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열다섯 살의 까까머리 소년이었다. 천진난만한 열다섯 살의 소년인 나는 즐거운 세상놀이에 빠져있었다. 까까머리 친구들과 뛰고 까불며 열다섯 살의 초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어른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두운 얼굴의 어른들은 갈팡질팡하면서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한순간 모든 것들이 멈춘 것 같았다. 사람도 사물도 멈춰버린 것처럼 어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이 터졌어!”
그날, 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이었다. 내 위의 누이는 어른처럼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말의 뜻을 나는 잘 알지 못했지만, 전쟁이라는 말은 생경한 단어가 아니었다. 열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하면서 자랐다. 어른들의 놀이인 전쟁이 실제 났는데 어른들은 사색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고등학교 다니는 동네 형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며 학도병에 지원하기 위해 몰려다녔다. 황토색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군인들이 자주 보이는 신작로에 서서 나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 모두 떠나는구나!
나는 피난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전쟁을 피해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는데 우리는 떠나지 못하고 퍼부어대는 포탄을 피해 동네만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 차마 피난 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청상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피난이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난도 우리에겐 사치였다.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년에게 전쟁은 가혹한 시련이었다. 집도 없이 거리를 떠돌며 쓰디쓴 인생의 시련을 이겨내야 했다. 시련은 견딜 수 있는 자에게는 축복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매사를 긍정으로 시작해서 긍정으로 끝내는 타고난 성격을 지녔다. 폭격에 무참히 무너진 거리의 건물 틈을 비집고 다니던 열다섯 살의 나는 나돌아다니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도 잊은 채 종로 거리를 온종일 헤매고 다녔다. 화마에 휩싸인 거리는 총소리 대포 소리가 귀를 뚫을 듯 요란하게 들려왔다. 여기저기 죽어있는 시체들, 팔다리가 잘린 부상자들, 살겠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뒤엉킨 아비규환 속을 열다섯 살의 나는 겁도 없이 돌아다녔다.
나는 포화 속을 걸어가다가 무너진 건물 옆에 키 작은 풀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쟁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고 앗아 가는데 풀들은 그 속에서도 의연하게 생명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살아줘서 고마운 풀들을 바라보았다. 작고 여린 생명들은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리며 살아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풀들을 바라보다가 풀 속에 자라고 있는 연분홍빛 어린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전쟁과 코스모스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지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전쟁 통에 피어난 여름 코스모스가 왠지 아련하고 가여웠다. 나도 모르게 코스모스와 깊은 인연이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허리를 굽혀 몸을 낮추고 키 작은 코스모스를 바라보았다. 이때 갑자기 요란한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총탄은 무너진 벽에도 박히고 땅 위에도 나뒹굴었다. 비행기가 다 지나가고 나서야 일어서서 코스모스를 바라보았다. 나는 코스모를 보려고 허리를 굽혀 몸을 낮춘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코스모스와 나의 인연이며 기적이었다.
아, 코스모스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너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거야.
나는 코스모스가 정말 고마워서 코스모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코스모스가 내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코스모스도 살아있는 생명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기저기 튄 총알 사이로 수줍게 서 있는 코스모스에게 손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태상아, 뭐가 그리 좋아서 종일 웃고 있니?”
“누나, 세상에 기적이 있다고 믿어?”
“기적은 없어, 넌 아직 어려서 기적 같은 걸 꿈꾸나 본데 기적은 없으니까 기적 같은 거 믿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나는 누나에게 조금 전에 일어났던 코스모스의 기적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누나가 내 말을 믿어 줄 리도 없지만 소중한 인연은 가슴에 깊이 넣어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슴이 뛰었다. 가슴이 뛰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전쟁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무엇이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이제부터 나는 가슴 뛰는 대로 살 거야.”
