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해심(海心) 타령

이태상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1936년 말에 가수 고복수(1911-1972)가 부른 ‘짝사랑’이란 노래 가사다. 여기서 말하는 ‘으악새’는 ‘억새’로 알려져 있다.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살랑거리는 억새의 사각거림을 슬피 운다고 표현했으리라.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잃어버린 봄’이 되어서인지 지금부터 벌써 가을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모든 어린이들처럼 나도 아주 어릴 적부터 모든 사람, 특히 여자와 아가씨를 무척 좋아하다 보니, 그야말로 ‘다정도 병이런가’ 짝사랑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이게 어디 사람뿐이랴! 하늘도 땅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말이어라. 고은(본명: 高銀泰 1933 - ) 시인의 글을 나는 이렇게 바꿔보리라. 

 

‘삶은 소설이 아니네. 삶은 해석이 아니네. 삶은 시이네.’

 

아니, 그보다는 ‘삶이 산문이라면 숨 쉬는 숨은 시’라고 하리라. 대학 시절 강의실보다는 음악감상실이나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내 짝사랑을 소설화 해보겠다고 긁적인 초고 ‘내가 걸어온 자학의 행로’ 앞부분을 이어령 대학 선배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의 평(評)은 이러했다. 

 

“이 ‘자학의 행로’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불후의 세계명작을 쓴 작가들의 심오한 사상이 모두 다 들어 있지만 전혀 요리가 안 된 상태이다. 그러니 독자가 먹기 좋게 살도 부치고 양념을 쳐라.”

 

하지만 나로서는 그럴 재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 싶지도 않아 일찌감치 작가가 될 생각을 접고, 차라리 인생이란 종이에 삶이라는 펜으로 사랑이란 피와 땀과 눈물을 잉크 삼아 소설이 아닌 시를 써보리라 작심했다. 그것도 단 두 편이면 족하리라 생각했다. 그 하나는 내 ‘자화상’이고 또 하나는 먼 훗날의 내 ‘자서전’이라고 나 스스로 명명한 ‘바다’와 ‘코스모스’란 시다. 이 둘을 하나로 합치면 ‘코스모스바다’가 되리라. 

 

이게 어디 나뿐이랴. 코스모스바다의 물방울들이 사랑의 숨으로 기화하여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무지개 타고 황홀하게 주유천하 하다가 코스모스바다로 돌아갈 우리 모두의 참모습이며 여정이 아니랴!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리라. 1987년에 나온 김윤희(1947-2007)의 장편체험소설 ‘잃어버린 너’가 있다. 그녀의 시공은 물론 생사까지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실화소설은 수백여만 부 팔렸고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되어 일본 독자들까지 사로잡은 체험 소설이다. 1991년에는 김혜수, 강석우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한 남자와 나누었던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사별을 담은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한국 출판마케팅 연구소가 1999년에 조사한 ‘20세기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19위에 올랐었다. 이러한 사랑을 솔새 김남식은 ‘사랑 愛’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그대가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믐달 같은 거

 

다시

사랑한다 하여도 

그대가 될 것이며

 

다시 

이별한다 하여도 

그대가 될 것을 

 

불사조처럼 

죽고 못 사는 이가 

되리라

 

그녀는 한동안 화장도 않은 채, 검은 옷을 수년간 입고 다녔으며 커피 둘, 프림 둘 그렇게 아침이면 모닝커피 두 잔을 만들었다고 했다. 한 잔은 그 사람 자리에 놓고 나머지 한 잔은 그 사람을 생각하며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이 많이 힘들고 아팠지만 행복했던 날이었고 그렇게 그와 어설프게 함께 한 18년이란 세월이 외롭고 가난했지만 시간을 같이한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며, 책 끝에 적었다. 그를 보내고 난 뒤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주위의 권유로 체험 소설을 쓰게 된 그녀는 그와 보낸 지난 일을 글로 적어 가면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끈으로 인해서 두 사람은 늘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지 33년이 되는 오늘날 재판이라도 다시 나오게 된다면 그 제목을 ‘잃어버린 너’가 아닌 ‘되찾을 나’라고 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3년 여름 43세가 되도록 독신으로 지내오다 인터넷을 통해 피부암 말기 환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만난 지 18개월 만에, 결혼하고 5개월 후, 남편과 사별한, 1993년부터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Scottish Chamber Orchestra) 첼리스트로 근속해온 내 둘째 딸 수아는 6개월간의 안식년을 얻어 유럽, 미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등,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며 “결코 혼자가 아니라 늘 남편 고든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을 실감한다”는 말을 나는 듣게 되었다. 김윤희와 수아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축복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몹시 부러워하면서 축복할 뿐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사랑의 영원한 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이 한없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기적 같은 사실과 진실을 어찌 축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현미와 백미 또는 찹쌀과 멥쌀을 반반씩 섞은 걸 ‘반반미’라고 한다. 영어로 ‘그는 아직 너한테 홀딱 빠지지 않았어’라는 표현이 있다. 네게 전적으로 끌려 온통 반해버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남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빨리 또는 천천히 친해질 수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사안이다. 흔히 영국 사람들은 유보적이라고 한다. 

