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희의 인간로드] 꿈꾸는 철학자 ‘장자’

전명희

나는 이천삼백구십삼 년 전 인간 ‘장자’다. 송나라 몽읍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은 맑고 너른 호수가 있고 숲이 많아 아름다운 경치가 으뜸인 곳이다. 날씨는 온화하여 농사가 잘되어 사람들은 순하고 자연은 아름다운 곳이다. 예부터 사상가가 많이 나오는 그런 곳이지만 오랑캐 취급을 받던 산월족이 많은 곳이기도 해서 죽도록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내 본래 이름은 장주다. 가난했던 부모님 밑에서 어렵게 살아왔지만, 본래 심성이 곧고 공부하기 좋아해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성장했다.

 

사는 게 궁핍하고 고달파서 끼니를 굶는 일도 많았다. 나는 며칠 굶어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먹어야만 살아남을 것 같아 물을 다스리는 관리인 감하우에게 쌀을 좀 얻으러 갔다. 가을에 빌려준 밭의 대금을 받으면 이자를 넉넉히 쳐서 갚겠으니 삼백 냥을 빌려 달라고 했지만, 그 관리는 어찌나 인정머리가 없는지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단번에 거절했다. 사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일찍 알아 버린 나는 어찌어찌하여 칠원성에 있는 말단 관리로 취직했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밤에는 공부에 매진하며 앎에 대한 갈증을 채워나갔다. 나는 여전히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의 자유를 만끽하며 학문에 매진했다. 

 

세상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 본질에 관한 연구를 쉼 없이 한 결과 세상 사람들에게 내 학문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정신적 세계를 구축했다. 이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육체와 정신을 버리고 사물에 의해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욕심과 탐내는 마음이 없이 깨끗한 상태에 도달해야 하며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아야 독립적으로 되고 대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그래야만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실현한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 세상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통치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어느 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성공하고 돌아온 조상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공무원도 때려치우고 마을 뒷골목에서 짚신이나 엮으면서 살고 있는 빈궁한 나에게 왜 이렇게 사냐고 비웃으며 말했다. 자기는 이렇게 살 바에는 살지 않겠노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위나라의 재상이며 사상가인 혜시와 나는 각별하게 지냈는데 혜시는 나의 말을 쓸모가 없다며 껄껄 웃기도 했다. 물론 허물이 없어 농담하는 것이기에 나도 그렇다고 맞장구치며 웃었다. 혜시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후원하는 벗이었다. 어느 날 혜시와 강가를 산책하다가 피라미를 발견했다.

 

“저기 보게. 피라미가 즐겁게 헤엄치니 저것이 물고기의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장자, 자넨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혜시, 자넨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난 자네가 아니니 자네가 뭘 아는지 모르고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지!”

“이보게 혜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세. 자네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네”

 

어느 해, 나의 철학과 사상을 알아본 초나라 위왕이 사람을 보냈다. 정국은 시끄럽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니 나의 사상으로 자신의 정치를 보좌해 주기를 간청해 왔다. 나는 그대들은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굴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諸侯)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한다며 돌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혜왕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선생, 왜 이렇게 지쳐 보입니까?”

“저는 가난한 것일 뿐 지친 것이 아닙니다. 도와 덕을 지닌 군자가 이를 실천하지 못했을 때 지쳤다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것을 볼 때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맞다. 안 맞다’로 편을 가르면 두 개의 상반된 가치가 서로 충돌할 수 있어 단정하지 말고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소한 것에 집착하면 본래의 뜻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 자연의 이치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세세하게 따지지 말고 하늘을 덮는 대붕처럼 크게 생각하고 너그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못생긴 사람도, 장애가 있는 사람도, 남들보다 못한 사람도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목침을 베고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을 거닐 게 되었다. 꿈속에서 어느 평화로운 들판을 거닐고 있었는데 내가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춤추며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나비가 된 것을 진실로 기뻐하다가 꿈에서 깨고 말았다. 나는 생각에 잠겨 한참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내가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나비와 나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을 텐데 나와 나비 사이에는 확실하게 형태상으로는 구별이 있을 것이나, 주체로서의 나에게는 변화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물의 변화에는 원리가 있기 마련이다. 자연의 도에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꿈속에서 내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내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연이라는 ‘도’는 끊임없이 역동하는 탓에, 그런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해석은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귀함과 천함, 삶과 죽음 등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면 오류가 생긴다. ‘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세상을 이해하고 자연과 융합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자연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팔십 세에 세상과 작별했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

 

작성 2024.10.14 11:25 수정 2024.10.14 11:44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