그날 밤,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늦은 아침밥을 하기 위해 달그락거리는 어머니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이불을 걷어치우는 누나의 거친 손길 때문에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 인민군들이 온다는 소문이 동네에 쫙 퍼졌다. 누난 어머니 따라 먹을 것을 구하러 갈 거니까 태상이 넌 동생 잘 보고 있어”
“걱정하지 마, 누나…….”
멀건 죽으로 아침을 때우고 엄마와 누나는 식량을 구하러 집을 떠났다. 나는 가여운 어머니를 위해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어제 봤던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곳으로 갔다. 키 작은 코스모스는 어제처럼 바람에 몸을 흔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안녕, 코스모스
나는 허리를 굽혀 코스모스를 어루만지며 인사를 했다. 코스모스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이 흔드는 것이라는 걸 모를 리 없지만 나는 코스모스가 대답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가여운 우리 어머니를 돕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야 혹시 식량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코스모스에게 내 심정을 이야기하고 나자 마음이 좀 편한 느낌이 들었다.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코스모스를 지나 다른 마을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과수원이 나왔다. 과수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과수원 옆에 있는 주인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도 아무도 없었다. 다 피난을 떠나고 빈집만 덩그렇게 남아 여름 햇살만 쌓이고 있었다. 다시 과수원으로 갔다. 주인도 없는 과수원에는 탐스런 복숭아가 초여름 햇살에 연분홍 얼굴을 내밀고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주렁주렁 매달린 복숭아를 한아름 따서 보따리에 담았다. 복숭아를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번졌다. 한 손엔 복숭아가 가득 담긴 보따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복숭아를 우걱우걱 먹으며 집으로 걸어왔다. 그때 순찰 중이던 인민군들과 마주쳤다. 나는 복숭아를 빼앗길까 봐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야, 보따리에 든 게 뭐야?
인민군 병사는 히쭉 웃으며 다짜고짜 물었다. 나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다리가 떨리고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너 벙어리야? 보따리에 든 게 뭐냐고?”
“복숭아인데요.”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할아버지가 주셨어요.”
나는 무서워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둘러댔다. 주인이 피난을 떠나고 없는 과수원이라고 해도 남의 것을 가져온 것은 분명 나쁜 일이기 때문에 만약 바른대로 말한다면 인민군이 쏴 죽일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야, 그 복숭아 우리한테 팔 수 없겠니? 아니면 이 쌀과 바꿀래?”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인민군이 내 보따리 안을 들여다보며 복숭아를 살피고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인민군 병사의 웃음을 보며 조금 안심이 되었다.
“좋아요. 아저씨 쌀이랑 내 복숭아랑 바꿔요”
구하기 힘든 쌀을 복숭아랑 바꿔 주겠다는 것은 내게도 행운과 같았다. 늘 식량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줄 기회였다.
“저기 아저씨, 필요하시다면 찐빵도 가져다드릴 수 있어요”
쌀을 주겠다는 인민군이 고마워 나도 모르게 찐빵을 갖다주겠노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시던 찐빵을 인민군 병사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준다고 하면 어머니도 허락하실 것이다.
“하하, 조그만 녀석이 제법이야. 내일 찐빵을 가져오면 쌀을 배로 주마”
나는 인민군 병사가 내미는 쌀 포대를 넘겨받고 다시 뺏길세라 얼른 집을 향해 달려왔다. 어머니는 내가 내민 쌀 포대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나는 방금 있었던 일들을 어머니께 설명하고는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어머니는 피난을 가고 아무도 없는 과수원에서 복숭아 가져온 것은 바른 일이 아니라며 나무라셨지만 인민군 병사에게 기지를 발휘해 쌀과 바꾼 것은 잘한 일이라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찐빵을 만들어 주세요. 어머니의 찐빵은 맛있어서 누구나 좋아하잖아요. 내일 찐빵을 가져다주면 인민군 병사가 쌀을 배로 준다고 했어요.”
“그래, 우리 태상이가 이 전쟁 통에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는구나 고맙다.”
