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구화역(仇化驛)’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구화역은 1593년 일기에 2차례 언급되어 있다. 지명의 형태로 보아 역원(驛院)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구화역은 어디를 가리키는 지명일까? 다음은 구화역이 나타나는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1593년 3월 21일(경오) 맑고 따뜻하였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하였다. <<중략>> 오후 6시경에 벽방(碧方)에서 망보는 장수의 보고에 “구화역(仇化驛)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와서 정박하였다.”라고 하기에 배로 내려가 삼도 수군에게 진격하자는 약속을 전령하고 제홍록이 보고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1593년 3월 22일(신미) 밤 1시경에 제홍록이 와서 말하기를 “왜선 10척이 구화역(仇化驛)에 이르렀고, 6척이 춘원(春原)에 이르렀다.”고 하였지만 날이 이미 밝아 뒤쫓아가 공격하지 못할 것이므로 다시 정찰하라고 명령하여 돌려보냈다. <<후략>>
위 일기의 기록에는 구화역의 지명 이외에 ‘벽방(碧方)’과 ‘춘원(春原)’이라는 지명도 등장한다. 벽방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와 고성군 사이에 걸쳐 있는 벽방산을 가리키며, 왜선 6척이 이르렀다고 서술한 춘원은 춘원포를 말한다. 춘원포는 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황리 일대의 옛 지명이다. 벽방산과 춘원포의 위치와 함께 위 일기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구화역은 벽방산에서 내려다 보이면서 춘원포와 그리 멀지 않은 해안에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의 통영시는 조선시대에는 고성에 속한 지역이므로 임진왜란 시기 벽방산, 춘원포는 모두 고성에 속한 지명이다. 다음은 1970년대 통영군 광도면 일대 지도에 고성읍치, 벽방산, 춘원포를 표기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벽방산과 춘원포 부근에는 구화역과 발음이 매우 비슷한 구허역(丘墟驛)이라는 역원이 있었으므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구화역은 구허역의 오기로 보인다. 아마도 현지인들이 구허역을 말하는 것을 듣고 적당한 한자로 음차하여 구화역으로 적은 듯하다.
구허역은 고려시대의 부곡인 구허부곡(丘墟部曲)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성현」을 살펴보면 고적(古跡)조에 구허부곡(丘墟部曲)이 나오고 역원(驛院)조에 구허역(丘墟驛)이 나오는데, 두 곳 모두 ‘고성읍치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위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허역은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와 『동국여지지』에도 등장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마찬가지로 ‘고성읍치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위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허역은 근현대 지명 자료를 통해 그 위치가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해방 이후인 1959년에 제작된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의 통영군 광도면 노산리 기록을 살펴보면, 지금의 노산리 노산재(魯山峙) 북쪽에 있는 노산삼거리 일대 지명을 ‘구허(邱墟)’·‘주막촌(酒幕村)’·‘남노산(南魯山)’으로 기록하였다. 『통영시지』(2018년)에 따르면 ‘주막촌(酒幕村)’은 옛 구허역(丘墟驛)과 함께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으며, ‘구하’·‘구헉개(丘墟浦)’로도 불렸다고 한다. 또한 『통영시지』는 주막촌이 역마을이라 하여 ‘역말’·‘역몰’로 불렸다고도 기록하였다. 즉, 구허(주막촌·남노산)가 바로 조선시대 구허역이 있던 곳이다. 다음은 『경상남도지명조사철』에 나타나는 ‘구허’·‘주막촌’·‘남노산’ 기록이다.
위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은 구허(주막촌·남노산) 이외의 주변 지명도 함께 기록하였으므로 그 일대 지명들의 위치를 서로 비교 파악할 수 있다.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은 지금의 노산리 상노산을 ‘신촌(新村)’·‘새땀’·‘상노산(上魯山)’으로, 노산리 본 마을을 ‘본촌(本村)’·‘대촌(大村)’으로, 노산리에서 죽림리로 넘어가는 노산재를 ‘노산치(魯山峙)’·’구허치(丘墟峙)’·‘구허재’로 기록하였다. 이들 지명은 현대 지도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은 이들 지명이 나타나는 1970년대 노산리 일대 지도이다.
다음은 노산리 본 마을과 구허 일대를 찍은 1948년 항공 사진으로서 당시의 지형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구허역은 위에서 살펴본 자료뿐만 아니라 구허역 주변 역도(驛道)를 통해서도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시대 구허역은 배둔역→송도역→구허역→오양역으로 이어지는 소촌도(召村道) 역도망(驛道網)에 속했다. 지금의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에 있었던 송도역에서 출발하여 구허역으로 가는 조선시대 노선은, 통영시 도산면 원산리 원동(院洞) 마을을 지나 도산면 관덕리 한치(한티, 한퇴)고개를 넘어 도산면 관덕리 한퇴골을 거쳐 구허역까지 거의 직선거리로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통영시지』에 따르면 원동 마을은 과객이 머물러 쉬어가는 도선원(道善院)이 있던 곳이고, 『호구총수』(1789년)와 『통영시지』에 따르면 한퇴골에는 주막촌으로 보이는 화주막동(化主幕洞)이라는 곳이 있었다. 다음은 송도역에서 구허역에 이르는 경로에 있는 주요 지역을 표시한 1970년대 통영군 광도면 일대 지도이다.
즉, 송도역에서 구허역에 이르는 길은 거리상으로 매우 효율적인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허역은 주변 역도망의 지리와 거리를 감안하여 그곳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구화역은 현재 지명으로 경남 통영시 광도면 노산리 남노산 마을이다. 이곳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북통영 톨게이트가 위치하고 있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