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10월의 첫 번째 월요일이 되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발표를 시작으로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그리고 경제학상 순으로 수상자가 유튜브 생중계 및 녹화 업로드되면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와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제외하고 노벨 문학상은 물론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아직 한 명도 없다. 노벨상 중 노벨과학상 수상은 그야말로 국격의 영예로운 증명으로 간주하는데 일본, 중국, 대만, 그리고 파키스탄까지 이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바 있다. 특히 이웃 일본은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후 지난해((2023년)까지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무려 25명이나 배출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미 1990년 ‘50-30 프로젝트’를 통해 50년 동안 기초과학 분야에서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개발(R&D)에 국민총생산의 2%를 매년 투자하고 이 중 40%를 기초 과학연구에 지원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울러 1985년 이후 지금까지 1만 5천여 개의 기초과학연구소를 세우고 꾸준히 투자를 계속해 왔다. 이 같은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과감하고 꾸준한 투자가 결국 일본이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갖게 된 원동력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은 비관적이다. 2024년 현재 우리나라의 4년제 일반 대학은 184교에 이르지만,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대학은 단 한 곳도 없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서울대의 경우, 세계 105개 고등교육체계에 속한 대학 1천500곳 이상을 대상으로 한 2025년 영국 QS(Quacquarelli Aymonds)의 대학 평가 순위에서 ‘31위’에 올랐을 뿐이다. 아시아권 대학 중에서는 싱가포르 국립대가 8위로 가장 순위가 높았고, 중국 베이징대(14위), 싱가포르 난양공대(15위)가 그 뒤를 이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대학들은 양적 팽창에 급급한 나머지 실력 있는 학생들을 양성하기보다는 그저 고만고만한 학생들을 국화빵 찍어 내듯 찍어 내 온 결과다. 그뿐만 아니라 지성의 전당으로서의 학문 연구는 뒷전이고 취업 양성소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교수들의 연구비 역시 몇몇 유수 대학교수들이 싹쓸이하고 연구비를 받아도 알맹이 없는 일과성 논문 한 편 쓰면 그만이다. 구조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심도 있는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장기지원과 공동연구가 필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앞의 연구 성과만을 중시한 채 국가 차원에서의 기초과학 육성 의지 또한 소극적이며,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연구 대학 육성에 대한 비전도 전략도 즉흥적이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로 대학 구조개혁을 소리 높여 외쳐 대지만 늘 소리만 요란할 뿐, 용두사미로 끝났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수학 능력 시험을 통해 성적순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고, 미래 인생의 진로가 결정되는 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무이하다. 초·중등학교의 모든 교육이 개성이나 적성은 무시된 채, 대학 입시를 위한 과정쯤으로 여전히 인식되고 있다. 특히 오직 점수 따기 교육, 수요자보다는 공급자 중심 교육, 그리고 자율보다는 규제 일변도의 관치 교육 정책이 알게 모르게 횡행하고 있다.
과기부는 수학·과학 영재교육 강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교육부는 어려운 기하·벡터를 수능에서 제외하는 등 엇박자를 내고 있기도 하다. 국제올림피아드 대회에서도 뒷걸음질을 치고 있고 이공계 이탈 현상은 물론 고급 두뇌 해외 유출 역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까닭에 현재와 같은 입시제도와 교육 풍토 속에서는 앞으로 100년이 가도 노벨과학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물론 한 나라의 고학 기술력을 노벨상 수상의 과다(過多)로 재단(裁斷)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정책이 노벨상 수상 목적이 돼서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세계 시장에서 초일류 제품과 초일류 기업만이 살아남듯이 우리 역시 더 늦기 전에 백지(Zero base)상태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을 위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무한경쟁 시대에서는 0.1% 초일류 인재 확보가 필수다. 이를 위해 수학능력시험을 ‘대학입학 자격시험’으로 바꾸거나 아예 폐지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수학능력시험의 성적순이 아니라, 기초과학 분야별로 재능과 능력이 뛰어난 어린 인재들을 조기 발굴하여야 한다. 그리고 국내외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자들을 초빙, 이들을 전담 지도하도록 하고, 최신 실험 실습 장비를 갖추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집중 투자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어느 해 10월에는 당당히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해야 한다. 노벨과학상 수상은 대한민국을 경제 선진국은 물론 과학 선진국으로서 국격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국민적 기대와 여망은 아득히 멀어 보인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늘려 ‘미래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연구개발 카르텔 타파’를 지시하면서 올해 1만 개 넘는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비가 일괄 삭감됐다. 이 과정에서 과기부는 연구자들과 체결한 연구개발 협약을 부랴부랴 변경해 연구비를 30%(1조5700억 원) 가까이 감액하고, 과기부 소관 연구개발 과제 97개는 아예 연구개발을 중단시켜버렸다. 연구개발이 중단된 97개 과제에 지난해까지 투입된 누적 연구개발비는 716억 원이나 된다. 답이 없는 정부, 통곡할 일이다.
[이윤배]
(현)조선대 컴퓨터공학과 명예교수
조선대학교 정보과학대학 학장
국무총리 청소년위원회 자문위원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교 초청 교수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이메일 : ybl773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