“어머니, 이게 다 코스모스와의 인연 때문이지요.”
“코스모스? 그게 무슨 말이냐”
“아……. 아니에요”
나는 어머니께 코스모스를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죽다 살아난 일을 알게 되시면 걱정하실 것이 뻔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코스모스는 오로지 내 가슴에 고이 간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음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따끈따끈한 호빵을 보따리에 담아 인민군 병사를 만나러 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인민군 병사들은 나를 보자 반기며 어서 호빵을 달라고 재촉했다.
“이거 김이 모락모락 나는구나. 맛있겠다.”
“어머니가 방금 만든 찐빵이에요. 우리 어머니 찐빵은 정말 맛있어요.”
보따리에서 찐빵을 꺼내 인민군 병사들에게 건네자 인민군 병사들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고향을 떠나와서 이렇게 맛있는 찐빵은 처음 먹어 보는구나.”
적군이지만 인민군 병사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보따리 채 건네주었다.
“고맙다. 약속한 대로 쌀은 두 배로 줄 테니 가져다가 맛있는 찐빵을 만들어 주신 어머니께 드려라.”
“아저씨 우리 엄마가 만든 찐빵 정말 맛있지요? 쌀과 바꿔 주셔서 감사해요”
“녀석, 똑똑해서 어딜 가도 굶지는 않겠구나!”
인민군 중에서 좀 높은 것 같은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줬다. 칭찬을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께 쌀을 드렸다. 어머니의 웃음 띤 얼굴을 보자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날에도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찐빵을 들고 인민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인민군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찐빵을 인민군들에게 주자 전보다 더 많은 쌀을 주었다. 열다섯 살의 까까머리 소년인 나는 코스모스의 기적이 가져다준 용기를 믿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 안에 내 곁에 내 가까이 있는 것이 기적이다. 기적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기적은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찐빵을 더 많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태상아, 넌 아직 어린애란다. 너에게 더 많은 찐빵을 팔라고 하지 못하겠구나.”
“어머니, 저는 자신 있어요. 저를 믿어주세요.”
“난리통만 아니었어도 너를 찐빵 팔게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텐데…….”
어머니는 내가 안쓰러워 울먹였다. 하지만 나는 즐거웠다.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것도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던가. 어머니를 졸라 만든 찐빵을 더 많이 들고 나는 거리로 나갔다. 좌판을 벌여 팔기도 했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찐빵을 팔았다.
“찐빵, 찐빵 사세요. 맛있는 찐빵 사세요.”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내 미성의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참 고왔다. 지나가는 소녀들이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소녀들이 볼세라 바삐 걸으면서도 찐빵을 외쳤다. 동네 구석구석을 돌고 거리를 돌면서 판 찐빵은 아주 잘 팔렸다. 찐빵이 팔리는 만큼 우리 집에는 쌀이 쌓여갔다. 쌓여가는 쌀을 보면서 나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 했다. 굶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코스모스, 고마워
눈앞에 코스모스가 어른거릴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렇게 가슴 뛰는 대로 사는 방법을 알게 해준 코스모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끔 코스모스를 보러 무너진 건물더미가 있는 곳으로 가곤 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시간을 잊기에 충분했다. 그세 인민군들이 물러가고 국군과 미군이 서울로 들어왔다. 나는 찐빵장사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국군이 소년의 찐빵을 사기 시작했다. 국군들은 어린 나를 가엽게 여겼는지 찐빵은 조금 가져가고 대신 건빵을 잔뜩 주었다. 처음 먹어 본 건빵은 정말 맛있었다.
“국군아저씨, 이 건빵 정말 맛있어요. 하하 이렇게 맛있는 건빵은 처음 먹어봐요.”