 

내가 영국에 가서 받은 첫인상이 예의 바르고 정중하면서도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강요받고 있지만 이를 영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한다. 처음엔 대영제국의 후예들로서의 우월감의 발로인가 했는데 10여 년 영국에 살아보니 그게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고, 시간이 좀 걸려도 서로 잘 알게 되면 깊은 정을 나누게 되더란 것이다. 

 

우리말에도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꿀과 같고, 대인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다 하지 않았나. 우리 동족 한인 사이에서도 너무 쉽게 사귄 사람과는 지속적인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고, 남녀 간에서도 너무 빨리 달아오른 열정은 그만큼 빨리 식어버리지 않던가. 쉽게 얻은 재산 쉽게 탕진하듯이 말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나 ‘물방울이 모여 대양’이란 속담이 있듯이 애정도 우정도 인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처럼 태산과 대양의 축소판이 티끌이요 물방울이라면 인류의 축소판이 개인일 테고, 하찮은 아무나 아무것도 그 확대편이 대우주 코스모스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무엇이든 누구이든 제각기 다 온전한 소우주인데 이를 어찌 반쪽으로 쪼갤 수 있으랴. 그러니 어느 누구나 무엇에 반한다는 건 자기 자신에 반하는 짓이요, 스스로를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으랴. 

 

영어에 ‘내 짝’이란 뜻으로 ‘my better half’란 말이 있다. 이를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난 너의 멥쌀, 넌 나의 찹쌀’이 되겠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반(半)할 수도 변(變)할 수도 없으려니와 반(半)해서도 변(變)해서도 아니 되리라. 다만 온전(穩全)한 나로서의 나와 온전한 너로서의 네가 반쪽이 아닌 통째로 합해 너무 차지지도 않지만 쫀득쫀득하게 맛있는 밥을 지으면 되리라. 

 

또 영어에 그 어떤 무슨 일에 전심전력하지 않고 반신반의하면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걸 ‘반심’으로 한다는 뜻으로 ‘half-hearted’라고 한다. 사업이든 사랑이든 삶이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니 하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뭣이든 이왕 할 바에는 온 심혼을 다 쏟아부어야 성과나 보람도 있고, 그 결과가 어떻든 하는 재미와 쾌감도 느낄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무엇보다 귀중한 ‘삶’이란 엄청나게 큰 선물을 받은 것이고 순간순간 보고 듣고 느끼며 겪게 되는 모든 사물 곧 만 가지 일과 우주 자연 만물이 그 어떤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 중의 선물 아닌가. 이러한 선물을 보배로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쓰레기로 버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사항임이 틀림없으리라. 

 

근친교배라 했던가. 우리말로 ‘끼리끼리’ 영어로는 ‘Like attracts like.’라고, 세상은 거울과 같아 내가 웃으면 세상도 웃고 내가 울면 세상도 울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읽고 보든 각자는 각자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악한 반응(response)을 우리말로 줄여서 ‘악플’이라 한다는데 이 악플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니 이 얼마나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자신의 존재가치는 천부지재 천지의 큰 사랑이고, 스스로가 대우주 축소판인 소우주인데, 그 어찌 나 아닌 다른 그 어느 누구의 반응에 휘둘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옛말에 같은 이슬이라도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나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지만 독조차 약이 될 수 있지 않던가. 칼릴 지브란(1883-1931)이 그의 ‘예언자(1923)’에서 말하듯이.

