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에 자주 뜨는 단어가 있다. 일종의 외계인을 의미하는 ‘아웃라이어(Outlier)’를 말한다. 그 반대어는 내계인 ‘인라이어(Inlier)’가 되겠다. 본래는 지질학 용어로 인라이어는 새로 생긴 지층 암석인 아웃라이어 속에 박힌 암석층을 지칭하지만,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할 때는 속된 말로 사회적인 ‘또라이’를 이웃라이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이 또라이를 내가 의역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라이’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고 사회적인 통념을 깨고, 자신의 직감과 소신대로 집요하게 정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면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지난 2008년 출간된 ‘아웃라이어즈: 성공담’에서 저자인 캐나다 언론인 맬컴 글래드웰 (1963 - )은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요인들을 분석 검토한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미국 코미디 드라마 영화를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지적 장애인의 인간승리 이야기다. 또 한 편의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셰인(1953)’은 미국 서부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데, 바람처럼 나타나 악당들을 통쾌하게 물리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고독한 사나이로 나를 포함해 수 많은 청소년들의 영원한 로망이 되었다. 모든 남자가 ‘셰인’ 같이 멋진 남성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무라도 ‘포레스트 검프’는 될 수 있지 않으랴.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극히 평범하다 못해 평범 이하로 보이는 비범한 사람 말이어라.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영어로는 ‘숨은 영웅들’이라 한다. 이들이야말로 아웃라이어와는 비교도 안 되게, 겉이 아닌 속으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인라이어들이라고 우리는 극찬의 찬가를 부르리라. 감동적인 글 ‘아내의 희생’을 음미해 본다.
각막 이식수술을 받고 있었다. 마취된 눈언저리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으나 의식만은 또렷해서 금속제 수술 도구가 부딪는 소리라든가 주 선생의 나지막한 말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가 있었다. 오른쪽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염증이려니 여기고 대단치 않게 생각했으나 퉁퉁 부어오른 눈의 부기가 여간해서 내릴 줄을 몰랐다. 결국 타이페이의 3군 총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때는 이미 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난 뒤였다. 진찰 결과 각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절망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이미 나의 왼쪽 눈은 지독한 원시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세수수건 같은 것에서 옮았을 겁니다. 아니면 풀장에서였든가.” 주 선생의 말이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수영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나는 각막 이식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아내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녀는 얼굴이 환히 밝아지면서 아무 말 없이 예금 통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대만불(臺灣弗)로 2만 달러쯤 들어있는 통장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내부업으로 아내가 남몰래 모아온 피와 땀의 결실이었다.
“모자라면 또 어떻게 마련해 보겠어요.” 아내는 짐짓 웃어 보였는데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저 같은 것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눈뜬장님이니까요. 당신은 눈을 되찾아야 해요.” 주 선생은 대만에서 각막 이식수술의 개척가요 권위자였다. 내 이름은 즉시 수술희망자 명부에 올랐다. 그러고 채 한 달이 못 되어 주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교통사고로 죽은 운전기사가 있는데 죽기 전에 자기 몸의 여러 부분을 팔아서 쓰라고 아내에게 유언했답니다.
아이가 여섯이나 된다니까 그 살림 사정이야 알만하지 않겠어요. 그쪽에서는 각막을 양도하는 대신 1만 달러를 달랍니다. 어떻습니까?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수술비용과 입원비를 합쳐 대략 8천 달러 이상은 되지 않겠지 싶어 나는 그 각막을 양도받기로 하고 그 이튿날로 입원을 했다. 나는 매우 행운아인 셈이었다. 각막을 얻기 위해 몇 해씩 기다렸다는 수술희망자들의 이야기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들어왔던 것이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회복실로 들려져 갈 때 딸 소용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어요. 아빠, 엄마는 오고 싶지만, 왠지 두려워 못 오겠다고 했어요.”, “괜찮다고 하더라고 전해라. 아무 염려 말라고.”