“하하하, 그렇게 맛있니? 더 줄 테니까 부모님께도 갖다 드려라”
“고맙습니다. 국군아저씨”
나는 국군들이 준 건빵을 보따리에 가득 담아 와서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건빵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필요한 것들을 사 오셨다. 굶는 일이 다반사였던 우리 가족은 인민군과 국군 덕분에 굶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남들은 다 떠나는 피난도 떠나지 못한 우리 가족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왔다.
“태상아, 어서 짐을 싸야 한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어머니의 속눈썹에는 두려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어머니? 짐을 왜 싸야 하죠?”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짐을 싸느라 정신없는 어머니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짐을 싸면서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중공군이 인민군과 함께 서울로 내려온단다. 지난번하고는 다르단다. 어서 피난을 떠나자”
어머니는 간단하게 싼 피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밖에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피난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피난을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찐빵 장사를 더 해서 피난 갔다가 돌아오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어머니, 저는 나중에 내려갈게요.”
“태상아, 이번에는 중공군까지 온다는데 위험해서 안 된다. 어서 가자”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아직 어리니까 큰 피해는 없을 거예요.”
“태상아, 고집 피우지 말고 엄마랑 같이 가자.”
어머니의 간곡한 말에도 나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어머니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밥벌이하고 싶은 내 마음은 이미 남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도저히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식구들을 데리고 먼저 떠나기로 하셨다.
“그럼, 우리 먼저 떠날 테니까 장사가 여의찮으면 빨리 내려와야 한다.”
어머니와 나는 나중에 대전에서 만나기로 하고 피난을 떠났다.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떠나지 않았을 테고 나도 중학교를 잘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포화 속에서도 의연하게 잘 있는 학교를 돌아보니 눈물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과 중공군이 서울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예전 인민군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헐벗고 가난했다. 새까맣게 밀려오는 중공군들은 학교에 진을 치고 피난을 떠난 집들을 뒤져 먹을 것을 가져갔다. 나는 중공군과 인민군들에 찐빵장사를 할 수 없었다. 나도 헐벗었지만, 그들도 헐벗었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피난을 가신 어머니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걷고 또 걸었다. 길은 걷기 위해 거기 있었다. 먼지 날리는 황톳길을 걷고 또 걸으며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다. 걷다가 우마차를 얻어 타기도 했고 인심 좋은 할머니가 건네준 누룽지로 연명하기도 했다. 무작정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희망만이 내 것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기적처럼 어머니를 만났다. 피난살이로 지친 어머니와 가족은 먹을 것이 없어 굶다시피 하고 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이끌고 어머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온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셨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장사하고자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김밥을 만들어 주세요.”
“태상아, 여긴 대전이다. 어린 네가 낯선 이곳에서 장사를 어떻게 하겠니?”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어머니”
나는 걱정으로 가득한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 이번에도 내 고집을 꺾지 못하신 어머니는 김밥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김밥을 들고 대전역으로 나갔다. 보리와 쌀이 섞인 김밥이지만 음식솜씨가 좋은 어머니 덕에 김밥은 그런대로 잘 팔렸다. 어린 것이 기특하다고 사람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김밥을 사 갔다. 나는 온종일 김밥을 팔아 돈이 손에 쥐어지면 대전 시외에 가서 엿을 받아와 다시 팔기 시작했다. 역 앞에서 팔다가 조금 더 팔 요량으로 대합실에 들어가 파니 조금 더 많이 팔렸다. 나는 이왕이면 많이 팔고 싶어 울타리를 넘어 플랫폼에 들어가 엿을 팔았다. 그러자 수입이 배가 되었다. 다음날은 아예 열차에 올라타서 엿을 팔기 시작했다.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루한 여행을 엿으로 달래려고 많이 샀다. 나는 소리를 치며 열차 안을 누비고 다녔다.
“맛있는 엿이 왔어요. 엿 사세요.”
