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1886년 니체는 《선악의 저편》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이때부터 니체는 전혀 다른 문체로 철학의 길을 걷게 됩니다.
문체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것만이 니체를 니체답게 해 줄 것입니다. 그 이전의 문체를 알아야 그 변화를 깨닫게 됩니다.
변화에 대한 인식도 없으면서 니체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은 헛된 욕망으로 인식에 도전하는 꼴이 됩니다.
1885년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료했습니다. 이때까지 니체는 치열하게 문학과 철학이라는 두 개의 강물을 합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문학의 문학력과 철학의 철학력을 합쳐 놓는 일에 매진했던 것입니다. 비유의 힘과 논리의 힘이 합쳐지면서 제3의 힘이 발생했습니다. 그 두 개의 힘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새로운 문체가 탄생했습니다.
문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카프카의 문체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은 그의 문체를 ‘카프카에스크’라는 말로 형용합니다. 카프카의 글에는 결론이 있으면서도 그것은 결론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카프카의 문학적 인물들은 한결같습니다.
‘심판’을 받으려 하지만 그런 욕망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게 합니다.
‘법’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런 욕망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헛되게 보내게 합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런 욕망이 삶 전체를 망쳐놓는 꼴이 됩니다.
소설은 끝나지만, 그 끝남이 이야기의 끝을 형성해 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것이 카프카의 글이 전하는 묘한 매력입니다.
마찬가지로 니체의 문체는 묘한 매력을 지녔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떤 문체의 마지막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선악의 저편》은 또 다른 하나의 문체의 탄생과 시작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문체의 시작을 인식하는 것이 숙제가 됩니다. 《선악의 저편》과 함께 다른 문체는 고별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 주어야 합니다.
《선악의 저편》과 함께 니체의 문체는 문학적인 비유의 공식을 철학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을 지양하게 됩니다. 이 책과 함께 니체는 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이름을 언급하며 바로 네가 문제다 하는 식으로 공격을 해 댑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는 철학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이런 말만이 실용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보야! 네가 문제다!’ 니체는 문제를 위해 칼을 꺼내듭니다.
‘선악의 저편’에서 저편을 알고 싶으면, 이편을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이편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저편에 대한 인식을 얻으려 한다면 욕심이 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욕심은 언제나 부정적일 뿐입니다. 욕심으로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욕심은 버려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니체가 하는 말이 귓구멍에 박힐 것입니다.
이편은 현재 자신이 있는 곳입니다.
자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지도에서도 현 위치가 밝혀져야 그 지도가 쓸모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지도에서도 현실인식이 주어져야 그 인생이 효과적으로 변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해 댔던 것입니다.
그래도 니체의 말들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니 수수께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이편에 대한 인식은 자기만이 규정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밝을 철哲 자를 씁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것을 빛의 형식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해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빛 속에 있으면 행복을 느낍니다.
지옥과 연옥이라는 어둠의 세상을 거친 정신만이 궁극에 이르러 빛으로 충만한 천국이라는 저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