나는 19세 때 부모의 권유에 따라 결혼을 했다. 나의 부친과 장인은 오랜 친구 사이로 만일 두 사람이 각각 아들과 딸을 두게 되면 결혼을 시키자고 총각 시절에 이미 약속을 해두었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결혼 당일이었다. 가마를 타고 온 아내가 신방에 들어온 뒤 머리에 쓰고 있던 금란직보를 벗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굴이 온통 우박 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인데다 주먹만 한 들창코, 그 허공으로 뻥 뚫린 두 구멍이 추악하게 벌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썹은 숫제 이름뿐이었고 눈꺼풀에 난 징그러운 흉터는 두 눈을 퉁퉁 부어오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나와 동갑내기라는데도 40여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기가 막힌 박색이었다. 나는 얼른 어머니 방으로 도망쳐 나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울먹였다. 어머니는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하라고 얼굴이 반반하면 틀림없이 얼굴값을 하게 마련이므로 결국 불행을 불러들이는 법이며, 오히려 복은 박색한테 붙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뭐라 하든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날 밤을 새웠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아내의 방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물론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 직후 나는 학교 기숙사로 갔고, 여름방학에도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의 당부를 받고 사촌형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내가 사촌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마침 저녁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아내는 나를 보자 사뭇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나는 기겁하고 외면을 해버렸다. 저녁이 끝나자 어머니가 나를 넌지시 불러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네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저 애는 얼굴은 비록 박색이라고는 해도 겪어보니 그렇게 마음이 어질고 착할 수가 없더라.”, “그야 어련하겠어요.” 나는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질렀다. “마음마저 흉측하다면 어찌 부모님께서 저런 계집을 내게 떠안겨 주었겠어요.”, “얘야, 저 애는 참으로 심지가 깊고 식구 누구에게든 헌신적인 여자란 말이다. 네게 소박을 당하고도 조금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을 찾아서 하고 또 깔끔하기가 이를 데 없단다. 네 태도가 그렇게 쌀쌀맞아도 원망은커녕 눈살 한번 찌푸린 적이 없다. 눈물을 보인 적도 없고…그렇지만 그 심정이 어떻겠니. 넌 생각해 본 일이 없겠지만 저 애 역시 여자라는 점에서 누구와도 다를 바 없잖니. 한세상 살다가는 걸, 남편 시중 잘 들고 순종하며 자식들 훌륭히 키워준다면 여자로선 더 바랄 게 없는 거야. 생으로 젊은 나이를 과부로 보내는 저 애가 너는 가엾지 않니?”
그 후 나는 눈을 찔끔 감고 아내와 한방에 들기는 했으나 얼어붙은 마음은 여전히 녹을 줄 몰랐다. 아내는 언제나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어쩌다가 한두 마디 말을 할 때도 모기 소리 같은 음성이었다. 내가 짜증을 부리면 잠깐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고 나서 얼른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아내는 어려운 살림의 여가를 틈타 밀짚모자를 만들고 돗자리를 짜며 그물을 손질하고 도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억척스레 일거리를 맡아했다. 그것은 정말 뼈가 부스러지는 노력이었다. 애들도 무럭무럭 자랐다. 우리는 한 번도 학교 관사에서 살아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상사나 동료들에게 아내의 몰골을 보이기 싫어한 까닭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딸 소용이는 대학을 나와 교원 생활을 시작했고 아들 녀석은 육사에 재학 중으로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는 터다. 수술 후 두 주가 지나 실을 뽑게 되었다. 그 두 주는 불안 속의 나날이었다.