“야, 쥐방울만한 것이 열차 안에서 엿을 팔아? 너 이리로 와”
승무원이 다가오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기겁을 하며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나를 잡으려고 뛰어오는데 서서히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다음 칸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승무원이 소리를 지르며 다음 칸까지 나를 잡으러 달려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달리는 기차에서 반대편 기찻길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도 놓치지 않고 꽉 쥐고 있던 엿판은 그대로였지만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엿을 바라보며 나는 웃음이 났다.
“그래도 엿판과 엿은 뺏기지 않았어, 다행이야 하하하”
나는 나뒹구는 엿을 다시 챙겨 나왔다. 거리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소위 계급장을 단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너, 혹시 경복중학교에 다니니?”
“네 그런데요?”
“혹시 영철이라는 아이를 알고 있니?”
남자는 옷이 없어 학교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다니던 나를 보고 경복중학교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종로구 자하문 근처에 있던 경복중학교를 알아본 것이 신기해서 나는 남자에게 친절히 대답했다.
“영철이요? 영철이는 저랑 같은 반이었어요.”
“그래, 영철이가 내 동생이란다.”
“아저씨 정말이세요?”
“정말이고말고! 피난 왔니?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갑구나.”
남자는 엿판을 들고 있는 나를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 찾았다. 그리고는 돈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 엿을 전부 싸줄 수 있겠니?”
“이 엿을 전부다요?”
“그래, 전부 다 싸줘”
남자는 나를 보며 자신의 동생인 영철이가 생각난 것 같았다. 영철이는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남자 덕분에 나는 기차에서 쫓겨나 팔지 못한 엿을 다 팔 수 있었다. 남자는 엿을 들고 멀리 멀어져 갔다. 나는 남자가 영철이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철이는 이 난리 통에 어찌 되었을까 걱정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뒤로도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 하고 대전역 근처를 누비며 계속해서 엿을 팔았다. 어느 날 길을 가던 간호장교가 나를 보더니 멈춰 서서 말을 걸었다.
“어린 학생이 고생하는구나.”
간호장교의 말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하얗고 고운 얼굴의 간호장교는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너무 예뻐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호장교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간호장교가 고생한다고 하는 말에 창피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간호장교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제법 큰 돈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아, 아니에요. 이렇게 큰돈으로 이 엿을 다 사고도 남아요. 엿은 그냥 드릴게요.”
“엿은 다른 사람에게 팔아. 나는 그냥 열심히 사는 너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는 이렇게 큰돈은 받을 수 없어요.”
“괜찮아 받아도 되는 돈이야.”
막을 사이도 없이 간호장교는 잽싸게 내 주머니에 돈을 넣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녕”
나는 멀어져 가는 간호장교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얗고 고운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찡해오는 코끝을 누르며 집으로 왔다. 어머니와 나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쌀을 샀다. 어머니 아는 분이 쌀을 사서 먼 곳에 가서 팔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귀띔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열대여섯 가마니의 쌀을 사서 화물열차에 올랐다. 화물열차에 실은 쌀가마니 위에 앉아 추위에 떨며 며칠 밤을 새워 경상도 구포에 도착했다. 구포역에서 소달구지를 구해 쌀을 싣고 그 지역에서 제일 크다는 싸전을 찾아갔다. 싸전주인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보더니 혀부터 끌끌 찼다.
“에구, 세상에 이 먼 곳까지 쌀을 싣고 왔어?”
“할아버지 많이 쳐주세요.”
“어린 것이 착하고 용하네. 값을 많이 쳐줄 테니까 놓고 가거라.”
싸전주인 할아버지의 말씀에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덩달아 기뻤다. 싸전주인 할아버지의 배려로 쌀을 전부 팔고 상당한 이문을 남겼다. 어머니와 나는 할아버지께 큰 인사를 드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대전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전으로 돌아온 나는 쌀을 팔아 번 돈으로 공설시장에 나가 양키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시장 바닥에 큰 멍석을 펴 놓고 백여 가지가 넘는 양키 물건을 진열해 놓으니까 큰 상점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쳐가며 신나게 팔았다.