 

길 가다 누가 넘어지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발부리에 걸리는 돌 있다

조심하라 일러주는 것이리

 

그러니 ‘악플’ 다는 사람들을 ‘반면교사’ 큰 스승으로 모시고 십자가를 나 대신 져주는 희생자로 고맙게 여길 일이어라. 옛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을 보면서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영국의 한 재판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신의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바로 저 죄인이었을 텐데...”

 

이를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미사고(미안해 사랑해 고마워)’가 되리라. 동시에 또한 제1회 코스미안상 응모작 선집 ‘69 프로젝트’에 실린 글들 가운데 고승우 님의 심오하고도 해박한 두 편의 에세이 ‘인간이란 무엇이고 그 미래는’ 그리고 ‘세상사 복잡하지만 큰 원칙의 틀 안에 있어’는 우리 인류의 미래상을 더할 수 없도록 명쾌하게 제시한다. 그는 서두에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의 하나인가, 아니면 신과 동물의 중간, 혹시 신비한 존재인가”라고 원초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인면수심의 부정적인 측면도 인간의 DNA에 들어있다는 점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개탄할만한 그런 자질들이 인간의 됨됨이 속에 포함된다 해도 본질적인 면에서 중시할 점을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는 한 조상의 후예로 오대양 육대주의 문화 문명이 꽃핀 것은 인류의 유전적 자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역겨운 인간의 자질 몇 가지 때문에 망각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20세기 전후에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는 사상이 나온 것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 다 함께 상상 좀 해보자. 인간에게 신적인 신성만 있어 신처럼 완전무결하고 완벽하다면 이야말로 인공지능의 로봇과 무엇이 다르랴! 인간에겐 짐승과 같은 수성(獸性)도 있기에 우리가 인격 이상의 신격으로 상승할 수도 아니면 인격 이하의 수격(獸格)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취사선택의 자유가 있는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이어서 고승우 님은 그의 두 번째 에세이에서 “세상사가 변화무쌍하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 우주의 법칙 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무질서한 것 같아도 큰 질서 속의 무질서인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달았을 때 지구촌의 앞날이 더 긍정적으로 될 것이다.”라고 낙관한다. 옳거니! 우리의 큰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라 해도 각자는 각자대로 작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물방울들이 모여 대양을 이루듯이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리. 이를 진인사대천명이라 하던가.

 

정녕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이렷다.

양자 간에는 무한한 거리가 개재한다.

 

하늘이 땅일 수 없듯이 

땅이 하늘일 수는 

그 더욱 없으리라,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신은 하늘에서 살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짐승은 땅에 산다면

신과 동물의 튀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할까.

 

모든 인간은 현실을 초월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기에 땅을 밟고 산다. 그렇지만 얼굴만은 하늘을 우러러 살아야 하리라. 이것이 인간 된 도리이리라. 진실로 이상은 정말 실현될 수 없는데 그 뜻과 의의가 있으리. 하늘이 끝도 한도 없이 높은 것처럼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추가함으로써 인간은 끝없이 노력하고 따라서 한없이 발전 향상할 수 있으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와 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염원하고 기원하면서 영원한 ‘인간 수수께끼’를 풀어볼 수밖에 없어라. 그동안 최근에 와서 서구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전 세계로 범람하면서 거의 모든 나라 모든 사회에서 사람을 포함해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왔다. 특히 연말이면 예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으로 아우성이었다.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 오 헨리(1862-1910)의 ‘현자(賢者)의 선물(1905)’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상업화된 명절의 거의 무의미하고 요란한 소비문화가 낳은 폐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 가공 허탄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등장시켜 퍼붓는 선물 세례라지만 이 관습이 얼마나 진정으로 어린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인지 심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내 외손자 일라이자(Elijah)가 하나님은 어디 있고, 남자냐 여자냐, 생뚱맞게 묻는다. 이런 질문에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어떤 해답을 그 누가 해줄 수 있을까. 2007년 9월 카네기 멜런 대학의 컴퓨터 과학 교수 랜디 파우쉬(1960-2008)는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10개월 전 행한 그의 ‘마지막 강의’에서 무엇보다 동심의 경이로움을 극구 강조하면서 어린 애들이 침실은 물론 집안 모든 벽면에 마음대로 그림도 그리고 낙서하도록 했다고 했다. 