“완쾌한다면 각막을 주신 분의 무덤을 찾아가야겠다.” 나는 딸애에게 말했다. 이윽고 눈에 감긴 붕대가 풀렸다. 나는 눈을 뜨기가 몹시 겁났다. 주치의가 물었다. “빛이 보입니까?” 나는 눈을 껌벅이며 대답했다. “네! 왼쪽으로요.”, “그건 전등빛입니다. 성공적입니다. 한 주 후엔 퇴원해도 좋소.” 주 선생은 내 어깨를 툭 치고 힘주어 말했다. 그로부터 1주일,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력 검사를 받았다. 처음엔 시야가 그저 희끄무레하기만 하더니 마침내 주치의가 내밀어 보이는 손가락도 알아볼 수 있게끔 되었다. 퇴원하는 날엔 창문이며 침대,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까지도 모두 또렷하게 보였다. “엄마가 아빠 좋아하시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세요.” 퇴원하는 날 소용이가 병원으로 나를 데리러 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택시로 집에 돌아왔다. 택시 안에서 소용이는 웬일인지 그 애답지 않게 새침하니 말이 없었다. 아내는 부엌에서 요리를 내오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무슨 까닭인지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예의 그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오십니까?”, “고마워, 고생 많이 시켰어.” 나는 식탁 앞으로 가 앉았다. 아내는 상을 다 보고 나더니 벽 쪽으로 돌아앉아 훌쩍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조금 전 하신 그 말씀…그 말씀만으로 저는 기뻐요. 제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떠듬떠듬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소용이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방에 뛰어 들어왔다. 그 애의 얼굴도 제 엄마처럼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딸애는 아내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엄마! 아빠에게 모두 털어놔요. 엄마가 아빠에게 눈을 뽑아 드렸다고요. 자아, 얼른 보여드리란 말이에요.”, “얘야, 너무 목소리가 높구나. 엄마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아내는 여전히 벽 쪽으로 돌아앉은 채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어깨를 잡아 얼굴을 돌리게 했다. 아내의 왼쪽 눈의 홍채는 수술 전의 내 눈처럼 흐려 있었다. “금화! 왜, 이런 짓을 했소.” 내가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신은, 당신은 소중한 제 남편인걸요.” 나는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격정이 화닥화닥 불꽃을 튀기며 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털썩 마룻바닥에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영화 한 편이 있다. 프랑스의 르네 클레망(1913-1996)이 감독한 ‘금지된 장난’으로 프랑스 극작가 프랑솨 봐예(1920-2003)의 동명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전화(戰禍) 속 어린아이들의 순수와 어른들의 미친 광기를 더할 수 없이 슬프고 아름답게 시적으로 그린 흑백 명작이다. 꾸밈없이 사실적이면서도 거의 초현실적으로 강렬하게 깊은 인상을 각인시키는 반전영화이다.
때는 1940년 6월, 나치의 프랑스 침공을 피해 파리로부터 남쪽으로 피난을 가던 5세 난 폴렛과 애견 족크 그리고 부모가 나치 공군의 공습을 받아 폴렛만 살아남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폴렛은 피난민이 강에 집어 던진 족크를 찾으러 나셨다가 동네 농부 돌레의 11세 난 막내아들 미셸(1940-2000)을 만나 미셸의 집으로 간다. 미셸의 가족은 폴렛을 따뜻이 맞아 한 가족처럼 지낸다. 그리고 미셸과 폴렛은 다정한 친오빠와 동생처럼 친해진다.
미셸과 폴렛은 죽은 강아지 조크를 버려진 물방앗간 안에 묻으려는데, 조크가 외로울 것을 폴렛이 걱정하자, 미셸은 방앗간 안 둘만이 아는 무덤에 죽은 두더지와 곤충과 병아리와 쥐들을 같이 묻어주고, 무덤을 십자가와 꽃들로 장식해주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미셸은 무덤에 꽂을 십자가들을 훔치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말에 채여 죽은 자기 맏형 조르지의 관을 실은 영구 마차의 장식품 십자가를 비롯해 성당 제단에 있는 십자가까지 훔치다가 신부에게 들켜 혼이 난다.
