크기 65피트 이상으로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언제 아스팔트 길에 코를 박고 넘어졌었더냐?’ 그런 일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명함을 책상 서랍에 다시 집어넣고 그 서랍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용기백배 분발하여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그 더욱 확고부동하고 굳은 신념으로.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이 집안마다 가풍이란 것이 있어 그 가풍을 보면 그 집안사람들 개개인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마리오 집안의 형제 얘기도 좀 해보리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사태로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그의 친동생 크리스 쿠오모가 진행하는 TV방송 CNN에 출연했다. 두 형제는 코로나 확산을 줄이기 위한 방안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중 느닷없이 동생 크리스가 형 앤드류에게 “형이 아무리 바빠도 엄마한테 전화 한 번 하세요”라고 했다. 그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이같이 티격태격하는 대화는 전 세계로 중계되었고 정치권의 화제가 되면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은 물론 트럼프를 훨씬 능가하는 열정과 진정성의 지도력으로 선친 마리오 쿠오모가 접었던 대망의 꿈을 실현하라는 국내외 여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92년 미국 대선에 나선 빌 클린턴의 선거 참모 제임스 카빌이 만들어 내세웠던 캠페인 슬로건이 ‘문제는 경제야’였었지만, 이제 코로나바이러스 역병으로 전 세계 인류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엔 그 무엇보다 ‘문제는 사랑이야’라고 해야 하리라. 가족사랑, 이웃사랑, 동족사랑뿐만 아니라 지구사랑, 자연사랑, 우주만물사랑, 곧 우리 각자 가슴속에 싹트는 ‘사랑의 바이러스’로 모든 ‘증오와 차별과 파멸의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정복해야 하리라.
“감사는 사유의 지고지순한 경지이고,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배가된 행복이다.”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 G. K. 체스터튼(1874-1936)의 말이다. ‘감사는 사유의 지고지순한 경지’란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배가 된 행복’이란 말은 내 성에 너무 차지 않는다. 나 같으면 행복감이 경이로움으로 ‘배’가 아니라 ‘억만배’ 된다 해도 부족하다고 말하리라.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애송시로도 잘 알려진 조선 후기 문인 임연 이양연(1771-1853)의 문집 ‘야설’에 수록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와 대비시켜 미국 굴지의 사업체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1964 - )의 ‘아마존 식’으로 불리는 생활신조와 지침을 우리 다 함께 생각해 보리라. 조만간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물론 실물보다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절감했다. 소매상과 쇼핑몰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아마존은 크게 번창했다. 이 ‘아마존 식’이란 다른 사람이 이미 걸은 길이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독창적으로 개척한다는 것이다.
‘난 별난 사람’이라는 자긍심이요 자부심이다. 이는 ‘실제로 실용적인 필요를 충당할 때 느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이고 마술적인 성취감’이란 뜻이다.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할 때 이는 참으로 도전적인 모험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다.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아마존 직원들에게 범용하고 열등한 용렬함을 기피하라는 근무작업 수칙을 세웠다. 따라서 많은 직원들이 마음을 크게 먹고 아직 그들이 가능성의 표면조차 건드리지 못한 상태임을 절실히 느끼는 일이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우리말로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영어로는 ‘모험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가 되리라. 참으로 인생은 모험이고, 사랑은 모험 중의 모험이어라.
그러니 ‘코로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우리 모두가 깊이깊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개개인마다 각자의 시원부터 생각해 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 그것도 엄마 혼자 산고를 치른 날을 축하하지만, 그 이전 엄마 아빠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즐거워하다가, 다시 말해, 생명의 음악을 통해, 엄마 몸속에 잉태된 ‘임신일’을 축하할 일 아닌가. 우리 모두 각자가 하나같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정자 중에서 선택받은 황태자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서 탄생한 새 별들이 아닌가.
