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한계가 한 개가 되면 큰일 납니다.
한계가 하나로 굳으면 안 됩니다. 한계는 늘 넘어섬의 대상이 되기도 하도 또 동시에 넘어선 뒤의 일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 또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스승의 교수자격 논문 주제는 ‘니체의 총체성’이었습니다. 이 개념은 늘 논쟁의 중심에 서야 했습니다. 학회가 열릴 때마다 스승은 중심점을 형성했습니다.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아무도 스승의 입장을 대놓고 거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스승은 외롭게 싸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총체의 총체성을 밝히고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가장 자주 언급된 논쟁의 주제는 히틀러 시대에 유행했던 ‘전체주의’와 연관된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스승은 그것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그 경계선을 선명하게 밝혀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늘 철학적 이념과 정치적 이념은 서로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목소리 큰 사람이, 분노하는 사람이 진리의 권리를 꿰차는 듯도 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나도 논쟁에 끼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라는 개념으로 스승을 변호하였습니다.
“하나가 문제입니다!”
한 동양의 외국인이 독일어로 말을 하고 있어서 신기하게 여겼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전체주의는 하나를 위한 정신이 목적이지만, 니체의 초인사상은 하나를 지향하면서도 그 하나를 지양하고자 하는 연속과 지속의 문제이다’라는 것이 내 생각과 주장의 핵심이었습니다.
니체는 삶을 설명했습니다. 삶은 하나로 결정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를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개인이지만, 그 개인은 무궁무진합니다. 죽기 전까지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지속시킬 뿐입니다. 매순간, 사람은 그 순간의 의미를 꿰참으로써 새로운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순간을 알아야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온 나라가 하나의 이념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는 것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이념 속에서 독재가 탄생하고, 각각의 개인을 구속하려 드는 정신이 탄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정적입니다. 모든 탄생은 새로운 탄생으로 거듭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니까 힘을 하나로 뭉쳐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는 시도 자체는 부정적이 될 수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독일어로 독일 대학의 강의실을 채우고 있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순간, 스승의 눈빛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가 문제다!’라는 말을 이해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나의 눈은 스승의 눈빛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맞닿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두 개의 마음이 화합하는 순간의 쾌감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온 몸을 타고 흘러가는 전율을 느끼면서 말을 계속해 댔습니다. ‘하나가 문제다!’ ‘하나는 전체의 일부분이고, 전체는 하나를 전제로 하여서만 완성될 수 있다!’ ‘하나는 극복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삶의 목적이다!’
스승과 나는 늘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고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를 구석에 앉혀 놓고 논쟁을 연습하던 순간은 아직도 꿈에 나타납니다. 내 뒤에는 부처님의 두상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 촛불까지 켜 두었습니다. 그 빛이 연출해 내는 분위기는 오묘했습니다.
우리는 밤늦도록 말로 말잔치를 벌였습니다.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를 만들고, 문제로 길을 만들고, 문제로 길을 찾아가는 동반자였습니다. 나의 스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