그러다 미셸과 폴렛은 성당 옆 공동묘지에 있는 십자가들을 손수레에 싣고 자기들만의 묘지로 옮긴다. 신부로부터 십자가 도둑이 미셸이라는 말을 들은 돌레는 미셸을 마구 두들겨 패면서 십자가들의 행방을 추궁하나 미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밝히지 않는다. 이때 마침 경찰이 폴렛을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 돌레 집을 찾아온다. 안가겠다고 우는 폴렛과 떨어지기 싫은 미셸은 아버지에게 십자가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폴렛을 보내지 말라고 사정한다. 돌레가 그러겠다고 하자 미셸은 십자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약속을 어기고 폴렛을 경찰에 넘기자 미셸은 묘지로 달려가 십자가들을 죄다 망가뜨려 버린다. 인파로 붐비는 기차역,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에 젖은 눈동자로 역사에 쪼그리고 앉아 폴렛은 자기를 수녀원의 고아원으로 데려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때 누군가 “미셸”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폴렛은 벌떡 일어나 “미셸”하고 부르나 그 미셸은 다른 남자의 이름이었다. 폴렛이 계속해 미셸을 찾으면서 역 안의 인파 속으로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보는 사람 가슴 미어지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 준다. 베니스 영화제 대상과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정직성에 대비시켜 어른들의 기만과 이기심, 인간의 잔인성과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의 광기와 참극을 규탄하고 통탄하는 최고의 걸작 명화인데, 기타로 연주되는 유일한 음악 나르시소 예페스(1927-1997)의 ‘로망스’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아, 선각자 한 사람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시집 ‘순수와 경험의 노래: 천지무구와 유구송’ 말이다. 이 두 노래는 동요동시집이다. ‘순수의 노래’가 어린이들의 ‘순수한 천국’에 대한 찬가라면 ‘경험의 노래’는 어른들의 ‘미친 세상 지옥’에 대한 비창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노래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특히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공전의 중차대하고 엄중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아직까지도 스스로 ‘명품’이 될 생각을 못하고 명품을 갖지 못해 애쓰는 세상이고, 환영 이미지 아이콘에 집착하는 세태이지만 시조시인 조운의 ‘석류’를 우리 음미해 보리라.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좋고 아름다운 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내부에서 자라 영글면 넘쳐나는 것임을 깨우치게 하는 시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말이어라. 우리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밖을 보기 위해서는 안을 봐야 한다는 진리일 것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이 ‘좋아요’를 보완할 버튼을 만들고 있다고 밝히자 그 이름이 ‘안 좋아요’가 될지 ‘싫어요’가 될지 ‘슬퍼요’가 될지 ‘별로에요’가 될지 관심을 끌었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가수 임재범(당시 53세)이 3년 만의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선공개곡 이름을 2015년 10월 6일 음원사이트에 올렸는데 ‘바람처럼 들풀처럼 이름 없이 살고 싶었던 남자가 소중한 한 사람에게 만큼은 특별한 이름이고 싶다’는 주제라고 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아 보컬리스트로서는 초심으로의 회귀, 음악적으로는 발전을 꾀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작으며 가장 가벼운 소립자인 중성미자의 존재가 근래에 와서 주목을 받고 있다. ‘작은 중성자’라는 뜻의 중성미자가 워낙 작고 전기적으로도 중성인 데다 무게도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할 정도로 가벼워 존재 확인이 극히 어렵지만, 현재 확인된 중성미자의 무게는 양성자의 1/1836인 전자의 100만 분의 1에 불과하며 1광년 길이의 납을 통과하면서도 다른 어떤 소립자와 충돌하지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한다. 이 중성미자는 태양에서 만들어져 날아온 것인데 관측된 수치가 이론적으로 예측된 수치의 1/3에 불과했던 것을 중성미자가 날아오는 동안 계속 ‘형태’를 바꾼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 바로 일본의 물리학자 가지타 다카아키와 캐나다의 천체물리학자 아터 맥도날드이다. 이 공로로 이 두 사람은 2015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자가 됐다.
