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동에서 만난 멧돼지 가족 안녕하신가요?

  

이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련없음.  출처;freepik 

 

연일 폭염과 열대야로 잠을 설치다 보니 종로구 홍지동 단독주택에서 살 때의 추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홍지동 34번지는 북한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배우 박보검이 가끔 등장한다는 상명대학교가 있어 학생들이 한바탕 왁자하게 밀려왔다 가고 나면 주민 70%가 어르신인 조용한 단독주택 단지입니다. 그러니 어린아이의 잔망스러운 걸음을 보기는 드문 곳이기도 하지요.

 

오히려 새끼 멧돼지를 보는 일이 잦습니다. 

7년 전, 11시쯤 퇴근하고 들어오다가 멧돼지 가족을 맞닥뜨렸습니다. 한창 멧돼지가 사람을 공격했다는 사건이 9시 뉴스에 자주 보도되던 때에 보게 된 겁니다.

 

제가 사는 주택은 경사지고, 골목이 좁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밤길이 무섭긴 했지만 산 밑에 있는 공터가 그나마 주차하기 만만한 곳입니다. 산은 한 덩어리로 묵직하게 검고, 가까운 나무들은 흔들흔들 달빛에 그림자를 만들어 상상하기에 따라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칠흑같은 길을 150미터쯤 걸어서 집으로 갑니다.

 

모두 잠든 밤 달빛에 의지해서 들어오는 길이 처음엔 오싹했는데,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다닐만했습니다. 워낙 깜깜하고 외진 곳이라 4년 사는 동안 늦은 시간에 사람과 마주친 적이 두어 번 있었을까요.

 

그러니 무서운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달의 주기에 따라 달라지는 밝기에 매일 새 옷을 갈아입는 산을 경험합니다. 그믐달에는 하늘에 그득한 별이 온통 제게 쏠립니다. 주변이 빈틈없이 먹칠해 놓은 것 같으니 하늘아래 산, 산 아래 저만 있는 듯 몽글한 대자연의 품에 포근히 안깁니다. 조금 전까지 입시학원에서 학생들과 전투하듯 수업하며 인상 쓰던 기억은 내 것이 아닌 게 됩니다. 보름달에는 것도 벚꽃이 피거나 눈이 덮여있기라도 하면 대낮과 다른 농도의 밝기에 취해서 밤을 잊습니다.

 

, 여름에는 풍성한 짙은 녹색이, 가을에는 떨어진 잎들의 바스락 거림, 겨울에는 그늘 진곳이라 녹지 않은 눈길을 미끄럼 타며 들어옵니다. 봄에는 100년 된 벚나무에 꽃이 만발하니 밤에도 이런 장관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상상을 하게 할 때가 더 많긴 합니다. 희끗희끗한 것이 멀리서 하늘거리고, 내 머리 위에서는 짙은 그림자가 흔들흔들해 대니.

 

그날도 시커먼 산과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들, 간간이 들리는 들개들의 무리 지어 내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세상에나 벚나무 그림자께에 모여 있는 멧돼지 가족을 보고 말았습니다.

 

순간 숨이 멎으며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제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발소리도, 멧돼지 소리도. 다만 온몸에 털이 빳빳하게 서며 머리가 서늘해져 왔습니다. 이 녀석들이 일제히 제게 달려오는 것만 같아서.

 

차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도 차를 향해 돌진할 것만 같고, 문을 닫고 출발하면서도 이 가족이 모두 차 꽁무리를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멧돼지 가족은 저보다 빨리 산으로 도망갔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멧돼지 가족은 그 밤에 거기서 뭘 하고 있던 걸까요?

벚나무 그늘을 즐기고 있던 걸까요. 가족회의라도 한 걸까요?

 

그 후에도 인기척에 놀라 들깨밭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제집을 찾아가던 멧돼지 그림자를 몇 번이나 봤습니다. 

달빛아래 멧돼지의 덩치와 굵고 까슬해 보이는 털을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것을 잠깐 봤을 뿐인데 자주 보니 멧돼지들도 가족같이 정겹습니다.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살기 폭폭할텐데 부디 그들 가족도 제 가족만큼이나 안녕하기를 빌어봅니다.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도 이 여름 안녕함이 깃들기를요.


K People Focus 최영미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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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8.17 08:39 수정 2024.08.1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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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