그 이후로 우리가 숨 쉬고 살아온 순간순간이 더할 수 없이 기적 같은 축복의 연속이 아니었나. 또 그러니 우리 각자가 언제나 감사할 일이, 경이로움을 느낄 일이 어디 한둘인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하늘의 별보다 많지 않은가. 우리가 삶을 살면서 흔히 느끼는 실망 또는 절망이란 것이 우리 기대에 못 미쳤거나 미칠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고 이런 실망감 또는 절망감으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실망감이나 절망감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야말로 묘책 중의 묘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기대치를 낮춤으로써, 더 바람직하기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맨 밑바닥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항상 기대보다 웃도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어떻든 매사가 놀랍고 감사할 일뿐 아니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라지만 우리 모두 삶이라는 산을 한 발짝 한 발짝씩 오르는 흥분과 자극, 스릴과 쾌감, 그리고 가슴 뿌듯한 성취감까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빛이 나면 나는 대로, 별빛이 반짝이면 반짝이는 대로, 산천초목과 더불어 춤추고 기뻐할 일 아닌가. 천둥과 번개마저도 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황홀지경이 아니겠는가. 무엇이고 없을 무(無)보다는 있다는 존재 자체가 기적 이상이 아닌가 말이어라.
어디 그뿐이랴. 일체개공을 주장하는 공사상은 불교를 일관하는 교의 또는 사상을 말하는데, ‘공’은 산스크리트어 ‘순야타’ 비어있음을 번역한 것으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 서로 의존하는 연기의 입장에서 파악, 일체의 아집과 법집을 배격한 무애자재,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이고, 번뇌즉보리이며 생사즉열반이라고 중생의 미견으로 보면 미망의 주체인 번뇌와 각오의 주체인 보데가 딴판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두 가지가 하나이고 차별이 없으며 열반에도 열반의 모양이 없어서 온전히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환경과 삶’ 칼럼 ‘내 마음의 명왕성’이란 글에서 수필가 환경 엔지니어 김희봉 씨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
“태양계의 끝, 햇빛은 스러지고 별들만 숨 쉬는 곳, 불 꺼진 변방의 간이역처럼 홀로 떠있는 우주의 섬, 그 외로운 명왕성에서 기척이 왔다. 지난주 미국의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가 근 10년을 날아 근접한 명왕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2006년 태양을 등지고 날아간 무인선이 보내온 첫 영상엔 놀랍게도 커다란 하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달 표면의 계수나무처럼 명왕성엔 하트가 선명했다. 명왕성이 보낸 연서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우주의 별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원자의 수가 증감해도 총량 에너지양은 변하지 않는다. 또 있다. 빛의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 전자의 전하 등도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은 작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변하나 큰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섭리도 그럴 것이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 탐험선의 운행에 운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섭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옳거니,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으랴! 우주처럼 시작도 끝도 한도 모를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숨 쉬다 사랑으로 돌아갈 삶에서 이 사랑이란 경이로움의 극치에 우리는 무궁무진 감사할 일뿐이어라. 2015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 두 권이 오늘의 우리 시대상을 잘 관찰하고 진단한다. 그 하나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 놀라운 기계들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을 아는 우등생 인간들’로 저자 조프리 콜빈(1953 - )은 현재 컴퓨터가 인간이 해오던 일들을 인간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훨씬 더 능률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인간을 도태시키고 있지만 절망할 일이 아니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성 아닌 감성으로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란다. 기술적인 면은 기계에 맡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치중하면 된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자신과 영혼: 이상옹호론’인데 저자 마크 애드믄슨(1952)은 이렇게 관찰하고 진단한다. “서구 문화는 점진적으로 더욱 실용적이고 물질적이며 회의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같은) 성인 성자들은 의미 있는 자비심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재화를 획득하고 부(富)를 축적하노라면 인간의 참된 도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스러운 삶이란 욕망 이상의 인류를 위한 희망이다. 이것이 일찍부터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이다.”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내가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사랑’이란 말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어의 사자성어(四字成語) ‘love’는 우리말의 이자성어(二字成語) ‘사람’과 ‘사랑’이라는 동음동의어가 돼야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