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첫 번째 그녀, 어머니

이태상

청상과부, 사람들은 그녀를 청상과부라고 했다. 그녀가 청상과부가 되기 오 년 전 나는 아름답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자궁에서 꼬박 열 달을 헤엄치며 놀았다. 그녀의 바다를 열고 세상으로 나온 겨울, 서울은 몹시도 추웠다. 

 

나라를 잃고 설움에 잠겼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그녀는 나에게 세상을 보게 해 주었다. 그녀의 품에서 나의 목숨은 안전하고 튼튼했다. 세상에 나와 나를 사랑해준 첫 번째 그녀에게 나는 어머니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오, 나의 어머니, 그녀 이름은 어머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단 하나의 사람, 어머니는 인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듯이 내게도 창조의 처음이자 종말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준 한 점의 정자로 완성된 생명체, 그것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준 씨앗이다. 아버지가 내준 한 점의 정자가 어머니가 내준 한 점의 난자를 만나 나는 세상으로 나왔다. 아버지의 정자가 그러하듯 어머니의 난자는 그 어머니가 물려 준 것이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것이니 아무도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저 바람과 저 태양과 저 별들과 한 몸이다. 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상하고 자비롭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성스러운 여성인류의 부활은 어머니를 통해서다. 

 

나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어머니라는 위대한 여성을 통해 부활했다. 청상과부인 나의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근심을 한 몸에 지니고 우리 12남매를 키웠다. 슬픔이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아니, 슬픔이 그녀를 점령하지 못했다. 슬픔이나 절망, 고통이나 근심은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3대 독자인 아버지는 마전공립보통학교 선생님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만난 그녀는 참 고운 소녀였다. 

 

정신여고를 나온 앳된 소녀가 자신의 동생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부모님 대신 학부모 자격으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동생의 학부모로 온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미 세 명의 아이까지 두고 사별한 아버지와 숫처녀인 그녀는 결혼했다. 아버지는 교사를 그만두고 태천군수가 되어 식솔들을 이끌고 태천으로 가셨다. 햇살이 유난히 맑게 내리던 다섯 살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나를 병풍 뒤로 데려갔다. 천지 분별없는 나는 그녀를 따라 병풍 뒤로 갔다. 그녀가 관속을 가리키며 인사를 하라고 했다. 

 

“태상아, 아버지께 인사 드려라”

 

그녀의 음성은 안정되어 있었다. 흔들림이 없는 낮은 단조의 음률처럼 정확하게 들렸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관속을 바라보았다. 흰 피부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아침에 봤던 그 얼굴이었다. 

 

“아, 아버지…….”

 

다섯 살의 나는 아버지라는 이름만 겨우 한 번 불렀다. 목구멍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은 목을 넘어오지 못하고 자꾸 목구멍만 간질거리고 있었다.

 

“태상아, 그만 불러도 된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다섯 살의 나를 안고 다시 병풍 앞으로 나왔다. 병풍 뒤 관속에 누워 잠을 자는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다섯 살의 나는 죽음이라는 생경한 것과 대면하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이제, 아버지를 보내 드리자. 그리고 아버지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단다.”

 

그녀는 나를 품 안으로 꼬옥 안았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기대 그녀가 품어내는 깊은 강물의 울림을 들었다. 웅웅웅거리는 그녀의 울림은 강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으로 흐르는 강물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처음 그녀의 자궁 바다를 열고 세상으로 나올 때처럼 그녀의 바다는 다섯 살의 내게 더없이 평온한 우주였다. 그녀의 우주바다에서 나는 소년이 되어갔고 청년이 되어갔다. 

 

그녀 같은 또 다른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는 그녀들의 바다를 헤엄쳐 다녔다. 그녀는 나를 철학하게 만들었고 성찰하게 했다. 그 토대 위에서 나의 청춘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인간은 여성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부터 나는 인간이란 것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것만이 존재의 근원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그녀들을 사랑하는 것, 세상의 모든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일하고 먹고 자고 숨 쉬고 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사랑이므로 나는 사랑의 근원으로 돌아가 어머니, 그녀를 사랑했다. 그 치열한 청춘 시절 격정의 한 자락을 실로 꿰어서 그녀에게 바쳤다. 

 

정녕 삶의 본질이 

사랑 아니던가.

삶의 숨결이 사랑이요.

삶의 날개가 사랑이요.

삶의 꿈이 사랑이요.

삶의 완성이 사랑이요.

삶의 시작도 끝도 

사랑이 아니던가.

사랑을 모르고 사는 억만년보다

사랑하는 한순간이 

그 얼마나 더 한없이 보람되고 복되랴!

미칠 바에는 삶에 미치고 

미칠 바에는 사랑에 미치리라.

취할 바에는 삶에 취하고 

취할 바에는 사랑에 취하리라.

정말 미치도록 취하도록 죽도록.

 

어머니, 그녀에게 지상의 모든 어린애는 다 꽃이었다. 별이었다. 무지개였다. 어린애는 하늘이며 자연이며 만물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어린애였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린애였다. 희망도 어린애였다. 꿈도 어린애였다. 젊음과 늙음이 하나이듯 왕자와 거지가 하나이듯 공주와 갈보가 하나이듯 천사와 악마가 하나이듯 십자가와 목탁이 하나이듯 스승과 제자가 하나이듯 남자와 여자가 하나이듯 주인과 머슴이 하나이듯 빛과 그림자가 하나이듯 성자와 죄인이 하나이듯 남자와 여자가 하나이듯 그녀의 어린애는 모두가 하나였다. 

 

그 어린애는 바로 나였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도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내가 그녀의 하느님이듯 그녀도 나의 하느님이었다. 나는 나의 첫 번째 그녀를 위해 늘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내 마음이 항상 그녀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에 나의 그녀는 마땅히 경배해야 할 대상이었다. 아니 우주였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은하계를 돌리는 우주였고 순수한 생명원소였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존재의 다른 말이다. 나는 그녀를 위해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위한 근원적 경험이었다. 몸으로 와서 마음으로 완성되는 존재의 근원이다. 그녀의 자궁을 찢고 나와서 다시 그녀의 자궁인 우주로 돌아간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들숨과 날숨 사이의 생명이었다. 나는 들숨과 날숨 사이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이런 경배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경배했다. 

 

그녀가 나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주듯 말이다. 그녀와 나는 알파와 오메가처럼 두 바퀴로 굴러가는 사랑의 수레였다. 완전이 불완전을 완성하듯 그녀는 내 불완전을 향해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내게 하늘님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다. 나는 늘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른다. 어머니라는 소리가 내 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그것은 곧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의 원자로부터 발현되어 나와 나의 온몸과 마음을 담은 진언이 된다. 이 소리의 변화는 의도적으로 나라는 몸과 마음을 바꾸는 오묘한 힘이 있다. 

 

바람이 별 뜻 없이 부는 것 같아도 바다는 바람의 뜻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물결을 만들어 내고 별들이 이유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도 하늘은 별들이 빛나는 것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빛남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다. 나도 아무 뜻 없이 그녀를 부르지만, 그녀는 일일이 다 내 소리의 파장을 기억해 내시고 사랑이라는 물결을 만들어 내신다.

 

어머니!

 

나는 가만히 그녀를 불러본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랑은 그녀다. 그녀와 사랑은 동의어다. 삼라만상도 그녀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천국이 그녀의 것이라면 지옥도 그녀의 것이다. 천국이 사랑이듯 지옥도 사랑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4.10.12 09:43 수정 2024.10.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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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