이 중성미자의 변형은 우주 탄생의 비밀과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우주가 탄생했을 때 물질과 반물질의 비중은 거의 같아, 이 둘이 서로 만나면 폭발해 없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왔는데, 중성미자의 변환 과정에서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 더 남았다는 설이 최근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천문학자나 과학자도 아닌 문외한인 내가 이를 감히 아주 쉽게 풀이해 보자면 이 ‘물질’이 ‘좋아요’이고 ‘안 좋아요’가 ‘반물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만, 나머지는 다 우리 각자의 선택사항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어떻게 사느냐 가, 일찍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주 만물, 세계만인 다 ‘좋아요’ 버튼만 누르고 또 누를 대상만도 부지기수,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좋아요’ 버튼만 누를 시간만도 너무너무 부족한데, 어찌 ‘안 좋아요’나 ‘싫어요’ 또는 ‘슬퍼요’나 ‘별로에요’로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으랴.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좋아하고 사랑할 때 천국을, 싫어하고 미워할 때 지옥을 맛보게 되지 않던가. 그러니 ‘반물질’의 ‘안 좋아요’가 카오스를 불러온다면 ‘물질’의 ‘좋아요’는 ‘아브라카다브라” 주문 외듯 코스모스를 피우리라. 온실의 화초를 옥이라 한다면 들의 잡초는 돌이라 하겠지만 옥도 돌이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옥과 돌을 구별한다. 그래서 ‘돌을 차면 발만 아프다.’ 하는 것이리라.
최근 하버드대 토론연합(HCDU)이 뉴욕 동부교도소 재소자들과의 토론 대회에서 패배했다. 하버드대 재학생들로 구성된 토론연합은 미 전역 및 세계챔피언 전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일류 토론팀이다. 뉴욕 동부교도소 재소자들의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소자들은 토론동아리를 만든 이후 2년 동안 미국 대학 토론팀들과 시합을 벌여왔으며,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토론팀도 이겼다.
상아탑의 최고 명문대 학생들이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야생의 잡초들은 살아 남지만 온실의 화초들은 그럴 수 없듯이 말이어라. 탁상공론의 지식과 (울어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어이가 없어 울 수 없으니까 마지못하여 웃는다는 뜻으로) ‘울어 난’ 삶의 지혜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 칼릴 지브란(1883-1931)의 ‘방랑자(1932)’가 ‘모래사장에 적은 글’을 우리 함께 심독해 보리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래전 밀물 때 내 지팡이 끝으로 모래 위에 한 줄 적었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멈쳐 서서는 유심히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이 지워지지 않게 조심한다네.”
그러자 그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썰물 때 나도 모래 위에 한 줄 적었지만 파도에 다 씻겨버렸다네. 그런데 참 그대는 뭐라고 썼는가?”
첫 번째 사람이 대답해 말하기를,
“나는 이렇게 썼다네. ‘나는 있는 그 (사람)’이라고. 그럼 그대는 뭐라고 썼었나?”
그러자 그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나는 적었었네. ‘나는 이 대양(大洋)의 물 한 방울일 뿐이라’고.”
칼릴 지브란의 아포리즘 잠언집 ‘모래와 파도의 물거품 포말’에 나오는 어록 한마디도 우리 깊이 음미해 보리라.
언젠가 한 번 나는 내 손 안에
안개를 가득 채웠지.
그리고 나서 내 손을 펴보니,
손안에 있든 안개가
벌레 한 마리로 변했어.
내가 손을 쥐었다가 다시 펴보니,
내 손 안에 있던 벌레가
새 한 마리로 변했어.
내가 손을 쥐었다가 또다시 펴보니,
내 손 안에 있던
새는 없어지고
어떤 한 사람이
슬픈 얼굴로 서서
날 쳐다보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손을 쥐었다가 펴보니,
이번엔 내 손 안에 아무것도 없고 물안개뿐이었어.
하지만 한없이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렸어.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