“양키 물건 있어요. 어서 사가세요”
며칠 만에 물건을 거의 다 팔고 나는 다시 양키 물건을 사러 미군 제1군단이 주둔해 있던 마을로 갔다. 마침 미군은 이동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짐을 실은 차량들과 미군들이 탄 트럭이 쭉 서 있었다. 나는 물건을 사지 못살까 봐 조바심이 났다. 맨 앞에 있는 지프차로 다가가서 차 문을 두드렸다.
“아이 유어 하우스보이 오케이?”
학교에서 배운 짧은 영어 몇 마디를 제스처와 함께하니까 높은 사람인 듯한 키다리 미군이 내 두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미소를 띠며 자기 지프차에 올라타라는 몸짓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서툰 영어 몇 마디를 더 내뱉었다.
“웨이트 어 모우먼트. 아이 마스트 고 앤드 스피크 투 마더”
키다리 미군은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번쩍 들어서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운전병에게 영어로 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옛썰”
운전병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경례를 부친 후 차를 몰았다. 나는 키다리 미군 옆에서 어리둥절하며 조금 불안했지만, 별일이야 있겠는가 싶어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있었다.
“웨어 웨어 유어 마더?”
운전병은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켰다. 나는 운전병에게 시장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지프차는 빠른 속도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어머니가 노점을 하는 공설시장에 도착했다. 어머니 앞에 나를 내려 준 키다리 미군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갔다.
“어머니, 전 이제 구두닦이가 될 거예요. 미군들 구두를 닦으면서 영어도 배울 수 있어요.”
“그래, 그렇게 해라. 그 미군장교가 사람이 좋아 보이더라.”
그날부터 미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장교들 구두와 사병들 구두를 닦았다. 구두를 닦는 일 말고도 나는 잔심부름도 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도 정리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부대 안에서 구두를 윤이 반짝반짝 나게 닦고 다른 일도 찾아서 해주니까 다들 나를 예뻐하고 귀여워해 줬다. 그런 나에게 장교들과 병사들은 초콜릿, 껌, 과자 등 별의별 것들을 잔뜩 주었다. 나는 미군들이 주는 것을 먹지 않고 모아서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는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서울이 다시 탈환되자 미군부대도 서울로 이동했다.
나는 어머니를 대전에 두고 홀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군 부대가 주둔해 있는 성동중학교까지 가서 구두닦이를 하고 온 후 학교에 갔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구두닦이를 하면서 학교를 다녀도 즐겁고 재밌었다. 그러던 중 미군부대는 다시 영등포로 이동했다. 나는 미군부대를 따라 학교를 영등포종합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나는 키다리 미군을 좋아했다. 키다리 미군도 나를 귀여워하며 자식처럼 여겼다. 사령관인 키다리 미군은 서양고전음악을 즐겨듣곤 했다. 나도 미군 아저씨를 따라 클래식에 빠져들었다. 키다리 미군은 그런 나를 보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태상, 네가 음악 공부하겠다고 하면 너를 미국의 줄리아드음대에 꼭 보내주마”
나는 키다리 미군이 고마웠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한국을 사랑하던 키다리 미군은 근무기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내게 넌지시 말했다. 나는 몹시도 서운했다. 가슴 한편이 서늘하고 뭔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왔다. 나를 자식처럼 사랑해 준 키다리 미군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의지해 왔던 키다리 미군이 한국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격한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국을 떠나기 전 키다리 미군은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나는 이별을 짐작하고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키다리 미군은 사람 좋은 미소를 내게 보내며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난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까 한다.”
“…….”
“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슴이 뛰었단다. 너를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어.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간다면 입양해서 양자로 삼고 공부시켜주겠다. 너의 생각은 어떠니?”
“입양이요?”