 

비싼 고가의 세계 명화들을 걸어 놓기보다 이 얼마나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중하고 훌륭한 애들의 아름다운 걸작품의 산실이요 전시장인가! 얼마 전 그림 경매에서 두 번째 고가로 유대계 이탈리안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1917년작 그림 ‘누워있는 나부’를 1억 7,040만 달러에 낙찰받은 중국 부자 류이첸(당시 52세)이 화제가 되었었는가 하면 캐나다에서 있었던 다음과 같은 실화는 상품의 허상과 사랑의 실상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개한다.

 

한 남자가 어려서 학대를 받았으나 열심히 노력 끝에 자수성가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아들이 생겼고 선망의 대상이자 인생의 목표인 최고급 스포츠카를 구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차고에서 차를 손질하러 들어오던 그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린 아들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못을 들고 최고급 스포츠카에 낙서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성을 잃은 그는 손에 잡히는 공구로 아들의 손을 가차 없이 내리쳐버렸고, 아들은 대수술 끝에 결국 손을 절단해야 했다. 수술이 끝나고 깨어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잘린 손으로 울며 빌었다. 

 

“아빠, 다신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이 어린 소년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저녁 차고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가 본 것은 차에 그의 아들이 남긴 낙서였다. “아빠, 사랑해요” 상품 같은 미인이 되려고 성형수술을 받다가 미인은커녕 괴물이 된 수많은 사람이 있다지만, 몸짱이 되려다 1년 만에 할머니가 된 여성 보디빌더가 있다. 2015년 11월 24일 ‘데일리 메일’은 러시아 노보시르스크에 사는 안렉산드라 루덴코 (당시 24세)라는 한 여성 보디빌더의 사연을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루덴코는 그동안 세계 피트니스 챔피언십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을 하며 몸을 키워왔다.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루덴코, 그 덕분에 탄탄한 허벅지 근육은 물론 완벽한 식스팩까지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루덴코는 그 이후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자신의 SNS에 그동안의 달라진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1년 전 젊고 건강미 넘치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루덴코는 말 그대도 백발의 노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진짜 보배로운 자신을 기리는 보배 ‘보’ 자신의 ‘자’ 기리는 ‘기’ 이 세 글자를 합성해 만든 단어 ‘보자기’ 대신 신기루 같은 거짓된 미라지(mirage), 곧 거짓된 ‘거’ 자와 미칠 ‘미’ 자를 붙인 ‘거미’줄에 목을 매지 말라는 산 교훈이리라. 

 

사실인지 지어낸 얘기인지 몰라도 내가 젊었을 때 듣기로는 제주도 방언 사투리로 ‘보자기’는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고 했다. 크든 작든, 길든 짧든, 어떤 색감 어떤 생김새이든, 웬만한 물건이면 다 잘 쌀 수 있는 보자기의 용도를 생각해보자. 요즘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가방이 생기기 전에는 보자기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품이었다. 이렇게 물체가 뭐든 담을 수 있는 물질적인 ‘몸의 보자기’ 용도가 크겠지만, 무궁무진하게 무한히 더 큰 게 ‘마음의 보자기’가 아닌가. 우주 만물을 다 품는 ‘바다의 마음 해심(海心)’ 같은 보자기 말이어라. 어쩜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런 공부를 열심히 해 온 것만 같다. 해심(海心)이란 자작 아호(雅號)까지 써가면서 인생공부에 매진했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신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에 찬 갈매기의 고향은 

출렁이는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부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 흘러

바다로 간다. 

 

이렇게 내가 나의 어머님 뱃속에서, 아니 어쩌면 태곳적 옛날 바다의 품속에서 받은 태교육을 이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도 계속 받고 자란 탓인지 내 나이 열 살 때 지은 이 동시 아니 주문(呪文)을 내 인생 팔십 팔 여 년이 되도록 밤낮으로 쉬지 않고 숨 쉬듯 나는 이직도 외고 있다. 

 

내 마음도 

네 마음도

밀물 썰물

파도 치듯

우리 가슴

뛰는 대로 

우리 고향

코스모스

저 바다로

돌아가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4.09.07 09:36 수정 2024.09.0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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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