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나를 사랑해주는 키다리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대답은 이미 목구멍으로 나오고 있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고맙지만, 어머니께 여쭈어봐야 해요”
“그래?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대전에 계세요”
“그럼 시간을 줄 테니 대전에 가서 어머니께 여쭙고 와라”
키다리 미군의 제안을 가지고 나는 다음날 대전으로 내려갔다.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양키물건을 팔고 있던 어머니는 나를 보자 반갑고 대견해하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나는 순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가엽고 가여운 어머니를 두고 멀리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손을 만지며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날 밤 서울행 기차를 탔다. 한숨 못 자고 뜬눈으로 서울역에 내려 미군부대를 찾아갔다.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미국 가는 걸 반대 하세요”
어머니에게 미국행은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사령관에게 거짓말을 했다. 가슴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들이 뒤엉켜 울음이 되어 나왔다. 키다리 미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길어지고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괜히 손톱만 뜯고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란다. 너의 선택이 옳다.”
“사, 사령관님 죄송해요”
“부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나라 만들기 바란다”
키다리 미군이 떠나는 날 아침, 낯설지 않은 지프차가 내 앞에 서더니 키다리 미군이 나를 자기 친구에게 부탁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키다리 미군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의 손길이 닿자 나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떠나는 키다리 미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지프차에 올라 키다리 미군에게 손을 흔들었다. 키다리 미군은 멀어져 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키다리 미군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소리를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를 태운 지프는 달리고 달려 서대전에 도착했다. 나를 맡아 주기로 한 사람은 유엔의 한국원조기구 부사령관이었다. 그 밑에 있는 임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민간인들이었다. 부사령관 숙소에는 이미 하우스보이가 있었는데 도둑질하고 떠나버렸다고 했다. 나는 떠난 하우스보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나는 부사령관의 배려로 대전의 피난종합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부사령관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영국군 퇴역 대령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총검에 찔린 흉터와 몸속에서 빼내지 못한 총알이 박혀 있다고 했다. 퇴역 후 뉴질랜드 주지사도 지낸 부사령관은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주고 귀여워해 주었다. 가끔 미군장교클럽에 나를 데리고 가서 테이블 위에 세워놓고 영어로 연설시키기도 했다. 나는 영어를 꽤 잘했고 영어연설에도 자신이 있었다.
“태상, 내가 영국으로 떠나면 함께 가자, 네가 원한다면 옥스퍼드대학도 보내줄 거야.”
부사령관은 나에게 입버릇처럼 영국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사령관이 쓰러졌다. 술과 담배를 즐겨했던 부사령관은 귀국 날짜를 육 개월 남겨 놓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어느덧 부성에 대한 감정이 무뎌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섯 살에 떠난 아버지, 미국으로 돌아간 키다리 미군, 그리고 암으로 죽은 부사령관은 모두 내게 부성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부성이라는 아버지들의 이름을 부르며 덧없는 삶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삶은 꿈이어라
꿈이어라 꿈이어라
우리 삶은 꿈이어라.
꿈속에서 꿈꾸는
우리 삶은 꿈이어라.
우리 삶이 꿈이라면
우리 서로 사랑하는
가슴에 수놓는
사슴의 꿈이어라.
우리 삶은 꿈이기에
꿈인 대로 좋으리라.
우리 삶이 꿈 아니라면
그 어찌 사나운 짐승한테
갈가리 찢기우는 사슴의
슬픔과 아픔을 참아
견딜 수 있을까?
숨이어라 숨이어라
우리 삶은 숨이어라.
숨 속에서 숨쉬는
우리 삶은 숨이어라.
우리 삶이 숨이라면
우리 모두 하늘 우러러 숨 쉬는
사슴의 숨이어라.
우리 삶은 숨이기에
숨인 대로 좋으리라.
우리 삶이 숨 아니라면
그 어찌 사나운 비바람
천둥번개 무릅쓰고 뛰노는
사슴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냥 맛볼 수 있을까?
우리 서로 사랑하는
가슴이 준 말
‘사슴’이 되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